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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전국연합회 제33회기 임원수련회 특강 / 루터의 종교개헉과 한국교회의 개혁

관리자 2014-05-16 (금) 07:20 11년전 2654  
2014년 5월 15일(목) 오후 7시 30분 한국기독교장로회 장로회임원수련회 강연
 
성경본문 : 하박국 2 장 4 절, 야고보서 2 장 14 절 - 17 절
제 목 :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개혁!
 
 
■ 저는 지금껏 축사와 인사 격려사를 주로 해왔지 강의는 별반 해오지 않았는데 오늘 안 해 보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로회임원들 앞에 강의를 할 만큼의 강사가 아닙니다만 아마도 회장이신 유영준 장로님께서 사랑하셔서 저를 세워주신 것 같습니다. 유영준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우리 기장을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가운데 굳건히 세워지기 까지 참으로 헌신해 주신 여기 모이신 장로회 임원님들과 전국에 계신 모든 기장의 장로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요즘 한층 더 “한국기독교”가 인터넷 공간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있고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소유한 그룹의 실질적 ceo가 유병언 목사이고 그 목사가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속이고 구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디어들은 대다수의 승객들을 내팽개친 채 세월호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전원 탈출하여 살아서 생존자 명단에 들었는데 그 선장과 선원들이 대부분 구원파에 소속한 교인들이라 보도하였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네티즌들은 기독교하면 구원이요 구원파라고 해서 기독교와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개독교의 차이로도 보지 않고 개독교일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비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쯧쯧! 개독교가 또 사고를 쳤구만! 개독교의 구원이란 자기네들(선장과 선원)만 살리고 다른 이들은 다 죽이는가봐!” 여기에다가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노아>는 그런 인식에 한 몫을 합니다. 영화 <노아>는 창세기의 노아를 블록버스터의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심각하게 오용을 하였습니다. 홍수가 닥치자 살려고 방주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네피림들이 노아를 도와 다 죽이지 않습니까? “거봐! 개독교의 구원이란 자기네와 자기네 가족들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여버리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는거야! 걔네가 믿는 하나님도 그렇게 무정한가봐!!” 그런 비난입니다. 저는 영화 “노아”를 보았는데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을 도처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원파 교리의 핵심은 역시 구원인데 <죄를 깨닫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고 한 번 영혼의 구원을 받으면 육신은 자연히 구원된다>고 주장하고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중에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구원파와 권신찬 목사는 이단으로 정죄됩니다.
 
 
■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다룬 신학책들을 보게 되면 이단은 왜 생기는가? 근원적인 문제를 질문합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역할을 잘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복음침례회나 구원파 유병언과 그의 일파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일반을 비판한 대 대하여 우리 한국기독교는 “우리는 유병언이나 구원파가 아닌데!!” 하면서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 기독교가 교회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단들이 발호하게 되었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였기에 우리가 정의 평화 생명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각종 탐욕의 악과 이기주의의 악과 무책임의 악이 판치고 기승을 부려도 그것을 방기하고 나몰라라라 한 것이 젊은 군인들을 죽이고 대학생들을 죽이고 단원고 고등학생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냐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해야 할 이들이 바로 우리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였고 우리의 죄가 어린학생들을 죽인 것이라고 참회하고 회개하면서 참으로 생명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만들고 정의로운 사회구조와 체제를 만들어갈 때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금번 세월호 참사와 함께 우리 한국기독교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하게 된 문제를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해가 1517 년이니 이제 3 년 후면 종교개혁 500 주년이 됩니다. 유럽의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교회는 종교개혁 500 주년에 즈음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애시당초 종교개혁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카톨릭교회의 부패상과 하늘의 구원을 인간의 돈이나 물질로 사고파는 비성서적인 현실을 성경을 인용하며 조목조목 95 개조로 비판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마치 성냥불 하나를 그어댄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당시 카톨릭교회를 뒤엎어 버리고 기독교세계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을 불태워버리는 커다란 불길로 타오르게 되고 급기야 세계역사를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시키는 촉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마르틴 루터 역시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95 개조의 핵심은 하나의 성경말씀이었습니다. 구약 하박국 2 장 4 절에 나오기도 하고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의인>이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로마서 4 장 18 절 전반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리고 22 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루터가 당시 카톨릭교회를 비판한 것 중에 하나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한 것>>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행위가 교회가 정한 기준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획득케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정한 인위적인 것으로써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됨을 말한 것입니다.
 
 
■ 당시 면죄부 판매사였던 테첼이라는 신부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면죄부를 세일즈하였는데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해) 금화를 통 속에 떨어뜨려 ”땡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너희 부모님들의 영혼은 지옥이나 연옥에서 천국으로 자동적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라!!“ 마틴 루터는 ”그거야 말로 성경말씀을 무시한 사기다!“ 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 로마서와 하박국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무슨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무슨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무슨 공적을 쌓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카톨릭교회는 구원을 인간이 하는 행위나 업적으로, 그리고 무슨 선한 행위와 교환수단이거나 교회에 헌금하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켰던 것인데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할 교회가 그런 사기를 치면 되느냐 강력하게 비판하고 저항한 것입니다. 95 개조 중에서 32 조는 이렇습니다. <32. Wer durch Ablassbriefe meint seiner Seligkeit gewiss zu sein, der wird ewiglich verdammt sein samt seinen Lehrmeistern. 32. Those who believe that through letters of pardon they are made sure of their own salvation will be eternally damned along with their teachers.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여기서 업적이라 할 때 마르틴 루터와 같은 동시대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좀 더 철저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그 믿음도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믿지 못하는 신실치 못한 여러 구석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갈이라는 첩을 두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연약한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온전케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전적인 그의 은혜로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나사로를 위로하고 있다 하였으니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내게 오라 하였을 때 한 발을 뗐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다가 물 속에 빠져갔지만 예수님은 그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지만 그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케 하시고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입니다.
 
 
■ 16 세기 당시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 더 정확하게 보자면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초기 정신은 좋았는데 그 개혁이 수행되는 가운데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는 가운데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이 힘을 얻게 되자 그것을 빌미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의 지역에서 서로 각 나라에서 심지어는 한 가정 안에서도 카톨릭과 반카톨릭으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나쁘다 지적하면서 그것을 고치려 하다가 더 나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다 기독교(Christianity)입니다. 둘 다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데 그리고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서로 죽고 죽여 유럽 각 나라에서 종교전쟁으로만 해도 수백 만 명의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밝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겠다고 하면서 서로 칼과 총부리를 들이대고 이교도라고 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 당시 행태로 보면 카톨릭도 반성경적이었고 프로테스탄트도 반성경적이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자 칼빈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이유로 셀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데 묵인하게 됩니다.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는데 성경의 중심은 사랑인데도 사랑과는 반대되는 증오와 미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흘리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23 장 34 절) 종교개혁이 지속되면서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종교가 아닌 생명을 죽이고 해치는 미움의 종교가 되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 500 주년이라 하여 기념하자는 것은 꼭 종교개혁이 역사적으로 선한 유산만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당시 부패한 카톨릭교회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성경적으로 옳은 일을 하였으나 인간의 죄성은 종교개혁을 오히려 성경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뜻과는 먼 그곳으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처음 시작은 옳았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토록 고난을 당하고 외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면서 보다 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는 고난에서 해방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 세부적인 사항을 만들어 그것을 민중들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였는데 오히려 그 세세한 계명들이 인간을 구속하고 얽어매었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율법주의>로 만들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동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면서 신랄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짐 지워 놓았던 율법주의의 짐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마가복음 2 장 27 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시고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을 자유토록 하기 위함이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지 결코 구속하고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듯이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들도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장하는 바를 반대할 때 그들을 화형에 처하여 죽게 만들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교도들과 전쟁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였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낳은 결과입니다.
 
 
■ 한국의 교회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500 주년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최초의 그 정신을 바로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하는데 “protest"는 항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것, 하늘 뜻이 아닌 것에 “protest"한다는 것인데 과연 한국교회는 오늘 이 시대 하늘의 뜻을 세우면서 악한 것들과 제대로 싸우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아니면 한국교회는 개혁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재의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하고있지 않은지? 또 다른 한편으로 혹시 한국교회가 개혁을 한다면서 혹시 바리새인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았는지 혹시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같이 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더 멀어지지 않았는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나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인터넷 공간에 가보면 한국교회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얻어 맞고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당연하게 쓰는 용어가 바로 개독교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개같은 종교”, “독을 품어내는 종교”란 뜻입니다. 제가 제일 처음 이 말을 인터넷에서 접했을 때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우리 기독교를 매도하고 욕할 수 있는지 해도 너무 한다 싶었습니다. 그때 만해도 저는 시골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그래도 잘하고 있는 것들도 많은데 못하고 있는 것들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서 그렇게 비난을 하는 것은 상궤에 벗어난다 싶었습니다. 제가 총회 기관목사를 하고부터 한국교회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저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들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너무나도 많은 면모를 우리 기독교가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기독교의 현상을 보고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 잘못한 것보다도 매를 덜 맞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교회들은 수백억, 수천억씩 주고 교회를 짓는다든지, 교회를 사유재산과 같이 여겨서 대형교회들을 자식들이 세습한다든지, “살인마 전두환을 교회강단에 세우고 축사를 하게 한다든지, 저들 독재자들을 위하여 조찬기도회를 개최한다든지”, “독재자 박정희를 찬양하는 예배를 드려준다든지”, “교회들 사이에 교단들 사이에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또 교단장이 되기 위해 법정소송을 벌인다든지”, “가짜박사학위를 받거나 제조한다든지 그리고 교회주보에 버젓이 내놓는다든지”, “목회자가 여러 가지 스캔들을 일으킨다든지”, “온갖 이권에 개입해 있다든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천국의 축복과 치환시킨다든지!” “기독교를 반공이데올로기와 일체화시킨다든지” 등등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소재들과 꺼리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 인테넷 공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저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로, <기독교지도자>를 <개독교의 괴수>로, <성경>을 <똥경>으로, <그리스도인>을 <예수쟁이>로, <평신도>를 <병신도>로, <집사>를 <잡사>로, <목사>를 <먹사>로, 혹은 평신도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뱀파이어>로 말합니다. 저들에 의하면 <교회>는 개들이 사니까 당연히 <개집>이라 합니다. 기존 교회들은 이렇게 비판하는 저들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말하고 기독교를 해하려는 “붉은용의 세력들” 혹은 “공중의 권세잡은 이들”이라 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을 공격하고 사탄의 무리라고 공격하기 전에 저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토록 공격해댈까? 우리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없는 것일까? 조용히 우리의 모습들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학교 앞에 기독교서점이 있었는데 마르크스를 예언자 씨리즈에 담아 만든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자 “아니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무신론자인데 이 따위 인물을 예언자씨리즈에 담은 연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 그 책을 샀습니다. 가만히 서문 속에서 그 의도를 찾았는데 대충 그러했습니다. 소련에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 민중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전제정치에 의해 죽어갔을 때 당시 러시아기독교인 러시아정교회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성직자의 후드 색깔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고난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상아탑 위에 고고한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중들의 고난을 아파하면서 당시 현상의 기독교를 무신론자 마르크스로 하여금 비판하게 하고 ”민중들의 아편“으로 비판한 것이니 마르크스야 말로 당시 하나님께서 시대의 예언자로 삼으신 게 아니었겠는가 그런 논조였습니다. 성경에 이방왕들을 들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을 치지 않습니까?
 
 
■ 그런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한 그 세력들은 <익명의 예언자들>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자들이 하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행하니 하나님께서 안티기독교가 되어서 저들을 통해 기독교를 그렇게 혹독하게 비판하고 비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anti-Christ"가 아니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말해주는 심판 예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욕을 해대는, 비난을 일삼는 저들에게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생각하고, 우리의 옷매무새도 그걸 보고 고치고 우리의 얼룩과 흠도 그 거울을 보고 고치는 오히려 우리는 저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겠느냐?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짠 맛을 잃어 밟히고 있는데, 밟힌다고 밟는 저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냐고 저들에게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 우리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저들을 반격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그렇게 공격을 받을까 연구하고, 우리들 안에 있는 저들이 말하는 “개같은 짓들”이 무엇인지 우리들 안에 독을 품어내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서울의 강남의 한 목사가 -물론 기장교회는 아닙니다만- 기독교텔레비젼에서 설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저 무신론자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도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면 그 많은 교인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설교가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도록 하여 주께로 나오게 하여 저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품 안에 있게 합시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만 있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 설교 속에 사랑의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비난하는 주장들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의 비난 속에서 우리가 그 중심을 봐야 하는데, 비난의 핵심이 뭐냐? “너희 속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기독교를 말하고 예수를 선전하지만 너희들 자체 속에 그리스도가 없고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투쟁을 하는 가운데 서구 기독교를 경험하면서 그런 비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 만이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도 비판을 받았고 역사적 기독교도 그렇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우리 교단과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제자교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하비콕스 박사가 특별강연을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로 나뉘어진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는 박해받고 순교도 한 초대교회 전통을 담지한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였다면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먹어버린 것처럼 여겨졌지만 오히려 제국주의에 의해 기독교가 먹혀 버린 껍데기만 남고 함몰되어버린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예수 정신은 어디로 온데간데 없고 제국주의 정신만 살아있어 그 정신으로 계급주의적 질서를 만들었다. -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복자 등 - 또한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서 이슬람이라 이교도라 하여 칼로 도륙하였다. 제국의 질서는 통일성(uniformity) 인데 교리가 서로 다르다고 화형으로 다스리고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한마디로 베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가 개독교로서 예수가 없다!”는 것과 하비콕스가 말한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는 의미상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 유럽의 기독교와 미국의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쇠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발흥지라 할 수 있는 서구 즉 유럽의 기독교는 이제 황혼 해질녁을 이미 지났습니다. 저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단의 장학금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1 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에딘버러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나게 큰 교회가 있어서 주일날 그 교회를 한 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교회가 너무 커서 약도가 필요 없었습니다. 교회의 첨탑을 바라보고 쭉 가면 되는 길이었습니다. 가보니 그것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술집(pub)이었습니다. 원래 오래 전 교회였는데 성도들은 점점 줄어들고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술집에 팔아 넘긴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녔던 교회가 "성 애드류스 앤 성 죠지스 교회“였는데 성 앤드류스 교회와 성 죠지스 교회가 합병한 것이었는데 2 년 전 다시 가보니 세 교회가 합병하여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보니 그 큰 교회당이 텅텅 비었고 어린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교회에 갔더니 지금은 프랑스개혁교회의 총무였던 분이 저를 안내하면서 ‘6-70 년 전만 하더라도 프랑스교회는 전체인구 7-80 %가 교인들이었다. 지금은 교회 나오는 숫자가 3-4 %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파리에 있는 엄청난 큰 교회당들이 무척 많은데 이제는 관광객들만 오지 예배드리는 숫자는 3-40 명도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성도들이 줄어들어 아예 이제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미국교회라 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와 선교협력을 맺고 있는 미장로교(PC-USA)는 과거 한 세대전만해도 350 만 교인수였지만 지금은 거의 반토막이 나서 190 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유럽의 교회는 거의 사양길로 들어서고 있고 미국의 교회들도 암환자와 같이 계속 체중이 감소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도 같은 하향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1960 년대와 1970 년대 부흥의 불길이 거세 교회와 교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다가 1980 년대부터 완만한 성장을 보이다가 1990 년대에서부터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하였고 2000 년대에는 완만한 감소를 보이다가 2010 년대부터 좀 더 빠른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빠른 감소를 보이고 있는 교단이 그 중에는 예장합동류의 교회들과 감리교 그리고 기하성류의 교단들입니다. 예장통합교단의 경우에는 지난 총회에 5 만 6 천명이 감소했습니다. 100 명 교인수의 교회가 약 560 개가 없어진 것입니다. 21 세기 초반 한국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쇠퇴해가고 축소재생산해 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 기장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추세가 완만하기 하지만 기장도 줄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장로님들이 속한 교회가 지난 해와 올해 성도수가 똑같았다면 여러분 교회와 담임목사님이 엄청나게 목회를 잘하는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이 언젠가 리서치 결과를 발표했는데 앞으로 30 년 이내에 개신교와 불교는 거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사라지거나 미미하게 되고 카톨릭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와는 다르지만 교육목회실천협의회에서는 현재의 추세로 지속된다면 2050 년이 되면 기독교 교인수는 약 300 만명으로 반토막이 날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 왜 한국교회의 성도들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까요?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사회환경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나이를 드신 성도님들은 이제 한 분 두 분 천국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젊은 청년들은 일자리 마련 때문에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상급학교와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데 공부에 올인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나올 수 없습니다. 신혼부부들은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서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가장 저출산국가가 되어 있고 그래서 영아부 어린이부가 점점 줄어가고 있는 객관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주부들도 왠만하면 모두가 직장을 가지고 있고 주일날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in-put요인들은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하는 out-put 요인들은 너무도 많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내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교회안의 내적 구조가 새로운 교인들을 빨아들이는 스폰지 구조가 아니라 새 교우들을 토해내는 어떤 공해와 같은 메카니즘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통계청이 인구조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1995 년부터 2005 년까지 불교도 조금 늘었고 카톨릭교회는 무려 75.6 % 성장을 했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1.9 %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대체 왜 개신교가 감자탕 전도다 고구마전도다 이슬비전도다 진돗개 전도다 전도를 많이 하는데 교인수는 줄었을까 리서치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중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응답이 나왔습니다. “개신교에 갔더니 시댁분위기와 같았는데 카톨릭에 갔더니 친정분위기더라!”, “교인들이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징하고 더 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취를 맡는 것이 아닌 냄새를 맡아 역겨워서 얼른 그 공해지대이고 오염지대인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제가 교회목회를 할 때 어떤 집사가 전도해 왔는데 전도된 사람이 전도한 사람 때문에 혹은 교회 안에 고참 신앙인들 때문에 일종 종교적 텃세를 부리면서 생활윤리와 도덕의 가치가 세상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인해 상처받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내가 다시는 교회 같은 것 다니나 봐라!” 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떠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사는 은은한 향내가 아닌 종교적인 독선 때문에 나는 독한 냄새가 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새신자를 토해 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교인들의 사회적 삶의 양식이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살면서 참으로 선하게 산다면 그 착함의 관계망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도가 이루어질텐데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모르지만 세상 밖에서는 <모이는 교회>는 되는데 <흩어지는 교회>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물질적이고 경제지상주의를 신봉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자본을 더 믿고 경제를 더 중시하고 내 이익을 더 앞세웁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를 살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면서 향기를 풍겨내면서 빛을 비추이면서 살아간다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아지고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가 되고 전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비록 예수 믿어라! 우리 교회 나와라! 그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먼저 희생하고 먼저 손해보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자신을 저주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주고 산다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이 믿는 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신앙은 좋다고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득에는 더욱 아득바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슴은 너무도 냉냉하고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나누는데 인색하면서 독을 품어내면서 산다면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나는 너같이 될까봐 예수 같은 거 믿지 않겠다!”, “네가 믿는 예수도 그렇게 독한 사람일까봐 나는 예수 같은 것 죽어도 믿지 않겠다!” 하고 결국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져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만큼 손해보려 하지 않고 손톱만치도 희생하려 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도 천국에 들어가는 막고 서 있는 셈이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는 예수 믿고 싶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기독교는 개독교라, 교회는 개집이라 비판받고 있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의 문을 굳건히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무섭게 이기주의적이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점점 하향길로 치닿고 있는 것입니다.
 
 
■ 특별히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본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장로대통령이 나왔다면 선교적으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대통령이 참으로 헌신을 하고 국민들이 흠모하는 정치를 하게 된다면 “역시 교회장로라 정치하는 것도 다르구나!” 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도 통으로 무척 좋아졌을 것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선교가 더 활발해지는 환경을 조성했을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라 일컫는 이승만 장로가 독재를 하지 않고 친일파를 끌어드리지 않고 청정하게 대통령을 하다가 아니 더하시라고 그토록 강청했는데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임기를 다하고 물러났다면 -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같이 - 그는 나라의 국부로서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기독교의 이미지는 무척 좋아져서 선교환경은 참으로 환해지고 밝아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역대 장로대통령이 셋이나 나왔는데 한 대통령은 장기집권과 부정선거를 도모하다가 국민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어 해외에서 죽었고 다른 한 대통령은 나라를 국가부도 아이엠에프를 초래하게 하였고 또 다른 한 대통령은 온갖 부패로 얼룩지고 생태를 파괴한 대통령으로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진실로 타의 모범이 되었으면 기독교는 민중들 사이에서 국민들 사이에서 호감종교가 되어 너도나도 기독교인이 되려 하였을 것입니다.
 
 
넷째는 한국교회와 개신교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분명 블랙홀이 있습니다. 뭔가 큰 구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밖으로 부터가 아닌 안에 있는 웜홀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불과 1 ~ 2 % 정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시대를 주도하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이 25 %가 되는데도 개독교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CBS에서 "높은 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나와서 정확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런 요지의 강연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이 먼저 들어왔고 개신교는 한참 이후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개신교가 카톨릭을 훨씬 앞서 갔다! 왜일까? 개신교는 제일 처음 민중들에 의해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다. 개신교 초기는 교회가 무척 민족과 민중과 그 시대의 사회를 향하여 무언가를 주었다! 삼일운동, 나라빚갚기운동, 물산장려운동, 독립운동 그런 운동을 전개하여 당시 시대에 봉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개신교는 점정 융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20 세기 후반 들어 개신교는 점점 쇠퇴해가는 데 비해 카톨릭은 융성해 간다! 왜 그럴까? 기독교는 100 주년을 맞이하고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100 주년 기념사업이다 100 주년 기념관이다 해서 건물부터 때려짓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카톨릭은 무엇을 시작했냐 하면 시각장애인 눈떠주기 운동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가는 일을 시작했다 지난 10 년 동안에 카톨릭 교회는 점점 회중들이 늘어났지만 개신교는 실제로는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오늘날 개신교가 그 사회에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요즘 카톨릭 교회는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에 대거 등록하여 새신자등록 양식을 찍어내는데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무척 개혁적인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인기를 훨씬 상회하고 세계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 카톨릭에 대한 인식들이 좋아지고 있는 점도 한 몫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카톨릭교회는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생겼고 “개신교 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간단한 답이 나옵니다. 대부분은 개신교 신자들이 카톨릭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카톨릭교회신자는 약 100 만명이 더 늘어나는데 비해 개신교 신자들은 100 만명쯤 줄어든 것입니다.
 
 
■ 만일 상기에 언급한 네 가지 요인들이 부정적인 시너지들로만 이루어간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특별히 한국개신교회는 앞으로 16 년이 지난 2030 년에는 미국장로교가 반토막 난 것 이상으로 1-200 만명도 남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어떤 기독교미래학자들은 그렇게 비판합니다. 이렇게 썩은 기독교라면 이렇게 물질주의적이고 그토록 탐욕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기독교라면 확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 철저한 무너짐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예수 정신을 지닌 기독교가 재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개혁>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교회가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고 교회 밖에서 교회가 저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통용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고 개신교의 교회는 대부분이 개혁교회에 속하는데 개혁교회의 모토가 “항상 스스로 개혁해 가는 교회”(Semper Reformanda)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점점 더 부패해져 가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교회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할까? 교회의 개혁의 원리는 무엇일까? 저는 한국교회의 개혁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루터가 당시 카톨릭교회를 개혁하게 되는 기본 바탕이 성경 하박국과 로마서에 기초를 두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상황도 성경말씀에 의하여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요즘 정도전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데 이성계를 앞장 세웁니다. 사실상 정도전에게 472 년 가까이 이어온 썩은 고려왕조를 연이어가는 것에는 조금도 미련도 없고 염두에 없습니다. 또한 이성계 장군을 왕위로 옹립하려는 것은 다름이 아닌 정도전 안에 오롯한 것 하나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그것은 “민본(民本)”입니다. 정확하게 백성이 본이 되는 나라입니다. 왕권보다도 백성이 정도전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고 백성이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사는 것에 역점을 두는 정치를 하고자 고려왕실을 뒤엎은 것입니다. 그는 균전제를 실시를 주장함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데 힘을 썼습니다. 정도전의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전제(私田制)를 혁파하고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그의 개혁의 핵심은 <민이 본이 되는 정치>이었습니다.
 
 
■ 정도전의 개혁의 핵심인 <민본>과 같은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개혁에 해당되는 키워드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을 야고보서 2 장 14 절에서 17 절에서 찾고 싶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니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이 있는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은 “믿음”에다 방점을 두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즉 의인사상으로 중세 카톨릭교회의 썩은 공적사상을 혁파해 나갔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3 대 원리인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Sola Gratia> 였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어떤 틀에 박힌 관념이 되어갔습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하였을 때 개혁자들의 믿음은 인간의 죄성에 의해 변질되어 박제화된 돌같이 굳는 믿음이 되어 “꿩 잡는 것이 매”라고 구원받는데 오직 믿음만이 필요한 것이지 기타 등등은 부수적인 것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아이템의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믿음이 절대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가운데서 <인간의 행함-착함과 선함>은 구원받는데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었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신학과 신앙 안에서 믿음과 삶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그러면서 개신교회는 이상하게 변질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밀양 密陽>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전도연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주인공의 자녀가 살해당하였습니다. 결국 유치원 원장이 살해범으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예수를 믿고 감화감동을 받아 감옥에 있는 살해범을 용서해 주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살해범은 태연하게 자기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이미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거기서 주인공이 돌아버립니다. “내가 아직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받았다고 환한 얼굴로 있는가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 이제 오늘날의 교회개혁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혹은 <행함이 함께 하는 믿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야고보서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 장 21 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구원은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개혁자들의 의인론(義認論)과는 다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하시는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 장 40 절) 예수님께 양으로 분류되는 구원은 이 땅에서의 사랑의 실천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이룹니다. 마태복음 12 장 33 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예수님의 구원론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제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애인론(愛認論)” 사랑으로 증명되는 믿음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는데 사랑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있지 못하고 사랑으로 증명되는 믿음이 하늘의 구원으로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 어떻게 보면 역사의 교회, 즉 종교개혁의 교회가 지나치게 의인(義認, Justification by Faith) 만을 강조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어떤 <영적 이기주의자들>로만 만든 측면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때 배운 노래가 있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 거듭나면 가는 나라 /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돈으로도 지식으로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여기에 줄을 그어 봅시다. 물론 하늘나라는 믿음으로 가지만 여기서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이 부분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믿음만 있으면 아무리 사악해도 천국에 들어가지만 아무리 맘이 착하더라도 배가 난파되어 설령 내 구조 조끼를 옆에 있는 친구에게 준다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에 못간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착함의 가치, 선함의 가치는 무시되고 등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됐지! 구원받으면 됐지! 아 무슨 선행 같은 게 필요해!” 의인(義認)의 교리에는 그런 커다란 블랙홀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지장보살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있으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이웃종교인 불교에서도 이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참 진리라고 믿는 우리의 가르침이 “남이야 어찌든 나만은 예수 믿고 구원받자!”로 나온다면 윤리적인 면에서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는 불교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여겨질 것 아닙니까? 물론 성경의 중심의 가르침이 그것이 아닌데!
 
 
■ 당시 카톨릭교회의 부패상과 함께 종교개혁은 시대적으로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으로 인해 개신교는 한편으로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습니다. 한신대 원로교수이신 김경재 교수님은 <종교개혁의 근본정신과 세 가지 표어의 빛과 그림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종교개혁당시 개혁운동의 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sola fide>을 강조하게 된 삶의 자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종교개혁의 불꽃 성구는 구약 하박국 2:4절에서 온 것으로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에서 인용한 것이다. 믿음이란 사람이 사람을 혹은 하나님을 미쁘신 분이라고, 신실한 분이라고,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고 의심 않고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표어가 오용되고 남용됨으로 말미암아, 본훼퍼가 한탄한 것처럼, 개신교는 그리스도 제자직의 실천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싸구려 은총신앙인’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개신교는 지나온 역사 속에서 믿음을 지나치게 교리화시키고 독단화시켜 오직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믿음 이외의 다른 것들은 다 평가절하하고 폐품처리해 버리고 바리새주의와 같은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만을 “오직 믿음”으로 떠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개신교의 믿음은 그 개념이 돌과 같이 굳어져서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화석화되어서 그 굳어진 가운데 개신교의 각종 악행들과 함께 냄새를 피우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여기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을 성경의 뜻대로 가 아닌 개신교단의 교리들이 이상한 변형을 하여 구원파, 신천지 등등 이단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렇게 된 변형된 변질된 기독교를 세상사람들은 개독교라 부르며 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번 세월호에서 나타난 바 세상사람들은 구원파와 기독교를 구분하지 않고 싸그리 한 통속으로 비판합니다.
 
 
■ 예수님께서 선하고 착함을 강조하시고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 장 11 절)라 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선함의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비해 개신교의 교리와 신학들이 당연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의 의인신학에만 치중하여 결국 의인을 제외한 모든 성경의 모든 선한 가치들을 다 쏟아버리고 산 나머지 의인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거룩하게 사는 삶”(Sanctification),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 “나를 따르라 하시는 예수의 제자직의 삶“은 희미해지거나 어디로 실종되어버리거나 잠적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 구원만 받으면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뭐 정의롭게 살고 평화를 만들며 살며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그런 엑스트라가 뭐가 필요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에토스(ethos)입니다. 기장을 설립하신 김재준 목사님이 지금으로부터 약 3-40 년 전에 이미 교회가 지녀야 할 3 대 가치로 <정의 평화 생명>을 말씀하셨고 그것을 붓글씨로도 써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제 10 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Life of God, lead us Justice and Peace)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판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태복음 23 장 23 절) 한국교회가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세계교회협의회를 한국에서 열게 하시고 주제를 그렇게 정하게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특별히 개신교는 <행함이 있는 믿음> 신학적으로는 <성화- 거룩해져 가는 것, Sanctification>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해야 합니다. 그저 믿음만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신앙인, 성령의 열매가 있는 그리스도인, 행함이 있는 믿음,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직 등등이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 장 6 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 한국개신교는 그 단순히 교리화되고 박제화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차원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오직 믿음 오직 믿음만 노래 부르면서 생활에 있어서는 엉망과 개판으로 하고 교회생활과 교회 밖의 생활이 다르고 모이는 교회만 있고 흩어지는 교회가 없으면, 아울러 구원받는 것으로 그것으로 끝이고 이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이 없는 삶으로만 간다면 기독교는 불교방송이 방송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3-40 년 내에 존재감이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독교라면 이 땅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 금번 세월호 안에서 우리 기장인들이 세 사람이 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의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홍경 씨는 세월호에 타서 배가 침몰해 갈 때 20 여명의 생명을 구한 것을 보고 들으셨을 것입니다. 김홍경 성도님은 서울노회 윤주안 목사님이 시무하는 방주교회 권사님의 아들로서 자신 역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객선 세월호가 기울어지던 30여 분 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커튼과 소방호스로 만든 구명줄을 던져 차례로 20 여명의 학생들을 구조하였습니다. 경기중부노회 가은교회 전종현 권사님께서 세월호에 탑승하였는데 사고가 난 직후 다른 사람이 구명자켓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다가 권사님은 죽고 사망자 명단에 올려지게 되고 권사님이 구명자켓을 입혀준 그 사람은 생존자 명단에 들게 되었습니다. 지난주간 저는 직원들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찾아가 아내 권사님과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왔습니다만 특별히 김홍경 성도와 전종현 권사님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믿음으로 소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 저는 언젠가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1 학년 200 명 2-3 학년 3000 명에게 두 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강단에 올라가 보니 대부분 설교를 듣고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학생, 노트북을 펴 놓고 뭔가 하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거나 하였습니다. 설교를 하는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1 %도 안되었습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괜찮으니 잘 사람은 자고 과제를 할 사람은 하고 나는 이 시간 설교를 해야 하니 하고 가겠다. 잠을 잔다 하더라도 베개는 줄 수 없으니 최대한 편한 자세로 주무시기를 바란다 하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연대교목실 실무자가 연대 채플에 와서 설교하고 박수를 받은 것은 당신뿐이라 하였습니다. 며칠 후 우연히 인터넷을 보았는데 누군가 제가 설교한 내용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결론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 목사는 적어도 개독은 아닌듯!!”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대부분 연대 채플에 와서 설교한 사람들 뿐 아니라 기독교 목사들을 개독의 목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붙어있는 기사들을 보았는데 이랬습니다. 개독이라고 부르는데 다 개독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개독이 아닌 목사들을 언급했는데 유신 때 독재투쟁을 하다가 잡혀가고 주민들을 위하여 마을공동체를 세운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님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리플이 있었는데 이런 류의 목사들은 기장이라는 교단에 속하는데 기장목사들은 사회정의와 민주화투쟁에 나선 분들이 많다 하였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무척 뿌듯하였습니다. 기장은 지나온 역사 속에서 개독의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개독은 아닌 예로 기장과 기장의 목사로 들었다는 것이 가슴 속에 남았습니다. 기장은 개독을 정화하는 소금으로 쓰여져야만 합니다.
 
 
■ 저는 이제 종교개혁 500 주년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 그리고 장로교 100 년 총회를 내년으로 앞두고 있는 시점에 본헤퍼 순교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교회의 개혁의 시작을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강하게 추진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은총의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개혁을 기장을 통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개혁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지식과 우리의 매뉴얼과 프로그램으로만 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 능으로도 할 수 없지만 주의 신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주 성령님께서 새 영을 부어주실 때만이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무슨 말을 이 사회에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지울 수 없으니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과 일그러진 죄악의 모습을 씻어달라고 주 성령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라고 간절히 회개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들보를 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개혁해 나가는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개혁하려고 해도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려고 해도 우리가 <행함이 있는 믿음>, <사랑과 함께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려 해도 그것 역시 은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영을 부어주시지 아니하면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 저는 장로회 전국연합회가 표어로 만든 주제가 너무도 오늘의 우리 현실 속에 걸맞다고 생각합니다. “새 영을 부어 주사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에스겔36:26~27. 로마서12:2) 사실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우리 자신이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주의 영이 임하셔야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고 우리는 진정으로 착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헤퍼는 그 당시 독일 교회를 바라보면서 독일 교회가 왜 그렇게 무기력해 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따르는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번 임원수련회를 하는 이 자리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물 붓듯 부어주시는 새 영을 받게 되는 은혜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따른 댓가를 당연히 지불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여기 계시는 기장의 장로님들이 한국교회를 개혁해 나가는 밀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는 누룩씨(마태복음 13 장 33 절)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한 말씀과 함께 마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6절) 감사합니다!! wkdfh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9:53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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