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3 월 25 일(주일) 오전 11 : 00 가나안교회 주일낮 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3 장 1 절 - 3 절
제 목 : 사랑이 없으면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가나안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3 장 사랑장의 네 번째 지금까지 저는 고린도전서 13 장을 강해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 장 31 절을 두 차례에 걸쳐 말씀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장 강해의 세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두 주간 동안 논문을 마무리하도록 시간을 내주신 목사님과 성도들 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고린도교회에 쓰신 첫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내가’ 할 때 ‘내’는 한, 사람으로서 바울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며 사도로서 바울을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내게 주신 뜻을 생각할 때 보다 생생하게 받을 수 있도록 “내가”라는 속에 바로 사람인 나 자신을 대입하여 볼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인 나를 대입하여 볼 수도 있으며 저 역시 목회자인 저 자신을 대입하여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각각 내 자신을 대입하여 이 말씀이 내게 주신 뜻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람의 방언이 무엇일까? 우선은 다른 나라의 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외국어 구사능력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을 할지라도” 이는 내가 만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에스페란토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포함하여 10 개 외국어를 통달하여 마치 본토인처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뜻입니다. 바울은 사실 상당히 그 시대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 그리고 여러 외국어에 통달한 석학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물론 아람어 로마어 헬라어 등을 통달한 석학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말하는 방언도 잘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 장 14 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바울 선생님은 아마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도 잘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19 장 6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즉 바울 선생님은 방언을 할뿐만 아니라 바울이 안수하면 안수받는 사람마다 방언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울은 사람의 방언만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잘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 장 1 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노니”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바울 사도가 “나 방언합네!” 하시지 않지만 또한 성령의 은사를 꿰뚫고 계시는 것을 보면 바울은 방언에 관한 한 양수겹장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친구는 학교 다닐 때 히브리어를 잘했는데 한 교회에 부임해 가자 교인들이 자신을 별로 존경을 하지 않더래요!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때마다 제단의 의자에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창세기 1 장부터 마치 화계사 스님이 독경을 하는 것같이 유창하게 쭉 읽어갔는데 데 바로 그 날부터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존경 그 자체로 달라졌다고 합니다. 야, 우리 목사님 방언을 하시는데 굉장히 수준높은 방언을 잘하신다고!! 자, 내가 목회자로서 아니면 내가 신도로서 하늘의 방언도 하고 세상의 방언도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저는 13 장 1 절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천사의 말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회자인 내가 강단에서 성경에 입각하여 은혜가 충만한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하면 마치 사람이 하는 것과 같지 않고 처음에는 하늘에서 단비를 내리는 듯하고 설교 중간쯤에는 하늘의 가랑비가 내리는 듯하다가는 설교 말미에는 하늘의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은 말씀을 전달했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하늘의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 중 핵심을 정리하여 설교를 전달하는 자의 강단에서 그 목회자의 뇌리 속에 팩스밀리로 넣어 주는 것같이 마치 입만 벌리고 혀를 놀리기만 하면 영적 아미노산과 성결한 종합비타민과 같은 말씀이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에게 있어서 말씀의 능력은 필수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역자의 설교에 의하여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한 때 다녔던 Berkeley의 First Presbyterian Church에 Labberton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손바닥만한 성경 책 한 권만을 들고 설교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 같은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웃기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 분이 설교만 하면 온 눈과 귀가 그 목사님에게만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 버튼 목사님이라 그런지 내가 버튼을 누르면 은혜로운 설교가 쭉쭉 쏟아져 나옵니다. 한번도 헷갈리거나 쉼이 없이 하다가 제 시간이 되면 거의 1 -2 분도 틀리지 않고 딱 마칩니다. 아내는 그 목사님의 설교와 같이 나도 하라고 하지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천사의 말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사의 말 때문에 대인관계도 원만하여 사업도 잘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외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나고 방언을 할뿐만 아니라 통변까지 하며 한번 설교하면 구속의 은총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낸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삽이 무거워 자루를 잡고 끌고 가면 돌과 부딪히며 무척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정말 듣기 싫습니다. 그래서 무겁더라도 삽을 들고 갑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들으면 수명이 그만큼 단축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게 다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2 절의 말씀으로 가봅시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목회자로서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대를 앞서가 저 멀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문명의 위기와 파국을 경고하고 피할 길을 예시하며 마치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보이면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를 외치면서 “이 미련하고 허탄한 것들아!” 외치면서 시대와 시대로 세대와 세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 얼마나 목회자로서 영적 카리스마가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앞일을 꿰뚫어 보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 집사 이번에는 코스닥에 손대지 말어!”, 이 집사 그 길로 가면 안돼!!“ 그렇게 말해 인생의 시행착오의 길을 예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비밀을 알고” 궁예가 가지고 있는 관심법, 무슨 독심술이 있어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 사람인지를 알면 꼭 그런 능력을 버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지식을 알고” 목회자가 신학적인 지식, 목회적 지식, 상담학적 지식, 컴퓨터 지식, 사회과학적 지식, 구역과 조직관리의 지식을 알고 신도들은 시장의 장세, 경제의 흐름을 읽고, 무엇을 손대야 부를 획득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지를 알면 얼마나 인생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또 내가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교회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목회자의 영적 인프라가 교회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즉 목회자의 영적 능력의 크기가 교회의 성장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도 어떤 때는 믿음이 한없이 올라가는 때가 있는가하면 엘리야와 같이 한없는 나락으로 빠질 때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신도들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믿음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흠모의 대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과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이런 굉장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내 존재는 무다”, 그런 그런 때깔나는 것 그런 영양가 있게 보이는 것들이, 색깔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불가에도 그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율금색나는 옷을 입고 수도한다한들 그 안에 자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3 장 3 절을 보십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능력이 있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교회는 재정적인 능력이 있어 몇 억 씩 몇 십억씩 북한에도 보내고 해외선교사를 보내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대외적으로 이름도 나고 교회의 선교도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열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하나의 불과 같은 열정과 비전입니다. 잠언에는 비전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합니다만 요즘 성장하는 성장을 지향하는 교회, 목회자 잠언에는 “비전 없는 교회는 망한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마다 비전2001, 비전 5110, 비전100000 이 있습니다. 비전을 정하고 10 만명의 영적 군사를 양성하겠다고 세우고 이 비전을 위해 목회자로서 자신을 불사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목회를 하게 되면 자신의 목회적 전 역량을 총동원하여 건강도 돌보지 않고 이를 위해 일로매진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가 급기야는 병을 얻어 쓰러지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전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다가 그것으로 쓰러지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으로도 멋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제와 봉사 그리고 열정과 헌신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찐빵 좋아하시죠!! 찐빵맛의 핵심이 어디 있느냐? 다름 아닌 앙꼬에 있습니다. 앙꼬 없으면 찐빵이 찐빵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찐빵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는 찐빵에 비유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최상급의 백설표 밀가루와 최고급의 이스트로 찐빵을 방금 막쪄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앙꼬가 없으면 그것은 찐빵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만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아니라 김덕수의 사물놀이와 같이 신명나는 소리가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 3 절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그런 표현을 쓰지만 13 장 마지막 절에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서울에 있는 동안 저는 저를 가르치신 교수님을 만나러 여전도회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교수님이 오시는 동안 “목사되어가기”라는 하일석이라는 어느 교회 부목사님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짤막한 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산문적인 것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역동성은 추상성을 지닌 하나님과 의 관계가 구체적인 행위로 표시되는데서 시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말로 설명하거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느끼는 본능적인 직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설명이나 이해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삶 전체에서 느끼는 직관이 중요하다.” 한 4 년 반 전 일입니다. 저는 그때 수원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직장은 어느 날 무척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기장 총회에서 기관목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곤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옆방에서 자리에 누워 카세트에 잡히는 데로 테이프 한 개를 넣고 play를 눌렀습니다. 노래는 중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랬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내 곁에 있어달라는 말하지 않았지! 너무 슬퍼 눈물도” 그런데 갑자기 그 가사가 나를 때렸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가사는 꼭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노래가 신승훈이 부른 노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노래를 끄고 잠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가 계속 뇌리 속에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조용히 돌이켜 보았습니다. 모든 일에 너무도 분주하고 바쁜 나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안에 내가 목사로서 있어야 할 어떤 뜨거운 것이나 미지근한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한 직장인으로 샐러리맨으로서만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내 곁에 있어달라는 말, 하지 않았지! 무척 서글픈 어조로 들려왔습니다. 사실상 내가 그 곁에 있지도 않았고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에 대한 것은 전혀 생각과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무척 바빴습니다. 총회에 있으면서 전국교회에 우표와 봉투를 부치는 일에서 시작하여 노회와 위원회 회의하는 일로 일주일이, 한달이, 일년이 그리고 8 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이 열 마디 노래 가사가 그때까지 있는 자리를 떠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고백하기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이 썼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마음을 감동케 하셔서 쓰셨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 장을 쓸 때는 바울의 마음도 어떤 진한 감동에 사로잡혀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은 바울의 펜대를 움직여 하나님의 자신의 심정을 적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너희가 나를 사랑함이 없으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오늘 우리 믿는 현실 속에 육화시켜 저와 여러분에게 대입해 보십시다. “너희가 믿음도 좋고 방언도 잘 말하며 성수주일하며 십일조도 잘하고 성경을 백독하고 너희가 굉장한 거액을 사회봉사활동에 헌금한다고 하여도, 너희 교회가 우후죽순과 같이 성장한다하여도 너희들이, 나를 사랑함이 없으면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들 생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두고 심판받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사람을 증언해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우리의 철학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줄 뿐이다”고 한마디로 삶을 정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토록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사랑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 없으면 인간의 제반 종교적 예배행위나 불타는 헌신의 행위가 다 쓰잘 데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사랑을 늘 확인하시는 분이십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아침에 한 번 점심 때 한번 저녁 때 한번 하루에 거의 세 번씩 사랑의 여부를 확인하시는 분이십니다.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며 위엄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불변하는 어떤 초월적인 실재로서가 아니라 어떤 교리의 틀 안에서 얌전히 계시는 플라스틱 같은 분이 아니라, 숨쉬는 소리도 들리고 어깨에 말없이 손을 얹으시기도 하며 기분 좋을 때는 팍팍 쓰시고 기분이 나쁘실 때는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때로는 잘해드리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좋아하고 이름도 부르지 않고 신경 끊고 홀대하면 무척 섭섭해하시고 “니가 그럴 수가 있나!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 안해 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대“ 노래도 부르는, 그저 받는 사랑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얘기도 계속 하고 싶어하시고 도움도 주고 싶어하시고 공치사도 받고 싶어하시며 엄청난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조그마한 관심과 가까운 일들을 통해 자신 역시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곁에 여러분보다도 여러분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기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이 땅의 한 생명으로 존재케 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저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풍성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주셨습니다. 저희가 이 일, 저 일하다가 때로는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일에 얽매여 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고 때로는 저희가 주님과 교제하는 것도 잊고 때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바쁜 생활 가운데 지낼 때가 많습니다. 주님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희가 주님을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생이 주님 사랑함으로 출발하게 하시고 저희 사람이 주님 사랑으로 깨어나게 하시고 저희가 주님 사랑함으로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 늘 있고 주님이 저희 안에 늘 계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살 수 있다면 저희의 모든 것은 다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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