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하나님의 감동하심 > 상임이사칼럼new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하나님의 감동하심

관리자 2010-11-29 (월) 12:04 15년전 2507  

2001 년 1 월 7 일 (첫째주일)/ 오전 11 : 00 광주가나안 교회 부목사 부임예배 설교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창세기 22 장 1 절 - 18 절

제 목 : 하나님의 감동하심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가나안 교회를 섬기시는 모든 이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12 월 24 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하여 25 일 성탄절 저녁에 광주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침 광주공항은 눈이 나리고 있었습니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추위가 고국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고 비록 추웠지만 부모님의 품과 형제자매들의 사랑이 있었고 오자마자 일할 터전인 가나안교회가 있어서 추위가 결코 춥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있을 때 한국은 IMF를 맞은 그때 그 상황보다도 더 살기가 힘들다고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족한 저를 가나안 교회에서 일하게 해 주신 가나안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 오기 전 제가 담임하고 있었던 교회에서 집사로 임명한 부부의 부모님이 딸과 사위 집에 왔습니다. 특별히 장영상 권사님은 모든 것을 다섯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여호와이레” 그 분의 남편은 약 한달 전 중풍에 걸려 버클리로 왔는데 그쪽 날씨가 따뜻하니 하나님께서 날씨를 여호와이레 하셨다고 했고 버클리에 좋은 수영시설과 중풍에 걸린 환자들이 재활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자 "여호와 이레"라고 했고 한쪽 손이 마비되어 팔을 걸고 다닐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마침 아들이 팔이 부러졌을 때 남겨놓았던 슬링이 있어 드렸는데 그것도 "여호와 이레"라고 외쳤고 제가 아는 한의원에 계시는 장로님께 연결하여 정기적으로 침을 맞도록 해드렸는데 그 때에도 여호와 이레라 했고 모든 경우에 여호와 이레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이 장 영상 권사님이신데 앞으로는 장 이레 권사님이라고 이름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단지 장 권사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많은 가나안 교회 성도들을 만났고 몇몇의 교우들과는 심방을 가는 차안에서, 교회에서 얘기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어떤 분의 삶의 고백을 들어보면 마치 하나님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시면서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예비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장 권사님 만이 아니라 여기 계시는 집사님들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과 조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에 있는 장 영상 권사님만이 아니라 가나안교회의 집사님들만이 아니라 저 역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 송년주일에 저는 가나안 식구들이 함께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신명이 나는 교회에서 일하게 되어 너무도 좋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부목사인 저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썩 훌륭한 목자가 아닐지는 몰라도 저에게 여러분 가나안 교회 성도들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준비해 주신 분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인 창세기 22 장의 상황과 현실로 깊이 들어가십시다.  

어느 맑은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2 장 1 절을 읽어봅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했을까? 심심하셔서? 심심하셔서 하셨다면 그 시험의 내용이 너무도 가혹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전후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질투가 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살에 얻은 아들, 그 아들을 자신이 주었는데 아브라함이 너무도 이삭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이 샘이 나신 것입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나보다도 이삭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원래 질투를 잘하시는 분이 오기가 발동하신 것입니다. 자신보다도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곧 그것을 우상이라 여기시고 질투가 불이 되어 이글거리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100세에 얻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품에 안고 “어화둥둥 내 사랑”하면서 너무도 좋아하자 “나를 더 사랑하는가?” “아들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 시험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어느 쾌청한 날 아브라함을 불러 명령하셨습니다. 22 장 2 절 딱 한 절에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로 드려야 하는 이유는 여차여차하다고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딱 한마디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러시지! 살진 송아지 한 100 마리를 바치라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는데 그리고 이해가 가겠는데 왜 하필이면 사람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까? 하나님이 지금 제 정신이실까? 남의 집 가정파괴할 일이 있으실까? 아시다시피 번제란 깨끗하고 흠없는, 적어도 7일된 짐승인 양과 염소 및 수소가 제물이 되어 '여호와의 면전에서' 도살되었는데, 이때 머리부분이 완전히 절단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담아놓은 피를 제단 아래 맞은편에서 쏟는 동안 짐승은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분리되며, 이것을 몇 토막으로 나누어 깨끗이 씻은 내장 및 정강이와 함께 제단 위에서 불태워집니다. 제물을 쪼개어 불살라 바치는 것인데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목을 자르고 토막을 내어 피를 쏟고 그것을 제단에 놓고 불살라 번제로 바치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몰상식적이고 반생명적이요, 반이성적이요 반합리적입니다. 어떻게 생명의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한 명령을 내리실까? 지난 주에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옛날 청년이었었는데 벌써 결혼을 해서 운전을 하고 가는데 그 어머니인 우리 교회 모 집사님께서 뒷 좌석에 짜부러져서 기분이 무척 좋은 모습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차에 손녀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집에 차를 타고 뒷좌석에 짜부러져셔 가면서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을까? 내 새끼들이 벌써 운전해서 나를 데리고 가다니! 내 새끼들이 벌써 또 새끼를 낳아 내 품에 안겨주다니! 우리 자식들이 정말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 사랑스런 착한 아이를 그것도 독자밖에 없는데 그것도 100 세에 얻은 아들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딱 한마디하셨지만 그냥 딱 한마디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마른 하늘에 벼락을 내려치는 것보다도 몇 만배 몇 십만배 더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제 수명을 다한 늙은 나의 생명을 차라리 데려가시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저 어린 생명을 번제로 바치시기를 원하실까? 아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듣자마자 아마 엄청난 디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디스트레스는 우선 뇌로 충격으로 가서 뇌출혈을 일으키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킬 만큼 강력했을 것이고 그 다음 심장으로 가서 심장마비 직전으로 가고 그 다음 위장으로 가서 소화기능을 마비시킬 만큼의 충격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을 넘게 살아와 온갖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지만 이렇게 최악의 상황은 이제껏 결코 겪어보지 못한 유례없는 것이었습니다. 눈에도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번제 그대로 목을 베고 칼로 쪼개어 불에다 살라 바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대들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니! 하나님 주실 때는 언제고 왜 이제서야 빼앗아 갈려고 하십니까? 세상에 어찌 그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까? 어떤 사람은 마누라가 죽고 자식이 죽자 하늘을 향해 이제부터는 하나님 없어! 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잠이 오겠습니까? 바로 그 명령을 들은 그때부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불면의 숱한 밤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한 구절도 아브라함의 심적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충분히 아브라함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그 행간에서 읽을 수 있고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압도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오늘 본문 3 절을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눈물 없이는 못가는 피어린 육백리였습니다. 아브라함 마음 속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왔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준행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들도 수없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따져봐야겠다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 마음을 다시금 정리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 이시오 데려가신 자도 여호와이시니 다만 그에게 순종할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오롯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그 방법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아 산에서 막 이삭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본문 9 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허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샇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다급히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감화감동의 물결이 밀려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바치려 할 때 어디 다른데 가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치려 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모든 사태를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감동과 비슷한 관련된 단어를 아십니까? 감화, 감동, 감격, 감읍, 감탄, 감루입니다. 감읍과 감루는 감동하여 울었을 때를 감읍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이삭을 아낌없이 바치려 했을 때 아마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감격하여 눈물이 빗물되어 말없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내가 만든 피조물이고 내가 택하여 불러냈지만 세상에 이런 믿음과 순종은 정말 처음이구나!! 하나님의 그 너른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감격의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고 아마 그때 하나님의 가슴의 포구에는 감화감동의 폭풍우가 세차게 때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군천사들로 아마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로 그토록 감동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현장을 처음 목격했을 것이고 그들 역시 감동의 울림이 세차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은 곧 바로 직통으로 여호와 이레로 이어졌습니다. 

이 극적 드라마를 말없이 지켜보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브라함이 이쁘고 사랑스러웠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을 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천사를 시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이는 하나님의 감동의 물결의 첫 파도가 여호와 이레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천사를 시켜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았고 번제의 정통 코스인 수양을 준비하여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수양 하나만을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찬 감동은 15 절에서 18 절의 축복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15 절에서 18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여 아브라함을 얼만큼 복을 내리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의 감동은 아브라함이 생을 최고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 여호와 이레, 준비해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창고에는 불경기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창고는 IMF 따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창고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주어도 아브라함에게는 아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로 엄청난 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별을 셀 수 있습니까? 바다의 모래알의 수를 셀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헤일 수 없는 숱한 축복을 한꺼번에 단번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또한 세대와 세대를 거쳐 주신 것입니다. 은총의 단비가 아닙니다. 은총의 가랑비가 아닙니다. 호우주의보를 내릴 만큼 은총의 소낙비와 장마비로 왕창 내려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감동하심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축복 곧 여호와의 이레로 연결됩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이 땅에서의 삶에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늘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아브라함이 하늘에서도 그 품이 언급될 만큼 큰 영향력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도 기록되어 길이길이 수천억의 인류에게 대대로 전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드라마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어지고 여호와 감동은 다시 여호와 이레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이 오늘 본문 창세기 22 장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습니까?  

첫째,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고 있고 성경을 따르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옛날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국민교육헌장을 죽어라고 외웠습니다. 아직도 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조상에게도 얼이 빠진 분이 있고 빛난 얼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감동시킨 아브라함의 믿음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드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감동시켰듯이 여러분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브라함의 철저한 믿음의 순종에서 온 것이 아닙니까? 자식을 바치라 했을 때도 비록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고 반생명적이라 몰상식적이라 생각했을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합치시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딱 한번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딱 한번입니다. 한번 하는 것 기왕이면 좀 멋지게 drama 보다도 더 dramatic 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좀 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각인이 되고 기억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감동하면 그 가슴속에 어떤 뜨거운 것이 이리저리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의 가슴속에 확 불을 당기는 것 같이 울컥 그 뜨거운 것이 하나님 가슴을 돌아 다니게 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한번 여한없이 오지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 해 12 월 27 일 저는 한국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려고 서부경찰서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 오라고 해서 길 건너에 있는 사진관에 갔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주인이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려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탁자에 성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물어 보았더니 “예, 저쪽에 있는 서문교회 다니는데요 좋은 교인은 못되구요! 그냥 왔다리 갔다리만 해라우!” 제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한 4 일 있으면 2001 년인데 사진 일을 하시니까 이왕이면 신앙생활 하실 때 하나님의 눈에 찍혀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필름이 인화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나안 교회에도 일천번제를 드리는 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솔로몬은 신령과 진정으로 일천번제를 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깊게 감동시켰습니다. 감화감동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백지수표를 주면서 거기다가 니맘대로 한번 써봐라는 은혜로운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다가 지혜를 써넣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고 또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지혜뿐만 아니라 청구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왕창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닌 얘기를 여러분에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교 시절 허영길이라는 4 학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코미디언 보다도 30 배 60 배 100 배 더 웃기는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4 월 축제 때 이 선배가 원맨 쇼를 했는데 당시 교수이셨던 김정준 목사님이 손으로 배를 잡고 무대에 올라와 마이크를 뺏아 버렸습니다. 왜냐? 더 이상 웃으면 허리가 끊어져서 죽을까봐 그랬습니다. 신학교 오기 전에는 술집이나 밤무대에 가면 그 선배는 무조건 공짜였다고 합니다. 환장하게 웃기니까!! 이 선배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교수들이 물었습니다. “너 왜 신학교 왔느냐?” 물었습니다 . 그러자 허 선배는 “사람들을 웃기는 일은 더 이상 흥미가 없다. 이제 하나님을 한번 웃겨 보고 싶다“. 이번 주일은 2001 년 첫 주일입니다. 21 세기가 되는 첫 주일입니다. 가나안 교회 성도 여러분! 새로운 세기에는 뭔가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왕 이 땅에서 한 번 신앙생활 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왕 이 땅에서 한번 사는 것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릴 정도로 멋진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저 적당히 교회나 왔다리 갔다리 하고 적당히 구원받는 것이나 챙겨서 간신히 천국문에 턱걸이 하기 보다는 하나님 마음 한 중심부에 선명하게 작품사진과 같은 필름으로 확 찍혀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옆에도 베델교회가 있지만 제가 미국에서 개척한 교회 옆에도 베델교회가 있었습니다. 베델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죠. 그 교회에 김 은호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지방 신문에 나왔습니다. 10 년 동안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삼일밤 예배, 새벽기도회, 임원회의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 출석하여 그 교회 역사기록의 기네스 북에 오를만큼 남아 목사님이 그 장로님을 위해 특별 감사예배를 드려 교포사회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장로님의 10 년 개근신앙을 한번 설교 시간에 소개해 드렸더니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인 한인제일감리교회의 양 봉우 장로가 어떤 오기가 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누라인 조내복 권사와 주일을 끼고 LA로 빨간마후라 목에 두르고 골프채 들고 놀러가려던 계획을 그 즉시 취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목사님! 저도 우리 제일교회가 창립한 1998년 9 월 30일부터 한번도 집회에 빠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세탁소를 하니까 지금까지 주일을 정기적으로 지킬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베델교회 그 장로님의 기록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 분의 전매특허가 목사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 그 분은 제가 한국으로 갈 때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나왔습니다만 제가 아는 그 분의 옹고집은 앞으로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갈 때까지 개근신앙으로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컴퓨터 산업을 하던 어떤 분이 어떤 분이 십일조 생활을 열심히 했더니 진짜로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그의 곳간을 채워주셨습니다. 그가 회사로부터 받은 stock option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가차없이 십일조 신앙을 버렸습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소득의 십일조로만 해도 충분히 살수 있으니 십의 일조는 내가 먹고 하나님께 십의 구조를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한두 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 가나안 교회 결코 적지 않은 성도들과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를 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나름데로 주님의 사랑하는 오롯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믿음과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차안에서 걸어온 story를 들으면 아멘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멀리 심방을 가는 길에서 진한 감동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되셔서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우리 성도들을 따라다니시면서 축복해 주시는 이야기 역시 듣게 되면서 다시 한번 여호와의 감동은 여화와 이레로 직통으로 연결되는 구나를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 무척 어려운 일이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아브라함과 같이 자식을 바쳐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한마디 잘 한 때도 마음을 감동케 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 장에 나오는 강도는 죽어가는 단 한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39절과 43 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감동시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다시 말하면 하늘을 예비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일은 무척 어렵거나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저와 제 가족은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김 원석 목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차고 있는 이 시계는 김 목사님이 결혼할 때 예물로 받은 시계입니다. 목사님이 사모님과 동의를 받아 저에게 주면서 김 목사님은 제가 시계를 한 번 볼 때마다 자기를 생각할 것이라 했습니다. 수 차례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돌려주면 의절을 할 것같이 말해서 그냥 차고 있습니다. 저는 시계를 볼 때마다 김 목사님의 모습이 떠릅니다. 김 목사님은 항상 “좋은 아내는 좋은 남편이 만든다”는 持論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김 목사님의 사모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 가서 앉았는데 화장실 문 앞에 자기 눈 높이에 카드가 하나 붙어 있어서 열어 보았더니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일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김 목사님의 글이 담긴 자상하게 적은 생일축하카드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화장실에 가는 아내를 생각하고 좌변기 앉는 바로 그 자리에 커다란 음악생일축하카드를 부쳐 놓은 것입니다. 사모님은 화장실에서 감동의 물결로 울렁거렸습니다. 여러분!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이 힘듭니까? 여러분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드를 사는 것이 어렵습니까? 카드에 몇자 쓰는 것이 힘듭니까? 그것을 아내의 생일 하루 전에 화장실 안쪽 문 아내의 눈높이 쯤에 붙여 놓는 것이 힘듭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쪼끄만 것들이 김 목사님의 사모님을 엄청나게 감동시켜 사모님이 김 목사님께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노래하면서 좋은 아내가 되었고 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 엄청나게 힘듭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내의 생일이 음력이라는 핑계로 그냥 건너 뛰어 넘어가는 햇수가 많아서 저 같은 사람은 나이 들어서 절대 따뜻한 밥 못 먹습니다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조그마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21 세기에는 좀 달리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여러분 이제 새로운 세기가 왔으니 21 세기를 21 세기인 답게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20 세기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감화감동시키셨지만 이제 21 세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화감동시키는 그런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0 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잔에 은혜의 포도주로 가득 넘치게 부어주셨지만 이제 21 세기에는 주님의 잔에 나의 사랑과 충성의 잔을 따라 드리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0 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웃게 하셨지만 이제 21 세기에는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드리면서 살까를 부단히 찾으면서 거기에 초점을 맞추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께서 즐겨 보시는 잔잔하지만 그러나 진한 감동의 드라마로 만들어 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덤으로 여러분의 삶이 아브라함이 만났던, 또한 장 이레 권사님이 만났던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일상생활 속에서 늘 만나는 그런 축복이 여러분의 삶이 가득 채워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세기 동안에 저희를 말할 수 없이 축복하심으로 저희 마음에 감화감동을 주셨습니다. 주님 이제 저희 차례입니다. 이제 새로 허락하신 새로운 21 세기에는 주님의 마음을 깊게 감동시키는 사람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격케 하는 성도로 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 모두를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삶이 주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 가나안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너른 품에 안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