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2 월 25 월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마가복음 12 : 28 - 31
제 목 : 네 몸을 사랑하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의 은총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나안 교회 모든 식구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지우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우개는 보통 지우개가 아니라 마술지우개여서 모든 글자를 지울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나게 글자를 지워나갔습니다. 정의도 지우고 자유도 지우고 경제도 지우고 정치도 지우고 이념도 지우고 모두다 지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우려고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빨간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 글자는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무엇이 남을까? 만일 성경의 핵심을 두 세 글자로 요약하면 무엇이 남을까? 예수님은 구약성경 37 권을 단번에 요약을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모르고 넘어가기 쉬운 또 한가지의 사랑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 차원은 웬만한 성서학자나 유명한 설교가도 간과하기 쉬운 차원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하게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점은 31 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부분을 다시 분석하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네 몸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서 하나의 기정사실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몸을 사랑하지 말고 네 이웃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네 몸을 사랑한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네 몸을 사랑한 것같이”는 보조적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단지 하나의 수식어구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몸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차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는 아니 잃어버렸던 귀한 주님의 말씀을 다시 되찾아내려고 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멧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 첫 번째 차원입니다. 세 번째 차원은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입니다. 이 첫 차원과 셋째 차원 가운데 숨어있는 차원이 바로 내 몸을 사랑하는 차원입니다. 오늘은 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였는데 바로 등잔 밑에 있는 말씀을 귀중한 차원을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몸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째는 몸을 미워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성경이 말씀하는 멧세지와는 이질적으로 들리고 느낄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몸을 죄악시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보면 이상한 흐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몸을 미워하는 이상한 전통이 생기게 됩니다. 중세기에는 수도원운동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열풍이 불어 남자들이 장가를 가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그리고 이웃을 봉사하는 훈련을 닦는 수도자들이 급격히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수녀원도 많이 생겨나 이제는 여자들이 평생 순결서약을 하면서 하나님께 온 몸을 바치는 여인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이 수도원 전통에서는 금욕주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수도원이나 수년원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곧 이 죄악을 저지르는 육신을 미워해야 한다고 결혼도 하지 않고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였습니다. 이런 금욕주의적 전통은 단지 기독교만이 아니라 힌두교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육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몸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성경에 대한 오해에서 온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몸은 죄를 짓는 도구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몸을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몸을 미워하는 여러 가지 고행을 하였습니다. 금식을 하여 육체를 괴롭히고 이불을 덮지도 않고 자고 사막이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수도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밑에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수도를 하였습니다. 바로 그렇게 육체를 괴롭힘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떤 이는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 거기서 내려오지 않고 수련을 했습니다. 이 사람을 주상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몸을 미워하고 홀로 그 고행을 하고 있었다고 다들 그 성인의 거룩성을 인정했으며 그래서 당시 교황이 성인의 덕이 높다고 그 밑에서 찾아와서 알현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도 카톨릭 신부로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성당의 계단을 그냥 오르지 않고 무릎으로 걸으며 피를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다가 마침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고행을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는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늘 아버지가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서 밥도 안 먹고 몸도 씻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 위에서 자고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서 고행만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신이 선물로 준 몸을 사랑하고 그 몸으로 자신이 준 은총을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사디즘과 매조키즘이라는 병리심리학의 용어가 있습니다. 사디즘이란 남이 고통 당할 때 즐거워하는 정신병이고 매조키즘이란 자신을 괴롭힘으로 쾌락을 얻는 정신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거나 즐거움과 만족을 얻으시는 새디스트가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몸이 상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자녀들의 몸이 아플 때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밤에는 적은 아이가 밤새 기침을 하면서 잤습니다. 독감에 걸렸는지 그래서 내 가슴이 뭔가 걸린 것같이 아팠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의 몸의 지극히 적은 일부가 아파도 보모인 우리 마음이 찔리고 아픕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을 향한 마음은 그 이상 그 이상입니다. 만일 우리 아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자신의 몸을 미워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주신 몸을 미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몸에 대해 가진 잘못된 생각은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보통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은 내 몸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렇게 해도 좋다, 내 맘대로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아내가 남편 생각해 준다고 하면서 “당신, 술 작작 마셔요! 그러다가 큰 탈이라도 나면 어떡할려구 그래요 당신!” 그러면 남편은 말합니다. “아! 내 몸, 내 것이고, 내 것잉께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나도 아닌 당신이 왜 난리야! 난 하고 싶은 것 못하다 오래 사느니 하고 싶은 것 하면서 굵고 짧게 살다가 강재구 소령과 같이 일찍 가겠어! 야,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런 명언을 남기다가 정말 일찍 세상을 하직하면서 가십니다. 제가 부목사로 일했던 서울 한빛교회 담임목사님의 친구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전치 5 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퇴원하자마자 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야! 너는 지난 번에 사고치고 또 오토바이 타냐? 그랬더니만 그 목사님의 친구분은 야, 너는 배탈 한번 났다고 밥 안먹고 사냐“ 그러더니 며칠 뒤에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생각 속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몸은 물론 내 꺼“하면서 내 몸을 아무렇게나 취급하고 살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의 최대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판 죄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죄나 오십보 백보입니다. 가장 큰 죄는 ”내 목숨 내 몸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은 것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몸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 값없이 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 일생을 이루고 있는 우리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생을 사는 동안 값없이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공짜로 빌려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라 하여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부모님이 주신 몸을 아끼고 소중히 하였습니다. 몸을 미워하는 생각은 기실 우리 몸에 대한 철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몸을 미워하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요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몸입니다. 물론 몸 속에 우리 영혼과 마음이 내재합니다. 이 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은총의 선물로 주신 몸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우리 시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몸을 미워하고 몸에 대해 무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허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저는 생과부 위자료청구소송이라는 비디오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문성근은 제가 있었던 한빛교회 교인이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문성근은 남편으로 황신혜는 그 남편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은 회사일에 너무 열중해 있어서 가정을 돌보지 아니합니다. 자신의 건강도 자신의 아내도 역시 돌보지 않습니다. 부인은 마침내 열이 받쳐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남편이 다니고 있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냅니다. 내가 지금 생과부와 마찬가지로 살고 있다. 회사가 내 남편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회사는 이에 대한 책임으로 이억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냅니다. 재판부는 “이유있다”하고 이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오직 중역에의 꿈을 꾸다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정과 건강을 잃어버리는 케이스입니다. 어떤 이는 에이! 이제 다 살았는데 하면서 대충 살지 뭐 하면서 몸을 별로 돌보지 아니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음식을 먹는 습관과 관습이 몸을 별로 돌보지 않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어떤 이는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하는데 채소를 죽어라고 먹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운동을 꼭 해야 하는데 운동은 죽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셋째, 우리 몸은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인데 우리는 성전을 함부로 취급하기 쉽상입니다. 성전이 뭐 십자가 종탑이 있고 교회같이 지어진 건물만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은 그 어디나 성전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 장 16 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사시는 성전이고 몸은 그 성전을 감싸고 있는 터전이라고 한다면 몸 자체도 하나님 사시는 성전을 이루고 있는데 얼마나 몸이 중요합니까? 그 중요한 몸을 한 홀이라도 소홀히 여겨셔야 쓰겠습니까? 그 소중한 몸을 함부로 취급해서야 하겠습니까? 고이 감싸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주부터 우리 가나안 교회는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주간과 그 지난주간에는 배 목사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며칠 전에는 사모님이 간호를 하다가 지치셔서 목사님이 입원하는 그 병실에 입원하셨습니다. 우리 김성래 목사님도 많이 회복되셨습니다만 지금 몸져 누워계십니다. 얼마전에는 우리 교회 박정옥 집사님의 아들이 손을 다쳐 입원하여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또 지난 주간에 저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한 분이 수술하셨습니다. 제가 구역예배를 다녀보니 아픈 식구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지나치게 수치가 높아서 고생하시는 분, 관절이 아프신 분, 심장이 아프신 분,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신 분, 교통사고로 후유증이 있으신 분, 독감에 걸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분들, 허리가 아프신 분, 어깨가 마비증세를 일으키신 분, 기침과 천식으로 고생하시는 분, 목이 뻣뻣해서 아프신 분, 참으로 아프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파서 출근도 하지 못하시고 누워 계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그만 몸져누우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참으로 어떤 분들은 고통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나눠가졌으면 하는 분도 계셨고 어떤 분을 위해서는 그 고통을 제거해 주십사고 그토록 기도했는데 한 때 그 고통이 계속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샬롬하기를 원하십니다. 샬롬이란 우리말로 평강인데 평강이란 평화 플러스 건강입니다. 샬롬은 꼭 심령의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평화, 건전한 사회 만이 아니라 샬롬은 우리 몸의 건강한 것도 샬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샬롬할 뿐 아니라 우리 몸의 건강을 원하십니다. 우리 몸이 샬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나안 교회 성도들의 몸이 샬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은 어떤 영적인 것에만 가있지 않습니다. 영혼을 포함한 전체의 우리의 몸이 샬롬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몸의 건강 여부도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항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단지 애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나안 교회 성도들, 제발 아프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픕니까? 아프니까 아픈 것 아닙니까? 그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저는 다시금 사랑하는 가나안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몸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몸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냥 내 몸 하나 잘 건사하자는 생각으로 애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시는 성전이므로 여러분의 몸을 배나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라는 성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네 단계에 대해 썼습니다. 사랑의 첫 단계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가장 높은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하나님의 사랑이 네 번째 단계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내 몸을 사랑하는 성숙한 사랑으로 접어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내 몸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대해 주신 내 몸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과 같은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몸은 정직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몸을 잘 돌보면 몸도 그에 대한 응답을 합니다. 저는 염주동에서 살다가 교회 사택인 이층으로 올라왔습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남모르게 와서 교회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청소하는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가 놓은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토요일이면 교회에 와서 조용히 기도하고 난 다음에 교회를 아름답게 치장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가나안 교회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목사님이 병상에 있을 때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도 말할 수 없이 편찮으신데 목사님을 위문하기 위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 사는데도 불구하고 꼭두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식구들을 위하여 차를 운행하는 분도 계시고 어린이와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하여 자원하여 봉사하는 집사님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부터 피아노 반주를 하기 위하여 매일 수고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침부터 나와서 교사로서 봉사하고 또 어떤 분은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여 매일 교회에 나와 기름을 채워 놓고 허드렛일을 하고 어떤 분은 교회에 필요한 찻잔이며 그릇이며를 잔뜻 쌓아 놓고 가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집에 있는 먹을 것과 쓸 것을 교회 식구들 먹이기에 바쁜 발걸음도 있고 어떤 이는 몸이 아픈데도 아픈 몸을 이끌고 꼭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이는 두 아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을 잡고 참석하고 어떤 이는 교역자들을 특별한 요리로 격려하고 어떤 이들은 세 자녀를 다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하며 어떤 이는 어떤 이는 이들의 봉사와 섬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쁜 주말,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성도들의 좋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나 여기서 이 일하고 잇네 동네방네 선전하면서 하지 아니하고 조용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가나안 교회가 좀 냉냉한 분위기 속에 있는지 알았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른 손의 검지가 하는 일을 오른 손의 엄지가 모르게 실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고 이 모두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따스한 사랑이 말없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의 말과 사람의 요란한 방언은 없었으나 조용하게 사랑으로 하나님의 집을 적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가슴 속에 여러분의 사랑의 수고의 그 따뜻한 온기르 늘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 때 무슨 의견이 다른 면모도 있었습니다만은 그것 역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다 더 진실로 사랑하려는 뜨거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시냇물이 요란하게 흘러가는 소리는 없었지만 내면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어떤 깊은 물결로 주님과 주님의 몸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의 일꾼인 저 역시 그 동안 짧은 기간이 지나갔지만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많은 사랑을 여러분들로 받았습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잔잔한 파문을 저는 매 순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분에게 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들을 본 것이 빙산의 일각이었다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는 모든 모습을 아마 우리 주님께서는 낱낱이 지켜 보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몸인 이 가나안 성전을 사랑하는 것 같이 여러분의 몸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몸도 역시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실하게 주님의 몸된 교회, 이 가나안 성전을 사랑하는 것만큼 주께서 사시는 또 하나의 성전인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나에게 주어진 몸입니다. 시간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몸 역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시간과 몸을 가지고 잘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행복을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가나안교회 모든 성도들이 몸을 더욱 사랑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그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허락하신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뿐만 아니라 그 강건한 몸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몸도니 교회를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 은총으로 하락하여 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며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교회 가나안 교회 온 성도들에게 넘치는 건강을 주옵시고 그 건강으로 가정을 돌보며 그 건강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욱 충성 헌신 봉사하며 그 건강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인생을 더욱 행복하게 읨미있게 가치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몸이 주님 사시는 성전임을 알아 저희의 몸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더욱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토록 사랑하는 가나안 교회 모든 성도들을 더욱 이전보다 더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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