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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관리자 2010-11-26 (금) 15:29 15년전 2918  

1999 년 4 월 11 일 오후 1 시 30 분 한인제일감리교회

성서본문: 요한복음 21장 15절 -17

제 목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 할렐루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제일감리교회 성도들 위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나토연합군이 유고연방을 엄청나게 폭격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에게 있어서 지난주는 각종 이름을 알 수 없는 감기바이러스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제 몸을 엄청나게 폭격하여 정신을 못 차린 주였습니다. 조선의 태종이 그랬잖습니까? 메뚜기 피해가 하두 심하여 백성들의 피와 땀의 농사를 다 갉아먹자 메뚜기 중에 가장 큰놈을 잡아오게 하여 눈을 부릅뜨면서 이 놈! 갉아먹으려면 차라리 내 속을 갉아먹어라! 그 메뚜기를 산채로 꿀꺽 삼켰습니다. 그 뒤로 거짓말같이 메뚜기 떼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감기에 걸려 몸져눕게 되자 성도들에게 전화도 할 수 없었고 설교준비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다음 주 준비도 하고 우리 제일교회를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하는데! 침상에서 누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뭔가 하나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올해 우리 제일교회 성도들의 몸에 침투할 모든 바이러스들아 다 내게로 내 몸으로 모여 오너라! 그리고 차라리 갉아먹으려면 내 속을 다 갉아먹고 우리 제일교회 성도들은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라!”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여러분은 올해에는 감기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의 내용과 형식은 무척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디베랴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가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대답하자 “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돌보라”는 아주 단순하고 아주 평이한 대화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평이한 질문과 대답 속에 전 기독교의 멧세지를 요약할 수 있는 굉장한 멧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부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너 왜 수제자라고 하는 자식이 내가 십자가에 달릴 때 도망갔느냐” 그렇게 책망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 왜 나를 삼세번씩이나 부인했느냐? 그럴 수 있는거냐?” 꾸짖으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찬송에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시간으로 따진다면 2 분도 안 걸렸을 것입니다. 그 대화를 너머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고 갔습니다. 그 부름 속에 이미 용서가 있었습니다. 그 부름 속에 이미 인간실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다정하신 이 부름이 2000 년전에 디베랴 호숫가에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께서 2 천년이라는 시간과 이스라엘이라는 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 우리를 다정하신 음성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둘째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사랑을 확인하는 물음입니다. 세번이나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세번 부인했기 때문에 그 부인을 부인시키기 위해서 했다고 세번 물어보았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이 질문은 반드시 어떤 상황 때문에만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고정적인 질문이며 어제의 질문만이 아니라 오늘의 질문이며 내일도 계속될 질문입니다. 우리나라 탤런트 중에 “질투”의 캐릭터를 잘 소화시키는 이는 아마 고두심일 것입니다. 고두심은 “잘났어 정말!”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사람입니다. 고두심은 극중에 자신의 남편이 자기만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마치 정신병이 발작하는 것 같은 불타는 질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그런 캐릭터를 가진 고두심을 좋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로 말하자면 탤런트 고두심 못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화도 잘 내시고 변덕도 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질투하시고 화도 내시고 변덕도 많으실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고 지나가면 어떤 분명한 것, 하나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시기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질투 뒤에는 사랑이 숨겨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진노하실 때 그 마음의 커텐 뒤로 돌아가보면 진노를 엎어 버릴 만큼의 사랑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내가 병이 났다 하려므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 나머지 병이 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인정에 목말라하고 정 때문에 굶주리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그리움의 물결이 늘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시기할 만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으십니다. 온 피조물이, 온 우주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딱 한가지 하나님께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결핍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받는 사랑에는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목이 갈한 것처럼 언제나 목이 말라 계시고 언제나 배고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함입니다. 하나님도 외로움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처럼 사랑을 받기 좋아하는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 먼저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이 감당치 못 할 만큼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만 하시고 사랑하는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에 초연하신 분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 곳곳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 받기를 갈구하고 간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하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 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 사대 자손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 천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하나님은 자신보다도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면 불같이 질투가 일어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왜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라고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사랑하니까 하나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줄 알고 질투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거듭된 이 질문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질투하실만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그 맘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정을 주고 그리움을 가지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넘어설 만큼은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고 계시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저 녀석이 내 율법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보자, 저 집사가 내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가나 안넘어가나 보자 그렇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형상 나의 자녀들이 나를 사랑하는가” 그 중심을 매일 하루도 안 빼놓고 보고 계십니다. 인간이 사랑에 인색할 때 하나님은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십니다. 사랑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추하나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다른 그 어떤 여타의 일보다 인간들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결혼하려고 대상자를 데리고 오면 부모 입장에서 보면 아니 저 자식이 눈이 삐었지! 하면서도 옛날 자신도 그렇게 한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에는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니까 점잖게 사랑만 하시고 사랑을 받는 일에는 초연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면 무척 행복에 겨워하시며 자신을 사랑 안하면 불같이 질투하시는 분! 우리가 믿는 그 리얼한 사랑에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사랑을 순간 순간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구원하시기 위해서만도 단순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다 리얼하게 보여 주시고자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신 만큼 하나님은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일은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으뜸입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일은 우리 주님에게도 가장 큰 일이요 가장 중요한 일이요 가장 본질적인 일이십니다. 그래서 요한 1 서 기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시고 사랑을 확인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 장에서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우리 예수님도 이렇게 질투 덩어리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그냥 한번 사명을 맡기기 전에 단순히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 우리 하나님의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그러므로 디베랴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시고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오늘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셋째, 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일은 노동의 일이 아니라 기쁨의 일을 주십니다. 그러나 일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가 핵심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주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하나님은 일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는데 뭐가 아깝습니까? 우리에게 축복도 하시고 은혜도 주시고 동행도 하시고 하늘의 보물창고가 활짝 열려지게 됩니다. 사랑하면 여러분 역시 모든 것을 주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는 아브라함의 당신을 향한 사랑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축복을 주셨고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시고 난 다음에 엄청난 축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때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고 때론 분에 넘치는 기쁨과 직위와 어떤 자리도 안겨 주십니다. 그것이 어찌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 일만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부분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부분은 괄호를 열고 예를 들면 장로님과 권사님! 잠시 존함을 써도 괜찮겠습니까? <도준의 아내 인실아> 이렇게 괄호를 닫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도 바꿀 수 있습니다. 괄호를 열고 “너희는 같은 양끼리 키재기 하지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괄호를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그 어떤 다른 질문으로 대치할 수 없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은 꼭 디베랴 호숫가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밀피타스 지역에 오셔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나에게 오셔서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히브리서 1 장 1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여러 부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1) 때로는 평범한 삶 가운데 오셔서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무뚝뚝하게 있으면 그것이 날 사랑하지 않은 증거라고 여기며 여러 가지로 남자를 골탕을 먹입니다. 샤론 스톤이란 여배우가 살던 남자와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헤어진 그 남자는 샤론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늘어놓았습니다. 샤론 스톤은 자신하고 있을 때 30 초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든지 키스를 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표시해 주지 않으면 심통을 내기 때문인데 나는 그렇게 까지는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샤론스톤에게 사랑확인은 존재확인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에게도 이 방정식이 적용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샤론 스톤만큼 자주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삶 속에 가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해 보시는 분이십니다.

2) 때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면서 가만히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우리 집 딸이 수원장로교회 유아원을 다녔습니다만 그래서 복음성가를 많이 배워 가지고 왔습니다. 언젠가는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예수 사탕을 먹었네 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애가 사탕을 좋아하니 예수 사탄을 이겼네!가 그렇게 바꾸어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주신 사탕의 축복들만을 생각하고 정작 그 달고 오묘한 축복을 주시는 예수님은 까먹어 버리기 쉽상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시면서도 우리가 그 축복만을 좋아하는지 우리가 그 은혜 자체만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 축복과 은혜를 주는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예민하게 살피십니다. 만일 우리가 축복과 은혜 그 자체만을 주님 보다 더 좋아하게 될 때 그 은혜와 축복 역시 우상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물론 축복을 감사로 받아야겠지만 우리 시선은 언제나 선물 꾸러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주시는 분에 고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과 시험을 허락하시면서 우리를 살피십니다. 우리가 시련과 곤경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면밀히 살펴보십니다. 욥이 시험 당할 때,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은 한순간도 욥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단 한시도 아브라함에게 그 관심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환난과 시련과 아픔을 주시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이 싹 없어지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려하는지도 살펴보십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만약 내 생활 속에 환난이나 시험이 닥쳐온다고 할 때 보통 사람들은 환난의 늪에 빠져들어가는데 그러나 여러분은 환난과 시련 그 자체에 빠져들지 말고 환난과 시련이 내 삶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혹,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그 무엇을 더 사랑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혹 주님보다 더 받들고 살았던 것이 있었는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가 이것들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아! 하나님께서 내가 이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안하는가 확인하고 싶어하시는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환란이 내게 찾아 올 때 그것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또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야고보 1 장 2 절)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시련을 줄 때 오호라 우리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구나! 오히려 야고보 사도같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환난과 시련은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사건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시험하시지 별로 시험할 값어치가 없는 사람을 시간 낭비하시면서 까지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하시는 중심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지난 주간 기독교윤리 과목의 oral test를 받았습니다. 약 100 페이지에 가까운 교수의 강의록을 읽고 15 분 동안 그 내용을 묻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읽었지만 전체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교수가 물어볼 만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지 지금이 나토군이 유고를 폭격하고 있으니까 분명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부분을 물어볼 것이다. 생각하고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교수는 정확하게 첫 질문부터 코소보 전쟁의 정당성을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정당한 전쟁이 수행되기 위한 일곱가지 조건을 자신있게 설명하면서 내일이 예수님이 못박히신 날(성 금요일)인데 예수님은 폭력의 악순환을 십자가로 저지시키고, 폭력을 남에게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행사하셨다고 지난 번 목회서신 13 호 보낸 것을 인용하면서 대답을 마쳤는데 “엑셀렌트”하다는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제가 분명 교수의 표정을 잘못 읽지 않았다면 학기말에 에이 플러스입니다. 우리가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시험하시는가 그 중심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중심은 “네가 이것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가 시험의 핵심입니다. 바로 그때 내가 주님보다도 더 사랑한 것이 없었는가를 뒤돌아 본다면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는 열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기억한다”는 수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주님도 사랑 받으시는 만큼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기실 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 거기에는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강도에 따라 새로운 일을 맡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주님의 큰 일, 중요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분들에게 주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께로부터 사랑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용의 눈물을 보시지 않았어도 정몽주와 이방원이 함께 나누었던 시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와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이방원이는 정몽주를 체제 속으로 끌어 당기려고 하여 그 뜻을 담은 마음을 시로 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이같이 우리도 얽혀져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그러자 곧바로 정몽주가 답하여 “이몸이 죽고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여기서 정몽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삶과 죽음을 뛰어 넘습니다.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다 하더라도 님향한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는다 ”얼마나 사무치는 사랑의 절정입니까? 만일 예수님과 정몽주가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면 스승과 제자의 멋있는 환상적인 조화가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신다면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주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그렇게 신앙고백 했을 것이고, 베드로 같이 십자가 현장에서 멀리 도망친 거나 부인한 것이 아니라 정몽주가 자신의 주군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피흘려 죽어 갔듯이 정몽주가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주님과 함께 고난을 같이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정몽주식이 있고 이방원 식이 있을 것입니다. 뭐 그 중간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이방원 쪽에 약간이라도 더 가까울 수도 있고 정몽주 쪽에 더 가까운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방원같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수주일 안하면 어떠하고 십일조인들 안하면 어떠하리 기도안하고 살면 어떠하며 헌신예배는 드리되 헌신인들 안하면 어떠하리 이세상 욕심과 함께 얽혀져서 만수산 드렁칡과 같이 살다가 이세상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자세의 그런 아리까리한 신앙생활이 있겠습니다만은 그러나 정몽주 식으로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주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는 시를 읊는 마음으로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신앙고백하면서 사는 그런 멋있는 신앙생활도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의 사랑이 이방원식에 가까워 있다면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절개를 지키는 정몽주 식으로 1 mm 라도 옮아가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 속에 우리 삶의 영원이 거기에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믿음에도 적은 믿음과 큰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를 나무라시고 믿음이 큰 이를 공개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사랑에도 적은 사랑이 있고 큰 사랑이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주님은 더 좋아하시고 큰 사랑을 하는 자에게 더 큰 사랑으로 보답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할 때 우리 주님 이전보다 더욱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십시다. 우리 이제 주님 향한 사랑의 불씨를 조금씩 조금씩 키워나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을 축소재생산 할 것이 아니라 우리 확대 재생산해 나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면 누가 헌신하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일거리를 찾아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합니다. 연못가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면서 점점 더 커지는 동심원을 그려 갑니다. 여러분의 삶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파문이 일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큰 동심원을 그려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키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느 때에라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예 제가 얼마만큼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잘 아십니다.”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부분에 걸쳐서 저희 제읽교회를 사랑하시고 저희 제일교회를 애지중지 키워주시고 감싸안아 주셨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저희 제일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저희는 잘 압니다. 주님 저희도 주님이 저희를 사랑한 것 만큰 저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언제 어느 때든지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확실하게 대답하는 믿음으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다만 저희의 한평생이 주님만을 찬양하며 주님 저희가 생존하는 동안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삶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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