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12 월 16 일(주일) 오후 7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밤예배
성경본문 : 누가복음 2 장 36 절 - 38 절
제 목 :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어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주님을 기다리는 가나안 성도들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대림절 셋째주일에는 할머니 한 분의 삶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 할머니는 예수님의 오심을 절실히 기다리신 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 년 전의 팔레스틴으로 시대와 장소를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렸던 안나라고 하는 할머니의 삶에 가까이 가봄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를 배워봅시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할머니 이름은 안나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 할머니가 어떤 분이신가? 36 절을 봅시다. “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고 합니다. 얼마나 나이가 들었으면 성경이 “매우 늙었더라”고 하였겠습니까? 오늘 본문 36 절 후반절과 37 절 전반절을 읽어보면 대충 추측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팔십사년이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보통 이스라엘 처녀가 출가하는 나이가 열네살 열세살이었습니다. 그러면 열네살에 결혼하였다고 치고 일곱해 동안 남편과 살았으니 일곱을 더하고 과부된지 팔십 사년을 살았으니까 안나 선지자의 추정나이는 14 살에 결혼하였을 경우는 104 세, 15 살에 결혼하였을 경우는 105 세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의약품과 의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백세를 사신다고 하는 것은 무척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2000 년 전으로 평균수명도 짧고 의약품도 없는 그 때에 105 세를 살고 계심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매우 늙었기 때문에 맨날 이부자리를 덮고 누워서 죽을 날만 바라보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37 절을 보십시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 선지자는 105 세의 연세에도 한 치의 그 삶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성전에 나와서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보통 연만한 나이가 되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모든 것이 귀찮아 지는 법인데 그런데 그 연세인 105 살에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보통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는 무슨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안나 할머니로 하여금 매우 연만한 나이에도 눈을 감지 못하고 그 나이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도 주야로 금식을 하면서 집요하게 끈질기게 하나님께 매어 달린 것이었을까? 오늘 성경 누가복음에는 안나 할머니의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다고 단 한 줄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38 절에 보면 안나의 기도제목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바로 여기에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구속됨”이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성도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였습니다. 헤일 수 없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로마제국의 군홧발에 의해 뭉개졌습니다. 당시 역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식민치하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한편으로는 투쟁을 하다가 죽고 한편으로는 배고픔으로 고통당하고 한편으로는 종교지도자들이 부과한 과도한 율법의 의무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고통이 더해지고 어두움이 더해질수록 빛에 대한 소망이 간절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비탄과 고통을 없애주시고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시는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청년들이 독립투쟁을 하다가 잡혀서 죽고, 민중들은 로마제국이 부과한 세금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는데 여기에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율법을 쥐어짜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바로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 그들은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믿음으로 빛되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곳에 희망을 두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시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요한복음 4 장 25 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즉 메시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캄캄한 이스라엘에 빛을 던져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밤낮으로 금식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한 내용은 현재 자기가 105 세인데 120 세까지 건강하고 튼튼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84 년 동안 과부로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의지하고 살만한 괜찮은 영감님 하나 보내주십사 하는 그런 개인적인 기도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흑암 속에 앉아 있는 이 민족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달라고 그토록 치열하게 한치도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신명을 다바쳐 기도한 것입니다. 105 세가 넘도록 까지 그는 한결같은 소망을 위에다 두고 하나님께서 이 비탄과 고통의 땅을 해결해주실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주십사!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언제부터 그 기도를 시작하였을까? 아마도 14 살에 결혼을 하고 일곱 해 동안 남편과 살다가 사별을 하였으니 안나의 나이 스물 한 살이나 스무 살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나의 남편도 아무리 나이가 많아야 21 살에서 27 살 정도의 한참 팔팔한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나의 젊은 남편이 왜 세상을 떠났을까? 그 젊은이가 갑자기 무슨 병을 얻어 죽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안나의 남편이 왜 일찍 죽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주후 1 세기의 역사가 요셉푸스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 의해 한꺼번에 2000 명이나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나 할머니가 살던 때 당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갈릴리에 살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해방투쟁을 일으켰다가 수도 없이 죽었고 생포된 사람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때 로마군단의 막강한 군단들은 젊은 갈릴리 지역의 청년들을 잡아서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제 신학교 2 년 후배 류동운 군도 20 살의 꽃다운 나이로 1980 년 때 죽었습니다. 사망원인은 광주시민군으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만 당시 유대의 젊은 사람이 사망했다면 사망의 원인은 거의 다 해방독립투쟁을 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아마도 안나의 남편도 이 해방투쟁에 가담하였다가 전사했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갈릴리 전사들의 목표는 로마제국을 유대 땅에서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聖都 예루살렘을 속량하고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안나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성전에 드나들면서 그녀 역시 예루살렘의 해방과 속량을 바라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예루살렘의 구속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나 할머니는 지나간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은 이 세상의 칼이나 군사력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해방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때만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남편은 “오직 힘이다 무력을 통해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자! 聖都 예루살렘을 회복하자!”고 하면서 투쟁에 나서다가 죽었지만 안나는 깊은 믿음 가운데 사람들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한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야를 보내주실 때만이 이스라엘의 구속과 속량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오직 하나님께만 그토록 매달린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안나가 과부된 이후부터 84 년 동안 줄곧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한 이유였습니다. 이 기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라디아서 6 장 9 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안나 할머니가 금식하며 낙심하지 아니하고 84 년 이상을 꾸준히 기도한 결과 그 기도의 선은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안나 할머니의 간절하고도 끈질기고도 집요한 기도는 응답되었고 기도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누가복음은 안나 할머니의 기도가 마침내 이루어짐을 짧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나온 한 부부가 안고 나온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안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안고 성전에 나아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안나에게 계시하여 주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기로 오신 메시야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뛸 듯이 기뻐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올렸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가 구역예배에서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 당신 앞에 오신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어떤 분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한번도 상상을 할 수 없어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나 할머니에게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이 자기 눈앞에 바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거의 2 세기에 걸쳐 105 년을 살아오면서 안나에게 그런 기쁨은 처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는 그 때 그 순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조지 뮬러 목사님은 자기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고 마쳤을 때 벨소리가 띵똥하고 나더니 어떤 빵을 판매하는 업자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차가 고장이 났다고 하면서 그 안에는 있는 빵 전부를 고아원에 기증하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그때 기도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그 빵을 만져보면서 새삼 느꼈다고 합니다. <우리 연변에서는> 이런 응답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그토록 기도했는데 105 세 되는 자기에게 메시야를 보게 하시고 아기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면서 안나 할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감격으로 넘쳤겠습니까? 그때 그 울렁거렸던 가슴은 아마도 남편을 처음 만나 신방에 들어갔을 때보다도 30배 60 배 100 배 더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기쁨의 눈물이 소매와 치마를 흥건히 적셨을 것입니다. 안나 할머니는 하나님께 감사만 하고 그치지 않았습니다. 38 절에 봅시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하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심을 감사드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전했다 그 말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다 전할 소식은 메시야 오셨네” 이렇게 찬송을 부르며 전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 할머니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을 때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나 선지자의 삶은 성전과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성전을 떠난 삶이란 안나에게 상상을 할 수 가 없습니다. 37 절을 보십시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안나는 성전중심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안나 할머니가 성전을 떠나지 않은 것은 성전을 그토록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성전을 그토록 사랑하여 성전에서 금식하고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으며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성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안나는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성전이 중심이었습니다. 성전 중심에다가 자신의 삶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메시야 구세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는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그곳을 중심으로 하고 열두지파의 진영이 그 법궤를 감싸고 돌 듯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온 관심은 자기 가문중심도 아니었고 자기 지파 중심도 아니었으며 오직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장막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졌듯이 안나의 살밍 그러했습니다. 여러분!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삶 속에 영적인 사건이 생기고 성전을 가까이 하는 삶 속에서 축복의 사건이 생기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실 때는 성전에서 행하십니다. 성전에서 주 하나님의 크신 인자를 힘입게 되고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나타나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우치게 되며 성전 미문 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일어나며 성전에서 구원받음을 확신하고 성전에서 놀라운 이적을 보며 성전에서 승리를 체험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 하박국 2 장 20 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시기에 하나님은 성전에서 대사를 행하시고 성전에서 메시야를 보여 주시며 성전에서 큰 은혜를 체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보통 집사들은 집사라고 부르고 장로는 장로라고 부르지만 집사나 장로가 아닌 믿는 무리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집사나 장로나 목사나 다 일차적으로는 다 성도들입니다.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성도들은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삶이었듯이 안나 선지자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살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성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성전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맺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가나안 성전이 비록 겉보기에는 초라하고 규모도 적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바로 이 성전에서 나아와서 수많은 성도들이 받은 체험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을 깨달으며 주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다 적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은 성전에서 설교를 듣다가 설교에서 나온 502 장이 나오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입찰할 때 502 번을 적어 5 억 5 천만원의 공사에 입찰되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사건이 생깁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안나 할머니와 같이 성전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갔듯이 성전을 가까이 하고 성전중심으로 생활을 할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신비한 은혜의 체험과 신비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사랑하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와 금식과 봉사를 하다가 구원의 주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 장 37 절에 봅시다.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성전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안나는 그저 성전 안에서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나는 성전에서 섬겼습니다. 무엇으로 섬겼느냐? 기도로 섬겼습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성전을 섬기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메시야를 만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보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도들입니다. 성전에서 금식하고 기도할 때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전을 가까이 하고 성전에서 금식하고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삶의 놀라운 체험을 하고 그 인생과 그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된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비록 이 가나안 성전이 가난하게 보이고 초라하게 보이지만 이 성전에 나와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게 풍성하게 아름답게 이모저모로 응답해주셨던 간증할 얘기들이 그 어떤 두꺼운 공책으로도 다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여기 계신 분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제단을 섬긴 지 일년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성전에서 어떤 특별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아온 성도들을 위해 안수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이루어주셨던 일들이 참으로 적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안나 할머니가 104 세를 튼튼하게 사시면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사신 것도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은총의 선물로 주신 이 가나안 성전과 더욱 가까이 하시고 성전을 봉사하고 성전을 귀하게 여기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안나 할머니와 같은 축복받은 삶, 응답받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안나 선지자는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38 절에 보면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하니라” “아기에 대해 말하니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안나 할머니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예수님 주심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 아나 할머니는 이제 성전 안에만 있지 아니하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오셨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셨다! 나는 메시야를 직접 보았다고 하면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로 남은 생애를 보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메시야,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역시 성전에서 만난 구원의 체험, 성전에서 받은 은혜의 체험들이 많습니다. 안나 할머니가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듯이 여러분 성도들은 이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안나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주님을 눈으로 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여러 가지 시대의 징조로 보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문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주님이 언제 어느 시각에 오실 지는 정녕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주님 오실 때가 이제 가까이 왔음을 압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일곱 가지 예수님이 오실 징조들이 이미 다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우리 성도들은 우리 삶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으로 만들어가고 우리 삶을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세우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성전을 섬기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희망중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날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시아의 영적 등불과 같은 이 나라, 불과 복음이 전해진지 불과 일이백년도 안되는 나라에서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겠다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줄을 서서 순교를 자청하고 수천 수만명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한 이 나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 나라에 먼저 오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로 삼으신 이 나라에 다시 오실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이 곳 광주에 주님이 오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소망한 것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8 장 10 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곳 광주는 유대땅 갈릴리와 같습니다. 왜냐? 유대 땅 갈릴리에서 2000 명이 죽어갔듯이 이 곳 광주는 지금으로부터 20 년전에 민주항쟁으로 인해 수백명이 죽고 2000 명 이상이 죽거나 상해를 당허거나 행방불명된 곳이 이곳 광주입니다. 고 문익환 목사님은 “이 나라의 갈릴리는 광주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땅 갈릴리가 아픔을 지닌 곳이었듯이 이곳 광주도 아픔을 지닌 땅입니다. 둘째는 광주의 이름은 빛고을입니다. 그런데 성경 마태복음 4 장 16 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는 곳에 이런 예언이 있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광주는 5.18 사망의 땅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지난 세월 ”그늘에 앉아 있는“ 곳과 같습니다. 바로 그곳에 빛이 비치우리라고 하였습니다. 빛고을 광주는 예수님께서 오시리라 약속하셨던 갈릴리의 여러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빛고을 광주, 역사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이곳 광주에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은 언제 어느 곳에 오실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복음의 순교자의 나라, 새 이스라엘로 삼으신 이 나라, 갈릴리와 같은 이 지역 빛고을에 오시기를 간절히 희망할 뿐입니다. 안나 할머니가 성전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결국 주님을 만나 뵈옵듯이 저와 여러 성도들도 주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희망 중 기다리면서 우리의 삶을 성전을 사랑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봉사하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전하면서 사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다시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저희 가운데 오시옵소서. 이 땅에 오시옵소서!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기 때문에 순교의 피가 강같이 흘렀던 이 한반도에 오시옵소서. 주님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사오니 이 곳 갈릴리와 같은 이 곳 빛고을에 오시옵소서. 오셔서 갈등이 있는 이 땅에 하늘의 평화를 주시고 어둠이 있는 이곳에 하늘의 빛을 비추어 주옵시고 상처가 남아 있는 이곳에 하늘의 위로를 주시옵소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저희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오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