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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관리자 2010-10-18 (월) 22:55 15년전 2605  
 

2001 년 3 월 13 일 오전 6 시 한신대학교 생활관 아침예배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3 장 1 절 - 3 절

제    목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할렐루야! 저에게 고향은 강진 칠량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입니다만 이곳 수유리에 오면 고향보다 더 따뜻한 안온함과 아늑함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이 13 장입니다만 저 역시 13 년 만에 교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교역자로 출발하는 저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 능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은혜롭게 전할 수 있는 능력, 교인들과 상담하면 그 즉시 적절한 성경말씀으로 위로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능력,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도 전혀 피곤하지 않게 하루를 힘차게 지낼 수 있는 건강의 능력, 교인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거나 병든 이들을 기도하면 일반적으로 낮는 기간보다는 약간 더 빠르게 낫는 역사가 나타나는 능력, 교회의 모든 행정과 재정을 조리있게 잘 할 수 있는 능력,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할 수 있는 능력, 비전을 제시하여 함께 그 방향을 향하여 전진하게 하는 능력, 하늘의 축복을 교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끌어오는 능력, 수능생을 위해 기도하면 팍팍 그것도 특차로 붙는 능력, 그런데 저 자신을 보면 이런 능력 중에 하나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능력있는 목회자를 원하는데 교회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저는 능력이 빈곤하여 허덕이는 목회자였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능력, 능력 하면서 산 기도를 하던지 무슨 성장 세미나를 찾아가던지 교회성장 비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갑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능력, 능력하면서 능력있는 목회자를 모시려고 합니다. 능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능력이 있는 목회자이지 교회가 축소재생산하거나 현상유지하면 능력없는 목회자라고 낙인이 찍혀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왕따 당하고 은따 당하고 전따 당합니다. 목회자는 사나죽으나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 기도의 능력, 전도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자나깨나 능력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부터 이런 능력을 절차탁마하고 각종 자료을 모으고 자신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그리고 종횡사해로 성경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오늘의 한국 교회현장에서 맨날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녹초가 되고 말 것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오늘 능력위주의 목회로 가는 상황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2 장 1 절에서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내가’ 할 때 ‘내’는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저 자연인인 바울도 되겠지만 사도로서 바울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독백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쓰고 있는 일종의 목회서신이기에 내는 목회자로서 바울 자신을 말합니다. 여기서 ‘내’라는 목회자 속에 나 자신을 한번 대입하여 놓고 생각해 봅시다. 목회자로서 신학과 경건의 훈련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역할이입하여 생각해 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람의 방언이란 우선은 다른 나라의 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외국어 구사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으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헬라어나 잘했을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 수학하였기 때문에 로마 사람 앞에서는 로마의 말로 히브리들 앞에서는 히브리말로 아주 폼나게 잘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주석하려고 해도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면 얼마나 유용한지 모릅니다. 외국어를 잘 알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국제회의에도 참가하여 세계적인 신학의 흐름을 호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방언만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잘했던 것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 장 1 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노니”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바울 사도가 “나 방언합네!” 하시지 않지만 또한 성령의 은사를 꿰뚫고 계시는 것을 보면 바울은 방언에 관한 한 양수겹장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친구는 학교 다닐 때 히브리어를 잘했는데 한 교회에 부임해 가자 교인들이 자신을 별로 존경을 하지 않더래요!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때마다 제단의 의자에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창세기 1 장부터 마치 화계사 스님이 독경을 하는 것같이 유창하게 쭉 읽어갔는데 데 바로 그 날부터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존경 그 자체로 달라졌다고 합니다. 야, 우리 목사님 방언을 하시는데 굉장히 수준높은 방언을 잘하신다고!! 자, 내가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하늘의 방언도 하고 세상의 방언도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만일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인 내가 강단에서 성경에 입각하여 은혜가 충만한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하면 마치 사람이 하는 것과 같지 않고 처음에는 하늘에서 단비를 내리는 듯하고 설교 중간쯤에는 하늘의 가랑비가 내리는 듯하다가는 설교 말미에는 하늘의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은 말씀을 전달했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하늘의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 중 핵심을 정리하여 설교를 전달하는 자의 강단에서 그 목회자의 뇌리 속에 팩스밀리로 넣어 주는 것같이 마치 입만 벌리고 혀를 놀리기만 하면 영적 아미노산과 성결한  종합비타민과 같은 말씀이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번에 개학예배 때 김이곤 원장님의 말씀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원장님이 내려오셨을 때 두 손을 잡으면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산에서 내림과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말씀의 능력은 필수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역자의 설교에 의하여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한 때 다녔던 Berkeley의 First Presbyterian Church에 Labberton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손바닥만한 성경 책 한 권만을 들고 설교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 같은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웃기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 분이 설교만 하면 온 눈과 귀가 그 목사님에게만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 버튼 목사님이라 그런지 내가 버튼을 누르면 은혜로운 설교가 쭉쭉 쏟아져 나옵니다. 한번도 헷갈리거나 쉼이 없이 하다가 제 시간이 되면 거의 1 -2 분도 틀리지 않고 딱 마칩니다. 아내는 그 목사님의 설교와 같이 나도 하라고 하지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저는 어린이교회학교 설교도 써서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외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나고 방언을 할 뿐만 아니라 통변까지 하며 한번 설교하면 구속의 은총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낸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삽이 무거워 자루를 잡고 끌고 가면 돌과 부딪히며 무척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정말 듣기 싫습니다. 그래서 무겁더라도 삽을 들고 갑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들으면 수명이 그만큼 단축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게 다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2 절의 말씀으로 가봅시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목회자로서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대를 앞서가 저 멀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문명의 위기와 파국을 경고하고 피할 길을 예시하며 마치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보이면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를 외치면서 “이 미련하고 허탄한 것들아!” 외치면서 시대와 시대로 세대와 세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 얼마나 목회자로서 영적 카리스마가 있겠습니까?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투시하는 능력만 있더라면 목회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지 않겠습니까? 김 집사 이번에는 코스닥에 손대지 말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비밀을 알고” 궁예가 가지고 있는 관심법, 혹은 독심술이 있어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목회자인 내 속만 썩이다가 나갈 사람인지를 알면 꼭 그런 능력을 버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지식을 알고” 목회자가 신학적 지식, 목회적 지식, 상담학적 지식, 컴퓨터 지식, 사회과학적 지식, 구역과 조직관리의 지식, 생태신학적 지식, 영성신학적 지식, 기독교육적 지식, 선교와 전도의 지식, 교회성장의 지식 등, 목회에 필요한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내가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가 교회당의 첨탑과 같이 하늘을 찌를 것과 같은 믿음이 있으면 교인들이 그것을 보고 구름떼와 같이 몰려들어 교회가 성장하고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교회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목회자의 영적 인프라가 교회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무슨 그럴싸한 말이지만 목회자의 영적 인프라란 것은 목회자의 강철같은 믿음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목회자도 어떤 때는 믿음이 한없이 올라가는 때가 있는가하면 엘리야와 같이 한없는 나락으로 빠질 때가 어디 한 두번입니까? 어떤 때는 목회적 상황에서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때가 어디 한 두번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과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이런 굉장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내 존재는 무다”, 그런 그런 때깔나는 것 그런 영양가 있게 보이는 것들이, 색깔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색즉시공이다” 내 존재는 말짱 도로묵이다, 도로아미타불이다. 말짱 황이다. 그 말입니다. 아무리 율금색나는 옷을 입고 수도한다한들 그 안에 자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3 장 3 절을 보십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능력이 있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교회는 재정적인 능력이 있어 몇 억 씩 몇 십억씩 북한에도 보내고 해외선교사를 보내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대외적으로 이름도 나고 교회의 선교도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열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하나의 불과 같은 열정과 비전입니다. 잠언에는 비전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합니다만 요즘 성장하는 성장을 지향하는 교회, 목회자 잠언에는 “비전 없는 교회는 망한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마다 비전2001, 비전 5110, 비전100000 이 있습니다. 비전을 정하고 10 만명의 영적 군사를 양성하겠다고 세우고 이 비전을 위해 목회자로서 자신을 불사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목회를 하게 되면 자신의 목회적 전 역량을 총동원하여 건강도 돌보지 않고 이를 위해 일로매진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가 급기야는 병을 얻어 쓰러지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전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다가 그것으로 쓰러지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으로도 멋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제와 봉사 그리고 열정과 헌신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 3 절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그런 표현을 쓰지만 13 장 마지막 절에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어제 저는 박근원 박사님을 만나러 여전도회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박사님이 오시는 동안 “목사되어가기”라는 하일석이라는 어느 교회 부목사님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짤막한 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산문적인 것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역동성은 추상성을 지닌 하나님과 의 관계가 구체적인 행위로 표시되는데서 시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말로 설명하거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느끼는 본능적인 직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설명이나 이해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삶 전체에서 느끼는 직관이 중요하다.” 한 4 년 반 전 일입니다. 어느 날 무척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기장 총회에서 기관목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곤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옆방에서 자리에 누워 카세트에 잡히는 데로 테이프 한 개를 넣고 play를 눌렀습니다. 노래는 중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랬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내 곁에 있어달라는 말하지 않았지! 너무 슬퍼 눈물도” 그런데 갑자기 그 가사가 나를 때렸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가사는 꼭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노래를 끄고 잠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가 계속 뇌리 속에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조용히 돌이켜 보았습니다. 모든 일에 너무도 분주하고 바쁜 나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안에 내가 목사로서 있어야 할 어떤 뜨거운 것이나 미지근한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한 직장인으로 샐러리맨으로서만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내 곁에 있어달라는 말, 하지 않았지! 무척 서글픈 어조로 들려왔습니다. 사실상 내가 그 곁에 있지도 않았고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에 대한 것은 전혀 생각과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무척 바빴습니다. 총회에 있으면서 전국교회에 우표와 봉투를 부치는 일에서 시작하여 노회와 위원회 회의하는 일로 일주일이, 한달이, 일년이 그리고 8 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이 열 마디 노래 가사가 그때까지 있는 자리를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멀리 떠나 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약 4 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마음 속으로 재삼 재사 다짐했습니다. 목회를 해야 하겠다고!! 돌아오면서 그 마음을 가진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시작하면서 목회의 ABC부터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백하기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이 썼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마음을 감동케 하셔서 쓰셨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 장을 쓸 때는 바울의 마음도 어떤 진한 감동에 사로잡혀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은 바울의 펜대를 움직여 하나님의 자신의 심정을 적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너희가 나를 사랑함이 없으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오늘 우리 기독교 현실 속에 육화시킨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대입해 보십시다. “너희가 성서헬라어도 잘하고 성서 히브리어도 잘하고, 쌸라샬라 방언도 잘하고, 무슨 목회니 무슨 영적 원리니, 무슨 목장이니, 해서 많은 목회자들도 추종하여 이를 실행한 교회들이 우후죽순과 같이 성장한다고 해도, 수십억씩 수백억씩 사회활동에 내 놓은다해도, 너희들이 세계적인 교회를 이루고 세계적인 신학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해도, 너희들이 나를 사랑함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사랑을 늘 확인하시는 분이십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아침에 한 번 점심 때 한번 저녁 때 한번 하루에 거의 세 번씩 사랑의 여부를 확인하시는 분이십니다.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며 위엄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불변하는 어떤 초월적인 실재로서가 아니라 어떤 교리의 틀 안에서 얌전히 계시는 플라스틱 같은 분이 아니라, 숨쉬는 소리도 들리고 어깨에 말없이 손을 얹으시기도 하며 기분 좋을 때는 팍팍 쓰시고 기분이 나쁘실 때는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때로는 잘해드리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좋아하고 이름도 부르지 않고 신경 끊고 홀대하면 무척 섭섭해하시고 “니가 그럴 수가 있나!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안해 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노래도 부르는, 그저 받는 사랑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얘기도 계속 하고 싶어하시고 도움도 주고 싶어하시고 공치사도 받고 싶어하시며 엄청난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조그마한 관심과 가까운 일들을 통해 자신 역시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곁에 나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기도) 주님 저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곁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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