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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관리자 2010-11-26 (금) 14:57 15년전 2446  

1999 년 3 월 14 일 오후 1 시 30 분

성서본문 : 빌립보서 1 장 27 절 - 30 절

제 목 : 그리스도의 고난 &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1.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은총이 우리 삶 속에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지금 사순절(四旬節)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이란 40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으로 돌입하여 부활하시기 전까지 40 일을 말합니다. 보통 이 사순절 속에는 교회력에 의하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리고 세족 목요일, 그리고 성금요일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갈 것인가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시간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에 어떤 목사님이 길고 지리한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이 마침내 강단에서 내려왔을 때 한 꼬마애가 회중석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쉰 소리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꼭 이래야만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나요?” 그 아이 아빠가 교회를 빠져 나오면서 그 아이 엄마에게 “난 말이야 사순절이 따로 없어 우리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졸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이것도 사순절을 잘 보내는 것이 아니겠어?” 그러자 그 아이 엄마가 말을 받습니다. 당신이 잘 때 뒤에 있는 김 집사님이 “집사님 남편은 어젯밤 뭐했느냐?”고 하면서 “비게 하나 가져다 드리라고 하던데” 내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알아요 십자가가 따로 없더라구요“ 제가 왜 이야기를 하느냐? 오늘 제 설교가 약간 길어집니다. 혹 제 설교를 듣고 졸으신다면 제가 아예 비게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3. 오늘 본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권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 세기의 신학의 표어 중에 하나는 “Let God be God, Let man be man" 이는 ”하나님은 하나님 되시도록, 인간은 인간되게 하자“ 였습니다. 19 세기 당시 기독교가 복음을 잃어버리고 엉망진창이 되니까 잘못된 기독교를 구조조정하자고 이런 표어가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Let Christian be Christian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자”는 말인데 이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사도 바울 선생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29 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 중 우리가 결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입니다.

4.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했을 때 자기는 평안히 있으면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만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장소는 에베소에 있는 감옥에서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후 53 년에서 주후 55 년 약 3 년에 걸쳐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 “기뻐”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이는 바울의 심령을 어떠한지를 나타내 줍니다. 옥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울의 심령은 오히려 즐거워하였습니다. 아이들 저금 통장 중에는 사람의 모양을 한 저금통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후배의 친구는 사람 모양의 저금통을 준비하여 25 센트로 가득 채워질 때 그것을 가지고 리노에 게임블링을 즐기러 갑니다. 그 친구는 저금통이 가득 채워지면 질수록 놀러갈 즐거움을 상상합니다. 또 다른 의미이지만 바울도 이와 유사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 장 24 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에베소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할 때에도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자신의 몸 속에 차곡 차곡 쌓이는 일에 대해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곳곳을 다니시면서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도 맞고 죽을 뻔한 많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때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을 생애에 최대로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기쁨으로 하였던 것은 비단 바울 사도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한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지난 학기에 기독교회사를 수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폴리캅의 고난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주후 155 년 트라얀 황제는 로마시민들과 로마의 속국의 백성들에게 만신전에 대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숭배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챤이 로마당국에 끌려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숭배하기를 거부하고 곧 바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중에야 이런 굳건한 신앙 뒤에는 폴리캅이라는 노인이 있음을 알고 즉시 폴리캅을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제일 처음 그는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챤이 순교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폴리캅은 자신이 붙잡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의 지방총독은 폴리캅이 나이가 많은 점을 들어 황제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딱 한번만 저주하면 풀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때 폴리캅은 “내가 86 년 동안 주님을 섬겨왔고 주님이 나에게 나쁘게 한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저주할 수 있겠소?” 그러자 지방총독은 너를 살아있는 채로 화형 시킨다고 하자 폴리캅은 “그 불이야 단지 순간만을 태우겠지만 내가 주님을 배반할 때 영원한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바로 이 순간을 나를 위해 남겨두셔서 순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잔을 나누게 하시어 저로 하나님을 영광돌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주를 부인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그 안에 죽음의 고난도 막지 못하는 어떤 위력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역사신학자 `Justo L Gonzalez 는 폴리캅의 순교를 쓰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Their firmness was not of their own doing, but of God". 자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초대교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초대교회와 역사 속의 초대교회 그리고 한국 역사 속의 초대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초대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성경의 초대교회도 스테반 집사와 야고보를 비롯한 수많은 사도와 집사들이 주를 위해 순교하였습니다. 역사 속의 초대교회도 로마제국과 맞서면서 수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로 흘린 피들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었습니다. 주를 위해 바치는 목숨이 왜 하나 밖에 없는가고 무척 아쉽게 여겼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 속의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 위해 서로 먼저 줄을 서려고 다투었습니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주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내어 맡기면서 오히려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전의 역사 속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초대교회들 속에 일어났습니다.

5. 자, 이 성경본문을 가지고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역시 초대교회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초대교회와 역사 속의 초대교회와 우리 나라 역사 속의 초대교회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순교를 해야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순교를 각오해야 하고 고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미국 전역 어느 주에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된다거나 예수 믿는다고 옥에 갇히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십자가에 거꾸러 매달리게 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주리를 틀거나 목을 쳐서 새남터에 공개적으로 걸어 놓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면 오늘날은 정 반대 상황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서로 오라고 하고 교회마다 많은 프리미엄을 마련해 놓고 자기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가주면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거라면 어디에 가서 고난을 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지를 여행을 가면 그런 페키지 상품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행로를 따라 골고다 언덕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를 비아돌로로사의 길이라고 합니다. 갈 때 십자가 하나씩을 매고 갑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어떤 청년이 자원하여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와 똑같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실제로 양손에 못을 박히고 옆구리에 찔리는 것을 실연하여 그것이 세계적으로 보도가 됩니다. 자 이런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 주님의 고난을 채우는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순절만 되면 고기를 안먹고 술도 안마시고 텔레비젼도 뉴스 외에는 보지 않고, 음주가무와 주색잡기를 온통 끊고 살다가 고난주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동안 못먹었던 것을 따블로 먹고 못마셨던 것을 따따블로 마시는 바람에 위장장애로 탈나서 출근도 못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여집사님은 자신의 다이어트 스케쥴을 예수님 고난주간에 맞추어 절식하고 금식하여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다고 좋아하는 분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이런 비슷한 것일까요?

6. 오늘 본문을 1 세기 에베소와 빌립보에서 오늘 이제 21 세기를 앞둔 이곳 밀피타스로 가져옵시다.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 무엇입니까? 핍박하거나 박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울 수 있습니까? 자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주어진 현실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1) 가벼운 얘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주 시력검사를 하러 오클랜드에 있는 검안과에 갔습니다. 파킹을 해야하는데 쿼터 두 개가 필요한데 없었습니다. 검안과에서 쿼터를 요청했지만 한 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손님으로 온 미국 여자분이 친절하게도 자기 차에까지 한참 걸어가서 쿼터 두 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지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고맙다!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너도 나중에 너와 같은 경우를 당한 이에게 갚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크리스챤아니냐고 했더니 I Think so 하면서 기분이 대개 좋은 표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어 먹었습니다. 오후에 학교를 가다가 예전 살던 곳에 주차해 놓고 학교 앞의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에 밧데리가 나갔는지 점프케이블만 가지고 있으면서 비를 하염없이 맞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다시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내려와 차를 가지고 그곳으로 가져가 밧데리가 작동하도록 해주자 그 친구가 “무척 고맙다 너 같은 착한 녀석은 첨 본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눈초리로 날 쳐다보면서 감사를 연발했습니다. 저는 다시 차를 주차해놓고 올라가면서 나에게 50 센트를 주면서 너도 나중에 나와 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에게 해주면 될 것 아니냐는 그 여자의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저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 29 절에 잇는 뜻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것은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시간 저는 그리스도를 위해 오늘의 현실에서 고난 당하는 현대적인 해석학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의 첫 번째 현대적 해석학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왜 지셨는가의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 때문에 고난받으셨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내가 좀 손해보고 내가 좀 희생하고 내가 좀 양보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난의 해석학입니다. 어떤 전통적인 기독교 장로의 가문에서 어떤 불교의 보살 가문의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기독교 가문의 시어머니는 그 결혼을 성사시키기가 싫었지만 아들이 사랑한다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습니다. 그 며느리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강사였습니다. 며느리와 함께 살게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주일법회에 가는 것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불교도 기독교가 잘되니까 기독교의 용어를 살짝 많이 씁니다. 주일예배를 주일법회, 여름성경학교를 여름불경학교 그럽니다. 그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며느리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세심한 부문에까지 그 옛날 일부의 고춧가루 시어머니 같이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사랑하는 딸 이상으로 여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가자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함께 예수 믿자는 말을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습니다. 절에 다녀오면 얘 너 오늘 부처님의 무슨 좋은 말씀 들었냐?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보통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심기를 헤아려야 하는데 그 집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심기까지 헤아렸습니다. 한 가족의 식구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며느리를 집중적을 사랑하였습니다. 며느리가 생각하였습니다. 야, 우리 시어머니는 뭐가 달라도 달러!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한 그토록 자신의 신앙생활에 열심인 시어머니를 보면서 야, 교회와 기독교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뭐가 시어머니를 저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지게 하였을까? 자신의 학문인 심리학의 사례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며느리는 자신의 시어머니를 예의주시 분석관찰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것은 시어머니가 믿고 있는 예수란 분에게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생애란 책을 사보았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읽은 책을 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생일에 삼포능자의 소설책을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며느리는 어떤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를 어머니 몰래 나가 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가 교회 몰래 온 것을 알게 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얘야 너만 심리학을 한 것이 아니단다” 그후 지금은 며느리가 운전을 하고 시어머니는 앞 자리에 타고 둘이 오손도손 잘 교회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 익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더 사랑하는 주님께 연결시키고자 현실 속에서 부딛힐 수 밖에 없는 십자가를 붙들고 오히려 감사하는 분도 있고 어떤 권사님은 자신의 며느리에게 좀더 교회를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애기를 보고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는 분도 있습니다. 고난의 현대적 해석학 첫번째는 주님의 사랑을 증가시켜서 혹은 주님의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내가 손해보고 내가 참고 견디며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2) 고난의 현대적 해석학은 자신과 자신과 관계되는 고난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이 해석학은 예수님의 고난과 나의 실존적 상황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교회를 다니는데 어느 날 사순절에 예수님이 우리들의 피와 같이 붉은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남편은 “그래 맞아 예수님이 우리 마누라 잘못과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을꺼야 이해된다 충분히 이해돼!” 그와 동시에 아내는 “그래 맞아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야 예수님은 우리 남편의 엄청난 약점과 헛점과 단점이 오죽 심했으면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해석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고난의 현대적 해석학은 고난을 바로 나와 긴밀히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자신의 아픔의 현실을 새로운 눈을 뜨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해석학입니다. 제 집사람의 친구이면서 제 친구의 동생이 있었는데 지난 해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뇌에 시한폭탄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뇌동맥경색증,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장애아동을 돕는 일을 자원하여 무급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가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와서 자기가 얼마나 즐겁게 일하고 있는지 자세한 사항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장애아동을 위해 일하던 어느 날 마침내 시한폭탄이 터졌습니다. 연세대 세브란스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부모에게 준비를 하라고 했고 저는 그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아이가 입은 옷을 차곡차곡 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식물인간의 상태에서 1 년이 지나자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몸의 기능을 되찾았습니다. 의사들은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설명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몸은 편마비 증세로 인해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뒤돌아보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투혼이었습니다. 그 시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의 뱃머리에 뒤흔드는 시퍼런 강물/시련의 노도 속에 가슴은 떨리우고/넘어지고 깨어질지라도/나 건너야 하리/깨어지고 헤진 살에/입 맞추시는 이/두려움에 떠는 내게/따스한 손 내미시는 이/시련의 강 저 편에서/두 팔 벌리고 하얗게/웃으시는 그 분을 /나 보았기에/시련의 강바람에 가슴이 얼어붙고 /눈물마저 헤진 볼에 얼어붙을지라도/ 나 건너야 하리/시련의 강 저 편에서/찬란히 떠오르는/승리의 면류관을/나 보았기에” 이것이 그녀가 쓴 편지 중에 하나입니다. 육 도연 전도사는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을 당할 때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는가? 하나님께 원망할 때가 많이 있고 짜증을 내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승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하고 함께 총회본부에서 일했던한 목사님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심방을 간 집이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를 둔 집사님 집이었습니다. 미리 심방대원에게 그 현실을 들었지만 가보니 상상했던 것 보다 더했습니다. 부모 두 사람이 하루종일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슨 말씀으로 위로해야할 지 몰라 난감해서 먼저 ”주님 이 부모에게 적당한 말씀을 하여 주소서“ 기도하면서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아이를 안고 ”이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꼬 생각하시면서 우리 두 집사님에게 맡긴 것이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가 아닙니다. 주님이 두 집사님을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두 부부 집사님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말씀 속에서 고통 가운데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론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시련 주시고 나에게 풍파도 주시고 나에게 험한 골짜기 주시고 나에게 어떤 형태의 십자가를 주시는데 바로 이때 오히려 십자가주심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진하게 느끼고 오히려 감사하는 해석학입니다.

3) 고난의 현대적 해석학 중 마지막 세 번째의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고난받는 이들 가까이 가서 그리스도 사랑으로 그 고난을 나누는 일입니다. 성경말씀에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 : 15)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 장 2 절) 우리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서로 짐을 같이 지는 것은 이것이 나에게 직접 고난을 안겨주는 일이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난은 나눌수록 작아집니다. 지난 주 저는 PSR 이라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어느날 보라색 꽃이 온통 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꽃은 한달 전에도 거기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저렇게 온통 피어 있는 것을 못 보았을까? 온통 숙제만 생각하고 지내다 보니 저런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력으로 보라색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현실을 보면 우리 주변에 고통당하고 고난당하는 많은 이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기회로 우리는 둘러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을 가지고 보면 여러 가지 형태로 고통 당하고 신음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리는 사람, 쓰라린 맘으로 탄식하는 사람, 마음의 상처를 계속 헤집으면서 더 그 상처를 도지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일이 설령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일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이 사람들 중에서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7.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영광의 부활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주신 영생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시면류관과 주님의 찔린 못자국 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꿔졌다고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 없어지고 주님을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초대교회와 같이 순교 당하는 것과 같은 방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와 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힘차게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 막 왔을 때 친구가 시무하는 교회의 한 권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그 권사님과 같이 고통 더하기 아픔 곱하기 시련과 같은 분은 예전에 없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남편은 피부가 말라가는 아주 희귀한 병으로 고생고생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 권사님은 남편이 피부가 말라갈 때 자신은 뼈가 말라갔습니다. 남편이 죽고나자 설상가상으로 그 딸이 그 병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딸이 똑같은 병을 앓고 시름시름 피부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병은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 치닥꺼리 때문에 자신 역시 많은 복합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제가 그 집에 가서 기도하였을 때 그 권사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한참동안 그 얘기를 듣고 함께 찬송을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 중에 하나가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권사님 다른 수가 없습니다. 주님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것을 기억하며 내게 있는 고통과 아픔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십자가라고 고백하고 오히려 감사하며 사시라고 권면했습니다. 제가 친구 집에 여름에 또 한번 갔는데 그때 또 그 권사님 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제가 갈 때 정성들여 수공으로 만든 십자가 세 개를 주었습니다. 주었는데 무슨 콤멘트를 하고 준 것이 아니라 말없이 웃으며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말없이 받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의 언어가 오고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있었던 남편 십자가, 딸 십자가, 제 십자가 이 세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로 알고 튼튼히 붙잡고 살께요 말하는 듯하였고 저는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그때 불렀던 찬송을 마음 속으로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그 세 십자가를 가져오자 저는 신학을 공부하는 후배 셋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준 권사님에 대해 얘기하면서 언제나 신학을 공부할 때 십자가를 매고 사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공부하라고 십자가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의 고난의 상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줬다가 뺐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는데 후배 중 하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십자가를 다시 달라고 하여 지금 그 십자가가 여러분이 보시는 강대상 중앙에 걸려 있습니다. 그 사연이 있는 십자가가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가 그 권사님이 주신 것이라고만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가 여기 붙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의 십자가 더욱 사랑하면서 현실 속에 있는 여러분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라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축복이 한인제일감리교회 성도들 위에 넘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는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의 십자가도 사랑합니다. 주님 저희도 주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저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겠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삶의 풍파와 시련의 파도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주님의 험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며 살겠습니다. 주님 이웃이 고통 당할 때 주님 저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저희도 이웃의 고난을 함께 나누며 살겠습니다. 주니 저희가 주님의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가도록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 저희가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영력을 더하여 주시고 주님 저희가 주님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저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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