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9 월 23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로마서 12 장 19 절 - 21 절
제 목 :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할렐루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의 죄악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부름으로써 시작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이란 먼저 로마에 있는 교회의 교우들을 말합니다. 꼭 로마에 있는 교우들만 해당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 개척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꼭 사도 바울 시대의 교회에만 해당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오늘 바로 우리에게도 우리 가나안 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 부름은 바로 우리들 가나안 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들을 부르면서 바로 권면에 들어갑니다. 19 절입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에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성도들에게 한 마디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이라는 가정을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나의 제자들아, 내 이 철천지원수를 꼭 갚아다오!” 하고 숨을 거두셨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제자들이 스승의 명령을 받아 불타는 복수심으로 유대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스승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원수들 곧 헤롯과 빌라도총독 관저에 테러암살단을 보내어 두 사람을 암살하고 가룟유다 역시 생포하여 당시 죽이는 방법 중에 하나인 돌을 던져 죽게 했다면 아마 분명히 로마제국은 대노하여 유대나라를 깡그리 쓸어버리고 박살을 냈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거기에 동조하고 후원하는 세력도 씨를 말리듯이 다 잡아다가 아마도 거꾸러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복수의 종교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 예수교 혹은 기독교란 말을 후대에 우리는 들어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원수를 갚지 않았고 원수를 갚으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댔습니다. 그저 원수들이 잡아서 죽이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을 기뻐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무협지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얼마큼 좋아했느냐 하면 집이 있는 양림동에서 중학교가 있는 산수동으로 가는 버스차비를 아껴서 무협지를 빌려서 걸어가면서 읽을 만큼이었습니다. 제가 본 무협지의 스토리는 거의 똑같았습니다. 사부님이 무술의 고수인데 어느 날 악한으로부터 불의의 공격(암수)을 받아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주인공이 다락에 피해 있다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지켜봅니다. 그리고 복수의 한을 품고 어느 은둔해 있는 무림의 고수를 찾아 무공을 배워 다시 강호에 나가 스승의 원수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무공으로 피로써 복수를 하고 사부님의 무덤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복수를 갚았다고 아뢰는 것이 무협지의 내용입니다. 무협지에는 분명한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스승이나 부모의 원수를 피로써 복수하는 일은 바로 자식된 자가 혹은 제자된 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덕이고 윤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로마서는 성도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상식에 위배되고 도리에 반대되고 덕을 잃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의 원칙이 나옵니다. 누가 너의 눈을 빼 버리면 너도 똑같이 그 사람의 눈을 빼고 누가 너를 주먹으로 때려 이가 다섯 대 나갔다면 너도 역시 그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 이 다섯 대를 뽑아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에도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법이 제정되었느냐 하면 고대 사람들이 누구 한 눈을 빼면 그 사람의 두 눈을 빼버리고 난 다음에도 성이 차지 않아 죽여버리고 더 나아가 그 가족까지도 죽여버리니 그런 법이 생긴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오른 쪽 눈을 빼면 너 역시 오른 쪽 눈 하나만 빼야 한다 팔 하나를 짜르면 너 역시 팔 하나만 자르라고 한 법이 고대의 동해보복법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동해보복법이야말로 참으로 정의를 나타내는 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사랑하는 성도들아 부르면서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아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아시다시피 초대교회 성도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즉석 즉석에서 잡아 가지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게 하기도 하고 팔팔 끓는 기름에 집어넣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성찬식을 하면 식인종들이라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오해를 하고 잡아서 풍기문란범으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세워진 소아시아와 로마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이들을 잡아넣으면 시민들이 박수를 쳐대니까 신이 나서 그리스도인을 잡아넣고 급기야는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게 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정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때려잡는 일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그런 방식으로 잡아서 죽이니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어찌 그런 원수들에 대해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무차별적으로 박해를 당하고 있는 때 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히 당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면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히 박해하는 저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원수들에게 철저히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조직화하고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여 보복하거나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20 절은 19 절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지독한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만일 원수에게 당한 그 사람과 가족들은 사도 바울의 가슴을 짓 뜯으면서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사도 바울 선생님! 해도해도 너무 하십니다. 원수를 안 갚는 것 만해도 피눈물이 나는 일인데 세상에 원수가 주리거든 케찹을 바른 빵을 주어 먹이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시원한 쥬스나 콜라를 대접하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제 오빠가 지난 달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된 것을 사도 바울 선생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눈물로 울부짖는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서 성도들에게 그 원수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하십니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만일 원수에게 보복을 하면 그 원수는 더 큰 보복을 하려고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원수에게 차를 대접하고 식사를 대접하면 그 원수는 생각할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저 녀석이 무슨 꿍꿍이속으로 그렇게 하나! 나중에는 저 녀석이 돌았나! 그렇게도 생각하다가 나중에서야 나는 그렇게 악으로 대했는데 저이는 나를 그렇게 선으로 응대하니 속으로 자기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다가 결국 견딜 수 없어 할 것입니다. 나는 치졸하게 대했는데 그는 그것을 자기와 똑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대하니 거기서 자기가 졌다고 생각하고 진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의 치졸함을 생각하면서 견딜 수 없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머리에 숯불을 얹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무지막지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적의를 보이지 않고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린양처럼 그렇게 숨져갔습니다. 때로는 원형경기장에서 사자가 다가오는데도 기도를 하다가 그대로 잡혀 먹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온 시민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죽음 앞에서도 대항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죽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로마귀족의 부인들도 원형경기장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고 그들이 믿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상하다고 하는 로마의 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졌고 그런 숭고한 사랑을 지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사자밥이 되게 하는 로마제국과 그런 나라의 시민인 것이 마치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의 모습처럼 그런 것을 즐기는 자신들이 마치 머리에 숯불을 얹어 놓은 것처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기술한 사람들에 의하면 제일 첨에 로마의 귀족 부인들이 차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나중에는 귀족부인들의 신앙은 남편에게 전해져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그 사랑에 감동하여 로마제국 상층부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 쪄낸 찜빵‘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독실한 크리스챤이기도 한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가 약 31 년 전에 군대에서 격은 일을 최근에 <좋은 생각>이라는 월간지에 기고했습니다. 자신이 군대를 갔을 때 자기를 그토록 괴롭힌 한 중사에 대한 추억입니다. 그 중사는 병사들에게도 소문난 악질로서 서울출신 안경잡이를 싫어 했고 거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가진 특히 이만재 이병을 싫어했습니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날에는 영하 10 도가 넘는 겨울밤에 갑자기 비상을 걸어 ”서울 출신, 내무반에 알철모 쓰고 맨 몸 집합!’은 예사였고 특히 안경잡이한테는 차려 자세가 아닌 열중 쉬어가 주어졌습니다. 차려 자세보다는 열중 쉬어 자세가 훨씬 춥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겨드랑이 체온의 소중함을 그는 그때 배웠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병들에게는 그가 원수였지만 특히 안경잡이 서울출신인 이만재 이병에게는 최중사는 원수 중에 원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독감 몸살로 내무반 구석에 모포를 쓰고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31 년 전에는 부대 내에서 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던 시절 다른 도리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무반 불침번을 서면서 오한으로 턱을 부르르 떨면서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본 이만재 이병은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상약 콘택 감기약 두 알을 살그머니 최 중사의 머리맡에 놓아두었습니다. 이튿날 밤에도 역시 두 알을 살짝 놓아두었습니다. 시간이 약간 흘러 어느 날 내무반에는 회식이 있었습니다. 최중사가 돈을 벌기 위해 월남으로 가는 송별연이 있었습니다. 최 중사는 그때 자기를 불러 옆에 앉히더니 난데없이 자기 손을 잡고 흑흑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점점 울음이 점점 커지면서 “야, 콘택 흑흑! 콘택! 흑흑”하면서 계속 울었다고 합니다. 이만재 씨는 원수에게 양약을 대접함으로 사실상 숯불을 최중사의 머리 위에 쌓아 놓은 셈이었습니다.
21 절을 봅시다. 오늘의 본문 19 절에서 21 절의 결론은 바로 맨 끝에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악을 악으로 갚는 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에게 이기는 길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악은 더 큰 악으로 보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당한 악은 더 큰 악으로 앙갚음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 충돌하여 둘다 멸망에 이릅니다. 악을 악으로 제압했다고 해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지는 길입니다. 악은 더 큰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설령 상대방을 때려 눕였다고 해도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미국이 압도적인 무력(군사력)을 사용하여 아프카니스탄을 철저히 때려 눕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이 폭력을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때부터 미국은 보나마나 철저히 패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아프카니스탄을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범이슬람국가들이 단결하게 될 것이고 미국을 저주하게 도리 것입니다. 두고두고 아프카니스탄과 이슬람 족속들은 유대인과 미국을 향해서 이를 갈고 칼을 갈게 되고 그 후손들과 그 후손의 후손들은 테러를 사용하여 두고두고 괴롭힐 것입니다. 이들은 파키스탄에 있는 핵무기를 탈취하여 세계를 3 차 대전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넓게 열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자살을 하면서 테러를 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순교자들입니다. 미국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자살을 해서 테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미국이 미사일로 공중폭격으로 아프카니스탄을 박살내면 앞으로 미국인들은 세계여행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자살테러가 끊임없이 자행될 것이고 미국시민들은 테러의 공포에 시달릴 것입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짓밟은다고 해서 테러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 큰 테러를 할 명분만 주게 됩니다. 미국은 청교도 정신의 기초에 선 국가로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번에 자신이 그동안 행한 악행을 반성하면서 테러를 할 명분을 없애고 힘으로 누르려는 대외정책을 수정하고 정의롭고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로 거듭 나는 계기로 삼는 일만이 테러를 줄어들게 할 뿐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형제간을 살펴보시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잡아서 죽이려다가 팔아 넘겼습니다. 동생 요셉은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힘이 있었기에 복수를 하려면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선대하였습니다. 창세기 50 장에 보면 요셉의 말이 나옵니다. 20 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의 자녀들의 양육까지 책임지겠다고 나섰습니다. 아마도 형들은 동생의 이 말을 듣고 자신들이 죽이려 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과 같은 뜨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느 직장에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상사는 성질이 까다롭기가 한이 없고 급하기가 말할 수 없어 그가 작은 실수만 해도 야단을 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그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 중에 똑같이 고통을 당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사를 미워하던 그 친구는 그가 상사와 화목해진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상사가 또 부당하게 야단을 쳤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분에게 은총을 주소서.” 상사가 또 괴롭혔습니다. 그는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 큰복을 내리소서” 상사는 여전히 그에게 불친절했습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상사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언젠가 상사가 크게 변화되리라 믿고 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상사는 날이 가도 해가 가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상사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쳤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상사도 변화되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싸웁니다. 서로 이기려 하고 기선을 제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주먹도 사용하고 손톱도 사용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숨도 못쉬게 때렸다 내가 그 사람을 굉장히 아프게 할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승복하고 잘못을 빌고 나설 것 같습니까? 증오심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폭력을 사용하면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증오심이 점점 더 자라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폭력으로 대항하게 됩니다. 만일 논리적으로 부부 중 상대방을 때려 눕혔다고 합시다. 논리적으로 설복당하였다고 해서 심정적으로 승복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등하려고 하면 평화가 없습니다. 어떤 부부가 남편은 안씨이고 부인은 박씨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인 안씨는 주로 집 안에서 일하고 아내인 박씨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싸움이 있을라치면 남편은 내가 안 사람이고 당신은 바깥사람이니까 내가 져야지! 하면서 먼저 지니까 항상 싸움이 없고 그러자 박씨인 아내가 안씨 남편에게 너무 잘한다고 합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이 그런 원수가 없었습니다. 바람도 피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것보다도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그것(it)이라는 비인격체로 여긴다는 것이 견딜 수 없게 했습니다. 이 인간에게 어떻게 보란 듯이 복수할 수 있을까? 그녀는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모든 복수하는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자고 있을 때 그 무엇을 짤라버린 보비트 부인의 경우도 읽었습니다. 갑자기 자식들만 데리고 해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종적을 감추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내 남편을 고발합니다” 남편 사진을 스캔하여 올리고 남편의 악행을 구구절절히 써 올리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납을 갈아 세밀한 분말을 만들어 잘 먹는 반찬에 매일 조금씩 넣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방법들은 모두 다 휴지통에 넣어버리고 최종적으로 한 방법으로 복수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남편의 머리에 숯불을 얹어 놓는 방법입니다. 그녀는 성경 로마서 12 장 20 절에서 복수의 방법을 찾아 “롬1220 Project”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남편이 밤늦게 들어와 먹을 것을 찾거든 진수성찬을 차리고 남편이 물을 찾거든 꿀물을 마시우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이 자신에게 그것(It)으로 여길 때 자신은 남편을 온전한 인격체인 당신으로 대하며 남편이 자신에게 욕을 할 때 그녀는 그런 남편을 위해 하나님께서 복과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볼 때마다 미움의 감정이 앞설 때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맘속으로 “롬1220 롬1220 롬1220”을 주문 외우듯이 외웠습니다. 그러자 차츰 그녀 마음 속에 변화가 왔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정리되면서 차츰 기쁨이 마음 속에 차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감정도 차츰 아침에 이슬방울이 사라짐과 같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런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뭔가 거북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롬1220Project를 계속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편은 아무래도 어떠해도 좋다는 자신감과 함께 자신이 점점 달라지고 그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은 다름이 아닌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최고의 선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랑의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주 인터넷에서 이런 얘기를 읽었습니다. 이번 참사가 난 뉴욕에는 허드슨 강이 있는데 그 강은 바다와 인접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강 하구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솔트 라인(Salt Line)이라고 부릅니다. 소금 선이라는 뜻입니다. 허드슨 강 하구에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Salt Line이 있는 것입니다. 종종 이곳 신문에는 "그 동안 가물어서 민물의 세력이 약해지니까 바닷물이 상류로 밀고 올라와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들을 위협하였으나, 어제 내린 많은 빗물로 민물의 세력이 강해져서 소금물을 다시 바다 쪽으로 밀어내어 안전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실린다고 합니다. 허드슨 강어귀에서는 쉴새없이 민물과 바닷물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선이 바로 "소금선"인 "솔트 라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 같습니다. 이 세계는 선과 악이 싸우는 싸움터입니다. 마치 민물과 바닷물이 솔트 라인을 전선으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강물이 안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민물의 힘이 필요합니다. 비가 와서 민물의 힘이 강해져야 바닷물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선의 힘이 강해야 합니다. 빗물이 민물의 힘을 키워주듯이 선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에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 성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은 그만큼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 죄와 악이 서로 뭉쳐 우리 가운데로 밀려오고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의 선으로 악과 죄를 이겨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들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30 배 60 배 100 배로 피의 보복과 복수를 하려고 드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들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이렇게 보배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기도>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성경의 귀한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저희로 이 땅에 살면서 악에 대하여 악으로 보복하지 않게 하시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 주셔서 사랑의 선으로 죄악의 악순환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사랑으로 굳세게 하시고 어떤 악을 악으로 갚으라는 악의 유혹에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악을 선으로 갚고 이길 때 저희에게 내밀한 기쁨을 주시어 저희가 성도로써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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