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년 3 월 28 일 오후 1 시 30 분 한인제일감리교회
성서본문 : 마태복음 26 장 26 절 - 28 절
제 목 :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
1. 할렐루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마음 속에 올리브 나무를 꺽어들어 주님을 맞이하는 모든 우리 제일교회 성도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셨습니다. 제일 처음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람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 전부입니다. 불과 이 본문은 석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이것이 한편으로는 이 본문이 역사를 감동시키는 물결로 휘몰아쳤을 뿐 아니라 역사 속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초대교회가 형성되자 제자들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한데 모여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매번 모일 때마다 그때와 똑같이 상을 차려 놓고 주님의 만찬을 되풀이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새겼고 제자들이 주님의 생전에 주신 말씀을 되뇌일 때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자비송(Kirie Song)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그리스도인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찬의 예배는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뜨겁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감화감동을 받아 자신의 삶 자체를 사랑의 incarnation으로 바꾸어 가는 물결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성찬전승을 종교화하는 물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교리논쟁이 일어났고 교파로 나누어져 “내가 옳고 니는 그르니” 하면서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교회사 혹은 교리사에 보면 이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놓고 “상징성이냐, 기념설이냐, 화체설이냐, 혹은 영적 임재설이냐”를 놓고 박터지게 싸웠습니다. 화체설은 주로 카톨릭이 주장하는 것인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를 문자그대로 받아드려 성찬에 참가한 사람이 떡과 포도주를 먹은 즉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설입니다. 화체란 예수님의 몸(體)으로 화한다해서 화체설입니다. 장로교에서는 칼빈파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고 쯔빙글리파는 상징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단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것이 상징설이고 영적 임재설이란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성령이 임재 하셔서 그 떡과 포도주를 주님의 살과 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또 루터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으니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성만찬을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거부하고 그의 형상대로 우리 영혼을 재생시키도록 돕기 위하여 그의 은총을 보내 주시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각각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의 성찬을 해석하는 가운데 카톨릭과 개신교가 개신교내에서 각 교파가 나누어져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싸웠습니다. 여러분 숫자에게도 질서가 있습니다. 4.5와 5가 만났는데 이상하게도 4.5 가 5 에게 예전과 같이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5가 4.5를 불러 세웠습니다. “야, 임마 너 왜 나한테 건방지게 인사도 안하고 지나가니?” 그러자 “임마 나 잘 봐! 나 점 뺐다. 앞으로 니가 나에게 인사해라 알았어!” 기독교교리사를 가만 보면 왜 싸움이 일어나는냐하면 “나 잘났다! 야 그런데 너도 참 잘났구나” 그러면 쌈이 안 일어나는데 “나 잘났다 근데 너는 잘난 나에 비해 넌 참 못났구나! 나 잘 생긴 것도 죄냐? 너 못생기면 다냐?” 이래서 쌈이 붙는 데 교리 싸움은 훨씬 무서워서 다른 이론은 용납하지 않고 화형에 처한다든지 파문한다든지 하는 큰 미움이 발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살과 피를 주셨는데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살과 피를 주셨는데 죄인인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미워하는 구실을 만들고 서로 싸움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분명 하늘에서 보시면서 “아이고 저 철없는 것들” “답답하기가 맹꽁이같은 것들”하시면서 혀를 끌끌 찰 정도가 아니라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절정에 속한 일을 가지고 서로 미워하는 근거를 만들다니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쉽게 예수님의 말씀을 종교화하고 교리주의화하고 거기에서 생명(vitality)을 빼버리고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겨 놓았습니다. 마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답시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인간을 속박하는 그물로 만들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주님의 거룩하신 살과 피에 대한 관심이 다소 엉뚱한 곳에 가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피가 오 형일까? 에이비형일까? 주님의 살은 근육형일까? 아니면 비게살일까? 주님의 피에 혈소판과 백혈구는 단위 미리 그람 당 몇 개고 그것이 다른 사람과 비해서 많은 편인가 적은 편인가? 언젠가 제 동생이 간호학을 배우면서 오빠, 눈물과 그냥 물과 무슨 차이가 있는 줄 알아? 그래 무슨 차인데? 응, 물에는 없는데 눈물에는 약간의 염분과 xx이라는 화학적 요소가 있어! 이 말이 맞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이 수술을 하여 병원에 드러누워 있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합시다. 이 눈물을 어떻게 염분과 어떤 화학적 요소로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상징설이니 기념설이니 화체설이니 영적 임재설이니 하면서 어떻게 주님의 살과 피를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1917 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공의회 모임 중이었습니다. 전례용 예복 색깔을 두고서 혹은 흰색이어야 하느니 혹은 보라색이어야 하느니 맹렬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도록 민중의 삶은 비참하고 처참했는데 교회가 그들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종교의 거룩한 상아탑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주신 것이 신학자들이 서로 미워하는 교리논쟁이나 할 수 있도록 “기념설이나 상징설이나 임재설이나 화체설”을 충족시켜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왜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저는 지난 해 신문에서 아버지 사랑의 무게는 48 KG 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노스이스트 시에 사는 랜디 리머(32)는 선천성 신장병을 앓는 딸 메간에게 자신의 한쪽 신장을 기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대답은 “너무 살이 많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복부의 비대한 지방을 자를 경우 폐렴이나 혈액응고 현상이 나타날 수 잇으며 이 때문에 신장 자체가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랜디는 반드시 살을 빼서 내가 기증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의사가 할
당한 체중 감량분은 무려 45 Kg, 콜라와 초콜릿 우유, 감자튀김에 등에 길들여 온 랜디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버터와 치즈가 풍족한 유제품 농장에서 자랐고 아내와 결혼했을 당시에는 170 cm 키에 몸무게 90 kg 이었습니다. 랜디는 몇 년전 오토바이 사고로 랜디가 6 개월 동안 누워있는 동안 랜디가 할 일은 오로지 먹는 것뿐이었습니다. 옷들은 계속 작아졌고 결국 135 kg 의 거구가 되었습니다. 랜디는 사랑하는 딸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오직 딸아이만 생각하였습니다. 즉시 기름진 음식을 치우고 야채와 과일을 먹기 시작하였고 어떤 때는 사과 몇 개만으로 버텼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쓰러질까봐 제발 좀더 먹으라고 사정을 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랜디의 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자 이웃들은 입던 청바지와 셔츠를 갖다주며 “조금만 더 힘내!”라고 격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에는 마을을 산책하며 약 4 km를 걸어다녔고 5 개월만에 살인적인 하드 트레이닝으로 랜디는 99 kg 으로 가벼워졌고 그 이후로도 3 개월후 랜디는 12 kg을 더 줄였고 드디어 딸에게 신장을 줄 수 있었습니다. 딸 메간은 신장수술을 받았고 그 수술은 대성공이어 메간은 여느 아이와 같이 마을을 휘젖고 뛰어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랜디 역시 건강을 쉽게 회복했고 87 kg의 똑같은 체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이 불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발견했는데 딸 메간이 아빠를 두 팔로 꼭 껴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뚱뚱할 때는 미처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었습니다. 랜디가 왜 살을 48 kg이나 줄였습니까?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해? 아내에게 잔소리 듣는 것이 싫어서? 이웃사람들이 뚱뚱하다고 손가락질해서? 아닙니다. 기념설이나 상징설이나 임재설이나 화체설이 아닙니다. 신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왜 신장을 주려고 했습니까? 딸을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왜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셨습니까? 물론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죄사함을 주셨습니까?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 아닙니까? 이 살과 피가 무엇입니까? 생명 아닙니까? 왜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4. 오늘은 한인제일감리교회가 생긴 이후 최초로 예배에 성찬예식을 함께 드립니다. 저도 신학교 다닌 때 뭐가 뭔지 아직 모를 때 성찬식을 하고 난 다음에는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야 그 포도주 죽여주더라! 그런데 전번 것보다도 알코올 도수는 좀 낮은 것 같던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성찬식 포도주는 차라리 꼬냑으로 했으면 더 은혜가 되지 않겠어!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하게 먹고 진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제 말에 모두가 동감을 표시하면서 성찬을 하는 잔이 너무 째째하게 적다고 하는 친구도 있고 친구는 눈꼽만한 빵 대신에 짭잘한 크랙카 한 개씩 주면 마시고 난 다음에 먹기 좋을텐데 내가 나중에 신학교 학장이 되면 성찬식을 확 바꾸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찬을 받고 난 후 무슨 말을 나누실 것입니까? 이제 우리 성찬에 대한 이해를 확 바꾸어 보십시다. 종교적 예전으로서만의 성찬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어 살과 피를 나누어주셨듯이 우리 역시 성찬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도 주니과 같이 내 살을 나누어주고 내 피를 나누어 주는, 우리 삶의 떡을 나누어 주고 우리 삶의 잔을 나누는 성찬의 삶으로 확 바꾸어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인 이 곳에서도 꼭 물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고통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우울증으로, 어떤 이들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어떤 이들은 나만 알고 있는 고민으로, 어떤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적 고통으로 둘러 쌓여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동그라미를 쳐놓고 다른 사람은 그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믿고 자신도 거기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들이고 이들 모두가 다 우리의 성찬의 삶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성찬의 삶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메리카를 훔친 여자라는 책을 써 낸 김영숙 씨가 신문의 인터뷰에 응하였습니다. 마취과 의사인 남편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자살을 생각하며 글을 쓸 기운도 없어 병원에서 또는 자다말고 일어나서 때로는 울며 46 개의 테잎으로 녹음해 둔 것이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김영숙 씨는 자신은 비록 정신과 의사였지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 남편이 소천한 이후 신학을 공부하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셨던 십자가가 자신의 처절한 아픔의 경험 속에서 하나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문득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슴으로 뭉클하게 와 닿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이렇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남편을 위한 사랑, 자녀를 위한 사랑, 환자를 위한 사랑이 모두 한 곳에 비축되어 있는 줄 알았어요. 환자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쏟으면 가족에게 갈 사랑이 줄어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큰 아픔을 겪고 보니 사랑이란 쓸수록 자꾸 생겨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이제는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다보니 살 맛이 나더군요”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5. 저는 우리 제일교회 교인들이 오늘 주님의 성찬을 받으면서 이것이 곧 바로 성찬의 삶, 십자가의 삶과 연결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면서 구레네 시몬과 같이 억지로 지는 것이 아니라 강도들과 같이 자신이 진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면서 오늘도 묵묵히 내 살과 피를 나누되 기쁨으로 나누면서 여러분의 삶이 살맛이 나고 의미로 충만해지며 존재의 환희에 감쌓여 살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것처럼 저희 역시 저희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나누면서 더 기뻐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삶이 주님의 십자가에 연결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저희 주변에 말할 수 없이 고통 당하고 있는 이들,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이들, 외로움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 가까이 다가가 저희의 땀과 눈물을 나누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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