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년 10 월 29 일(수) 오전 10 시 30 분 구세군신학대학 채플
성경본문 : 창세기 16 장 1 절 - 11 절
제 목 :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1908 년 10 월 정령 허가두 사관(Colonel Hoggard 영국인)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하늘의 선한 뜻을 이 땅에 심는 일에 전심전력해 오신 한국구세군과 사역하시는 모든 사관님들과 존경하는 구세군사령관님이시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이신 박종덕 사령관님 그리고 구세군신학대학 총장이신 임헌택 사관님 위에 오늘 이 자리에 앞으로 구세군 사관으로서 일하시게 될 모든 신학생들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제가 저를 생각해보면 한국구세군에서 상을 주어야 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교단 총무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명동에서 하는 타종행사에 성실하게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서 말씀을 하게 된 것도 임헌택 총장님이 저에게 주는 상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 저는 개신교가 내거는 모든 표어 중에서 가장 임팩트가 강한 것이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Heart to God,Hand to Man)” 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서울역에서 노숙자 선교를 하는 예장통합에 속한 신생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나중에 밥을 퍼주는 행사를 했는데 신생교회 교인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치마에는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하두 좋으니까 그 표어를 에큐메니칼하게 공유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오늘 말씀제목도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로 정하였지만 성경본문과 말씀제목이 궁합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오늘 성경본문이 창세기 16 장입니다만 그보다도 한 장 뒤에 나오는 창세기 17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갑자기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17 장 1 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 하였을까요? 사실 모든 인간들 중에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생활을 잘 한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였을까요? 이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던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하여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지 10 년이 지났지만 아내 사라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약속해 주신 자식을 잉태한 기미는 없고 나이는 점점 구십을 향해가자 사라는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에게 “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자신의 여종 애굽인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낳으라!” 하였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가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 만일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신실했다면 아내 사라의 손을 꼭 부여잡고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여보! 무슨 믿음 없는 그런 말을 하시는 거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다 약속하시지 않았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10 년이 지났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니 꼭 이루실 것이요 더 기다립시다!!” 먼저 야단을 치고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사족을 붙여서 “나는 당신 외에 다른 여자들은 흥미도 없고 거들떠보지도 않소!! 당신만을 사랑하오!!“ 했더라면 사라도 야단은 맞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남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말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창세기 16 장 2 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 장 2 절 끄트머리는 이렇게 바꾸어야 제 맛이 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그 즉시)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나발이고 없었습니다. 사라의 제의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하고 받아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즉시 사래의 여종 하갈과 동침을 했고 하갈은 임신을 했습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자 교만해져서 자신의 주인 사래를 무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래서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조금만 지위를 얻고 힘을 얻었다고 하면 금방 마음이 돌변해 지금까지 모시던 주인을 깔보고 “저 애기도 못 낳는 것” 하면서 자신의 임신한 나온 배를 더 내밀고 다녔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그러지 않습니까? 왕비가 아이가 없는데 왕의 아이를 임신하면 무수리도 왕비를 아이도 못낳는 것 하면서 우습게 보고 깔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아이도 죽음을 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역사 속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만일 하갈이 좀 더 지혜로웠다면 자신의 태내의 아이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하였다면 오히려 더 사래에게 더 잘하면서 “주인마님! 주인마님! 하면서 더 따르고 더 순종적이 되고 예전보다도 더 사래를 잘 모셨었다면 사래는 아마도 분명 하갈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을 것이고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도 옆에서 산후조리도 해주었을 것이고 미역가닥도 툭툭 끊어서 미역국으로 뜨근뜨근한 밥도 해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재산이 다 누구에게 갑니까?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어떻게 조치합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서 따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척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사래는 독이 올라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당신 어떻게 했길래 저 년이 날 그렇게 멸시하는거요?“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삿대질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당신의 여종을 다스릴 권한은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하자 그때부터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저 웬만하게 하갈을 학대를 하였다면 하갈이 태내에 아이도 있으니 좀 참았겠지만 하두 모질게 학대하고 못살게 구니 하갈은 견딜 수 없어 가출해 버린 것입니다. 사라가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부부사이 아닙니까? 아브람과 사라는 잘 믿는 성도였습니다. 이에 비해 하갈은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믿지 않은 비신자를 억압하고 타박한 것입니다. 하갈을 견디지 못하게 학대한 것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악하게 굴거나 자신의 이익만 차릴 때 결국 그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게 됩니다. 하갈은 이방인인데 만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라가 자신을 사랑으로 대접하여 주고 선대해 주면 자신의 주인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드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고 쉬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라가 자신을 그렇게 억압하고 학대하고 그렇게 쫓아냈는데 그 쫓아낸 사람이 믿는 그런 억압적인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나겠습니까? 사래는 그렇다 치고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이때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의 처사가 온당합니까? 자신이 아닌 사래 때문에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갈이 누구입니까? 태내 자신의 아이를 가진, 그 아이의 어머니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사래가 쫓아낸다고 하였을 때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하면서 그저 수수방관만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하갈 사이에 서서 중재하면서 두 사람 관계를 회복시켰어야 옳습니다. 설령 아내가 하갈을 쫓아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얼른 뒤쫓아 가서 하갈을 위로하고 다시 데리고 들어와서 사라와 화해를 시켜 주면서 살게 하든지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떡하였습니까? 하갈을 찾아가지 않았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갈 안에 든 어린 생명에 대하여 알 바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밴 여자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집을 나가면 죽을텐데!! 하면서 티끌만큼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믿지 않은 이방인인 하갈을 그것도 아이를 밴 산모를 무정하게 내쫓아 버리고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 결국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6 장 11 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이 가출하였어도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형편과 고통을 들으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사자를 보내어 하갈을 데려다가 다시금 아브라함 가정에다가 데려다 놓지 않습니까? 하갈이 돌아왔을 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갈을 집으로 데려다 놓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다시 돌아온 하갈을 보고 자신이 차가웠던 가슴을 용서해달라고 회개하고 단 한마디라도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창세기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이 열국의 어미 사라가 열국의 어버이로서 지녀야할 그 너른 가슴이 없었습니다. 하갈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어긋맞아 포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너무도 매정하였고 그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 그 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갈에게 다시금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21 장 8 절에서 13 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차가운 가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점점 자라서 젖을 떼던 날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풉니다. 바로 이때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놀립니다. 그러자 사라는 발끈하여 아브라함에게 가서 말합니다. 21 장 10 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즉각 자기 아들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당한 것을 알리고 쫓아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놀리기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 어른인 사라가 개입하여 마침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을 때 사라가 하갈에게 주의를 주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도리를 하고 그쳤다면 그래서 지난 번 창세기 16 장을 교훈삼아 서로 화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오순도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만일 이 때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 가족으로 품에 안고 사랑하며 살았더라면 그동안 수십세기를 거친 역사 속에 강물보다도 더 많이 흘린 강물과 같은 피와 이스라엘과 아랍족속 사이에 테러와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지구상의 전쟁과 테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고 들어가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고 결국은 아브라함의 자식들 이삭과 이스마엘 족속간의 전쟁이요 테러 아닙니까? 외피상은 미국과 이라크 미국과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입니다만 실제로는 이는 아브라함의 자녀인 이삭의 후손들과 역시 아브라함의 또 하나의 소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 간의 전쟁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의 배려로 인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사이좋게 살게 하였다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가 설령 그렇게 쫓아내려 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따뜻한 마음으로 적당한 선에서 야단을 치고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버렸다면 이삭과 이스마엘은 좋은 형제로서 나중에 서로 하나의 민족을 이루며 오순도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슴은 차가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은 진하게 하나님께 있었지만 손길은 이웃에게 내밀지 않았습니다. 이 냉냉한 가슴으로 인해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민족이 얼마나 서로 대결하고 서로 죽고 죽이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큼 믿음도 짱짱하게 좋았고 그 믿음이 순종하는 믿음이었고 예배도 끝내주게 잘 드렸고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성경에 그 삶이 기록될 만큼 하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2 %가 있었습니다. 가장 따뜻해야 할 때 그의 가슴은 무척 냉냉하였고 얼음장 같이 차가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도 좋았고 순종도 잘하였고 예배도 잘 드렸고 기도생활도 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에오라지 하나님께 그 붉은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안타깝게도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브라함과 한국구세군의 표어를 알지 못하였고 따라서 자비로운 손길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뻗어 저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마음, 용서해주고 덮어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 2 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오늘날 특별히 한국교회 개신교신자들은 특별히 한국구세군을 제외해놓고는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가는데 마다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앗습니다. 한국장로교도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는 두 번째 가면 서러워합니다.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삼일밤예배 구역예배를 잘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기도생활을 잘하였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사사건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한국교회도 기도생활 잘합니다.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40 일기도, 세이레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기도 등등을 잘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을 잘하였습니다. 떠나라 하면 떠나고 가라하면 가고 바치라 하면 바쳤습니다. 한국개신교회도 그렇습니다. 성수주일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봉헌생활도 잘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아브라함을 노래하고 칭송합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우리가 그 믿음에 있어서 그 순종하는 믿음에 있어서 신앙생활에 배워야 할 사람이요 본 받아야 할 사람이요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가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실제로는 “전도를 하는 삶”이 아니라 “반전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은 끝내주게 좋았지만 그 생활은 생활에서 독소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품에 들어오게 하는 믿음과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반면교사하여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은 좋았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었지만 가슴은 뜨겁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고 그 손길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손길이 얼어붙어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만 잘하고 이웃에게 잘하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분명 블랙홀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불과 1 - 2 % 정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시대를 주도하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이 25 %가 되는데도 개독교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개같은 종교 독을 품어내는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특별히 언론과 방송이 기독교를 직접 비난합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신학자들은 예수 없는 기독교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비록 예수 믿어라! 우리 교회 나와라! 그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먼저 희생하고 먼저 손해보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자신을 저주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주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길을 매밀어 감싸주고 산다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이 믿는 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신앙은 좋다고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득에는 더욱 아득바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슴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가슴과 같이 냉냉하고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손길을 내밀고 손길로 나누는데 인색하면서 독을 품어내면서 산다면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나는 너같이 될까봐 예수 같은 거 믿지 않겠다! 니가 믿는 예수도 그렇게 독한 사람일까봐 나는 예수 같은 것 죽어도 믿지 않겠다! 하고 결국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져 버리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인구통계청이 인구조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1995 년부터 2005 년까지 불교도 조금 늘었고 카톨릭교회는 무려 75.6 % 성장을 했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2.9 %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대체 왜 개신교가 고구마전도다 이슬비전도다 전도를 많이 하는데 교인수는 줄었을까 리서치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중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응답이 나왔습니다. 개신교에 갔더니 시댁분위기와 같았는데 카톨릭에 갔더니 친정분위기더라! 교인들이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징하고 더 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취를 맡는 것이 아닌 냄새를 맡아 역겨워서 얼른 공해지대인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만큼 손해보려 하지 않고 손톱만치도 희생하려 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도 천국에 들어가는 막고 서 있는 셈이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는 예수 믿고 싶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의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무섭게 이기주의적이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점점 하향길로 치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우리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들이 우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참으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진정 보아야 할 때입니다.
■ 저는 한국개신교 중에서 한국구세군이 가장 예수님의 복음을 잘 이해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잘 실천해왔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국구세군은 예수님의 복음을 단지 말로만 전하지 아니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국솥을 걸어놓고 그 국솥을 끓게 했고 그 국솥에 꿇고 있는 따뜻한 것들을 양 손으로 국자에 담아서 굶주린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1908 년부터 지금까지 106 년동안 한결같이 그 일을 해오셨습니다. 한국구세군과 세계구세군이 해온 “전쟁난민구호사업”,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AIDS 퇴치와 예방치료”, “지역분쟁으로 인한 난민구호 및 정착지원사업”, “재난구조사업”, “반핵운동, 환경보호운동, 국제적인 기아퇴치사업”, “UN과 합동으로 파괴되어 가는 가정을 치료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회복시키는 운동”, “르완다 구호사업, 동구유럽 난민구호사업” 등등은 그야말로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를 성실하게 실천해 오신 것입니다. 한국구세군의 역사는 한국민중들에게 예수님의 손길이 되어오신 역사라고 저는 확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국개신교가 해왔던 개독의 짓을 해와 나락에 빠져 있지만 만일 여분의 공덕으로 개신교가 구원받게 된다면 틀림없이 한국구세군의 착한 일들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 때 개신교 거대교단의 대형교회 설교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래도 개신교 교단 중에서 가장 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한국구세군 사령관께서 설교를 했으면 좋겠다고 작년과 재작년에 그토록 주장해 왔는데 저의 마음어린 주장은 매번 묵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구세군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독이라 비난받는 한국개신교들이 한국구세군을 본받아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활발하게 펼치는 일에 모두가 함께 나서게 되어 우리 개신교의 개독의 독성은 차츰차츰 약화되고 우리 모두가 한국구세군을 닮아가게 되어 마침내 한국개신교 모두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누가복음 23 장 34 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슴의 온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느냐 하면 십자가를 매달아 못을 박아 피가 철철 떨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못 박던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위해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심장의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구세군신학대학 신학생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슴을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뜨거운 가슴으로 채워서 그 뜨거운 가슴으로 손길을 참으로 예수님이 관심하시는 이웃들에게 더 자주 펼치고 더 많이 펼칠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선배들인 한국구세군이 역사 속에 해오신 일들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 일들을 더욱 확대심화시켜나가서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내 종 한국구세군 사관들아!”하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음성을 더욱 크게 듣고 자주 들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국구세군을 주님의 두 손으로 삼으셔서 이 땅의 민중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펼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은총의 주님께서 한국구세군과 한국 개신교 한국교회의 가슴을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뜨겁게 하여 주시사 저희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빛이 되고 그리스도의 따뜻한 열을 발산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한국구세군이 역사 속에서 시대 속에서 해온 것처럼 여기 있는 저희 모두가 이 땅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두손을 펼치는 일들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한국구세군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구세군을 -더욱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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