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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1 題 - 생명의 값어치

관리자 2010-10-18 (월) 22:45 15년전 2425  
 

2001 년 11 월 4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마태복음 16 장 26 절

제      목 : 생명 1 題 - 생명의 값어치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 약동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말씀을 집중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숨이 무엇일까? 목숨은 그대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말에서는 목숨이라고 할까? 목숨은 순 우리말입니다. 이 시간 한번 목을 한번 만져 봅시다. 목을 통해서 뭐가 왔다갔다합니까? 그렇습니다. 호흡이 왔다 갔다 합니다. 목을 통해서 들여 쉬는 들숨과 내쉬는 날숨이 출입을 합니다. 만일 목을 통해 숨이 왔다갔다하지 않으면 바로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망의 판정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코에서 숨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것을 깨달아 “아하! 목에서 숨이 멈춰지면 그대로 생명이 끝나는구나!” 하여 생명을 말할 때 목숨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목에서 숨이 끊어지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며 목에 숨이 있을 때 사람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목숨이라고 말할 때 제 목숨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목숨이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목숨 앞에 제 자를 붙인 것은 자기 목숨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마다 스페어 타이어가 있습니다. 빵꾸나면 갈아끼우면 됩니다. 그러나 목숨에는 예비 타이어가 없습니다. 한 개가 끝나면 다른 한 개로 대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목숨이 있습니다만 제 목숨, 자기 목숨은 유일무이합니다. 한 개 밖에 없습니다. 목숨이 한 세 개쯤 있다면 한번은 연습삼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대충 적당히 살고 또 한번은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그리고 지금까지 두 번의 목숨을 경험 삼아 세 번째 목숨은 끝내주게 잘 살 수 있을 터인데 아쉽게도 인생은 일생입니다. 시 한 수를 감상해 봅시다. “누가 죽어가나 보다/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반만 뜬 채/이 저녁/누가 죽어가나 보다/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그 누가 죽어가나 보다/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정녕코 오늘 저녁은/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이 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중 한 분이신 김춘수 선생이 어느 가을 저녁에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떠오르는 상념을 노래한 것인데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이 세상 그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생명이 딱 하나임을 애절하게 노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셨는데 여기서 온 천하란 무슨 뜻입니까? 천하란 글자 그대로 하늘아래란 말입니다. 천하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천하를 얻는다함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얻는다 즉 하늘 아래 있는 권력과 부귀와 영화를 다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온 천하를 얻는다”는 ”이 세상 모든 동산이 내 것이어 내 이름으로 은행에 보관 혹은 저축되어 있고 이 세상 모든 부동산이 등기부 등본에 내 소유로 등기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온 지구에 있는 토지와 건물과 푸른 산과 강과 바다와 그 모든 것이 내 명의의 재산으로 잡혀 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얼마전 한 언론사가 우리나라 서해안 조그마한 지역에 있는 갯뻘이 지닌 생태학적 가치가 얼마나 될까 따져 보았더니 거의 567 억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갯뻘 하나도 그런데 우리나라의 모든 부동산과 재산의 가치를 다 산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미화로 한 1000 조 달러 정도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포함하여 돈으로 값어치를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온 천하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 우주가 됩니다만 온 우주라고 하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와 은하계와 그 모든 수천억계의 은하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주 하나님 지으신 온 세계입니다. 즉 온 천하를 얻고도는 ”온 우주를 얻는다 해도” 마찬가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 목숨과 그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천하를 바꾸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반문하셨습니다. 여기서 바꾼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옛날 돈이 없었던 물물교환시대에는 같은 값어치가 있는 것끼리 바꾸었습니다. 호랑이 가죽 한 장과 소금 열두 가마니와 바꾸었고 쌀 한말과 산토끼 두 마리와 바꾸었습니다. 비단 네 필 반과 말 한 필을 바꾸었습니다. 무엇을 바꿀 때는 같은 값어치끼리 바꾸게 됩니다. 등가교환이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영박물관 관장이었던 필립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온 천하를 다 준다 하여도 대영박물관과는 바꾸지 않겠지만 만일 사도 바울이 쓴 친필 로마서 1 장이라도 있다면 이 박물관과 바꾸겠다” 이같이 값어치 있는 것은 값어치있는 것과 함께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천하를 준다해도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부동산과 동산인 경제적인 총 재산과 권력과 부귀와 영화의와 같은 정치사회적인 재산을 다 합하여 나에게 고스란히 넘겨 준다하여도 그것들을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의 질문 속에는 이미 대답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대답입니까? 질문은 바꾸겠느냐인데 대답은 안 바꾼다 못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자기 목숨이기 때문에 등가교환이 안되기 때문에 즉 손해를 보기 때문에 결코 안 바꾼다는 답이 이미 질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온 천하를 자신의 목숨과 바꿀만할까?” 자!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내 경우에 적용해 보십시다. 어느 맑고 화창하고 좋은 날 어떤 마음씨 좋게 생긴 재벌영감님이 빅 딜을 제의해 왔습니다. 그 영감님은 심장의 판막에 이상이 생겼는데 시한부 생명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더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재벌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의학자료상에 의하면 당신의 심장 판막의 구조가 나하고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1500 억원을 현금으로 당신 구좌에 넣어줄 터이니 심장 딱 한 개만 떼어줄 수 있느냐고 하면 그 계약서에 도장을 꾹 눌러 줄 수 있겠습니까? 심장은 한 개뿐임을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즉각 안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가 위장에 문제가 생겨 300 억을 줄 터이니 당신의 위장을 5 분의 4 만 잘라서 달라고 하면 나머지 5 분의 1 로만 먹고살면 될 터이니까 앞으로 밥은 평소 먹던 것의 20 %만 조금씩 먹기로 하고 떼어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매혹적인 제의를 합니다. 당신이 손으로 열심히 일하면 그 손으로 하루 한 시간에 3000 원을 벌기도 하고 잘하면 5000 원까지 벌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오른 손목을 한 개에 35 억 왼쪽 손목을 한 개에 25 억 도합 50 억을 줄 터이니 즉 다시 말하자면 두 손으로 10 만 시간을 일할 분량을 한꺼번에 줄 터이니 두 손목을 잘라주라고 하면 줄 수 있겠습니까? 한 눈에 200 억씩 400 억을 줄 터이니 두 눈을 다 날 떼어주고 당신은 비록 눈을 보이지 않지만 그  400 억을 가지고 편히 잘 먹고 잘 살라고 한다면 선뜻 400 억에 도장을 찍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가져가 바쳐도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목숨이란 꼭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목숨이란 몸과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한 시간이 다가오면 목숨은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 시간을 가지고 거래를 해 왔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거의 대부분 4-50 대 이상입니다. 사람의 평균수명을 70 이나 80 사이라고 볼 때 어떤 분은 많이 남으면 3-40 년 어떤 분은 2-30 년 더 사실 수 있습니다. 만약 첨단과학이 발전하여 생명의 시간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시다. 바로 그때 어떤 돈 많은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이 지금 65 살이니까 여러 가지 의학상 수치로 보면 일반적으로 당신의 생명이 한 15 년 남았는데 당신의 생명의 수한을 10 년만 사자! 하루에 당신 일당을 하루 50 만원으로 후히 쳐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50 만원 곱하기 365 일 곱하기 10년 하니까 1825,000,000 원을 주겠다고 하면 선뜻 그럽시다! 하면서 여러분의 남은 인생 중 10 년을 넘겨주고 5 년만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래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노재벌이 3 년 후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때는 당신의 인생수한이 법정 연령에서 이제 12 년 남아 있는 시점이라 가정해 봅시다. 그는 저번에 당신의 시간을 너무 싸구려로 취급하여 미안했다고 하면서 당신 인생의 10 년을 주면 하루 일당을 1000 만원씩 그 전보다 20 배로 얹어 주겠다고 하면서 이제 그 사람에게 10 년을 줘버리고 난 다음 남은 2 년 시한부 인생을 남겨 놓고 마음껏 쓰기 위하여 365 억을 냉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목숨을, 목숨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몸을 이 세상의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에 대한 정곡을 찌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만일 우리나라의 재산적 가치를 9000 조 달러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통째로 준다고 해도 그 9000 조 달러와 안바꿉니다. 이 시간 9000 조 달러 훨씬 이상가는 여러분의 몸을 가만히 한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은행에 들어 있는 돈만, 값나가는 보석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내 눈 하나가 하나에 조세형이 훔친 5 천만원한다는 물방울 다이어 수백개 수천개하고도 바꿀 수 없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말도 없이 조용히 뛰고 있는 심장,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저울에 달아보아도 불과 몇 백 그램도 되지 않은 심장 하나가 나에게 수천억 달러보다도 더 귀한 것을 내 속에 지니고 산다는 사실에 감동해 보셨습니까? 한 시간에 잘하면 3 천원 혹은 5 천원씩 버는 내 양손이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지체라는 것을 계산기로 그 가치를 한번이라도 콕콕 찍어 따져 보셨습니까? 비록 조그마한 17 평, 25 평 주공아파트에 살지만 내 생명 하나는 온 지구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단 한번이라도 상념에 잠겨 보셨습니까?


내 자신이 내 생명에 대해서 따지는 값어치는 천하보다도 더 귀하게 여깁니다만 과연 다른 사람도 내 생명의 값어치를 그렇게 귀하게 여길까?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반적 생명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사람의 생명의 값어치를 판정해주는 객관적인 토대는 보통 생명보험회사에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한 생명의 값어치를 산정함에 있어 그의 나이, 경력, 지위, 자격증, 건강정도 이런 모든 것을 철저히 분석하여 적당한 값을 정하고 있습니다. 보험회사에 가면 그 규정에 나름데로 생명에 대한 값어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젊고 팔팔하고 질병이 없으면 금값 나이가 들고 질병이 있으면 은값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명에 대한 값어치에 대한 산정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생명의 값어치를 내가 생각하는 만큼 값어치있게 여겨주지 않습니다. 이번 테러로 숨진 사람들 특히 쌍둥이 무역센타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회사에 따라 적은 사람은 12 만 달러(1 억 4 천만원)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최고 150 만 달러(10 억 8천만원)의 보험금을 지급 받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값이 나름데로 돈으로 평가환산된 것입니다. 오늘날에 생명의 값은 날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그에 대한 보복전쟁은 사실상 생명을 담보로 하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나 더 큰 국가라는 폭력으로 테러하는 미국의 부시는 사람의 목숨 해치는 것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목숨을 죽이려고 눈이 벌개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값없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항공기 자살 테러나 비행기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천하보다 귀한 어린 생명을 살상하는 이들은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고 지옥에도 가장 뜨거운 불에 던져질 것이며 그들의 생명 역시 우습게 취급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 가운데 둘러 쌓인 살려고 하는 생명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세상의 적당한 값으로 산정하고 생명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파리목숨으로 생각하는 오늘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명의 값어치를 어느 정도 따져 주실까? 옷을 사면 옷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45000 원” 이 땅에 오신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생명과 목숨에 대해 얼만큼의 가격표를 붙여주실까?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온 천하하고도 자기 목숨과는 결코 바꾸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실 수 있을까? 아마도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공생애 기간이셨으니 춘추가 31 세에서 33 세 정도 잡수셨을 것입니다. 야! 내가 10 년만 젊었으면 팔팔 날아다닐텐데! 그런 말을 합니다만 당시 예수님의 춘추가 저보다 딱 10 년 정도 아랫니십니다. 팔팔 날아다니실 때인 것입니다. 공자에 의하면 30 세는 而立의 나이입니다. 모든 것을 한참 세울 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팔팔한 젊음을 천하에 있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분명히 예수님의 마음 속에서도 “누가 온 천하를 준다고 하면서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내가 선뜻 넘겨줄까? 그럴 수 없지!”하는 자문자답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평소의 상념이 그런 교훈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목숨이란 자신에게도 소중하고 예수님에게도 소중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질문은 결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다른 것과 바꾸셨습니다. 제 목숨과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하신 분이 자신의 목숨을 그 무엇과 바꾸셨습니다.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 장 28 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이란 일종의 등가교환입니다. 양이나 소같이 생명 있는 것을 피채로 바쳐 대신 자신의 죄를 속하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피와 살을 바쳐,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남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이것이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로마서 5 장 7 절 - 8 절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주시고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천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신 바로 그 자신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바꾸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목숨을 천하보다도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다시말 하자면 등가교환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목숨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으니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속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을 생각하실 때 그저 우주 수억의 별 중에 있는 태양이라는 행성 옆에 있는 보조 위성 지구라는 곳의 지극히 먼지보다도 더 적은 하나의 점과 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여러분의 값어치를 따지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맘만 먹으면 인간 정도야 그저 한순간에 존재를 쓸어버리고 사멸시켜 버리는 그런 존재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를 천하보다 더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천하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과 바꾼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목숨을 천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 우리 생명을 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천하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아니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 장은 바로 이 사랑을 증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때로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지만 하나님에게서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주어 바꿀 만큼 온 천하보다도 30 배 60 배 100 배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천하보다 더 훨씬 귀한 존재인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도 훨씬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귀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찬송가 353 장은 하나님의 이 사랑과 예수님의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작사한 찬송입니다. 찬송가 353 장은 우리에게 바로 그 사랑을 주시고 그 은혜를 주신 예수님께 우리도 함께 들려야 할 찬송입니다. 1.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내 주 앞에 이 적은 것 다 드리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 2. 주 날 위해 보배로운 피흘리사 그 귀하신 생명까지 다 주시니 내 천한 몸 이 생명을 왜 아끼랴 3. 주 예수께 빚진 것이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4. 날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사 주 예수의 은혜로서 인치시고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5. 주 날 위해 그 귀하신 몸 버리사 이 내 몸을 피값으로 사셨으니 내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다 아멘


기도>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를 사랑하시되 주님 자신을 사랑하심보다도 훨씬 더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사랑하시되 그 귀하신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온 천하보다 더 저희를 귀하게 여기시어 십자가에서 저희를 대속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를 위해 생명을 주셨으니 저희 역시 주님께 삶을 바치며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예수님 그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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