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12 월 23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마태복음 1 장 18 절 - 23 절
제 목 : 임마누엘
할렐루야! 오늘 성경말씀 마태복음 1 장 18 절에서부터 25 절 말씀은 예수님이 이 지구상에 오심을 비교적 소상하게 말씀해주십니다. 1 장 18 절에서부터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만 동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혼은 보통 결혼 1 년 전에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말하면 약혼과 비슷합니다. 요셉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아내가 될 여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실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았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제일 처음에는 피가 꺼꾸러 솟아올라오는 것 같은 분노로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아마 동서고금의 약혼자가 있다면 모든 남자가 다 같을 것입니다. 나하고 이제 내년 꽃피는 봄이 오면 결혼할 날짜까지 잡아 놓았는데 내가 모르는 임신이라니!!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충격 이상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선 요셉은 마음을 조금 진정하면서 가만히 마리아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글쎄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의 미래를 얘기한 적은 있어도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술 먹고 일을 저지른다든지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평소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여자인가?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마리아는 순결할 뿐만 아니라 그 고운 마음씨를 보나 정결한 행동을 보나 그 어디를 보아도 다른 남자와 통정을 할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런 마음의 흔들림이나 고뇌의 표정이 일말이라도 얼굴에 보였을 텐데 얼마 전 까지도 만나 얘기했을 때도 어떤 마음의 흔들림을 느끼거나 평화로운 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말인가? 도무지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끄집어 낼 수 없었기에 요셉은 아마도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유대의 다른 혈기방자한 남자가 그 경우를 당했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 정혼한 여인을 찾아가 요절을 내고 말았겠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9 절과 20 절 상반절을 봅시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여기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함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의로움과는 다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믿음이 신실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여호와 신앙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성숙한 믿음을 지녔기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만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거냐?” 흥분하면서 머리채를 잡아채는 비신사적 행위를 하거나 이를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만일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 그 즉시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돌을 맞아 죽게 됩니다. 요셉은 깊이 마리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거나 사랑하는 여자가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끊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요셉이 파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때에 주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1 장 20 절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가 현몽했다는 것은 꿈에 나타났다 그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의 사자가 나타나는 방식이 실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환상 중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의 사자 즉 천사는 아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어떤 불륜의 씨앗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으로 된 것임을 말합니다. 주의 사자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하면서 아내를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신 성령이 능력으로 마리아를 임신케 하였다는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 장 2 절에 나오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은 성령이십니다. 천지창조를 하시고 우주를 조성하신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주의 사자는 계속하여 말씀합니다. 21 절에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아이 이름까지도 이미 지어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다”는 것을 주의 사자가 지었겠습니까? 이미 주 하나님께서 작명해서 주의 사자에게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청사진을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챙겨가면서 면밀주도하게 일하고 계심을 살펴 볼 수 가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정혼한 요셉에게도 나타나 이차저차한 사실을 알려주어 어떤 동요가 없게 하고 아이의 이름까지도 알려준 것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척 상세하고 세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고 요셉에게도 주의 사자를 보내어 또한 동방박사들에게도 별을 보여 주어 큰 인물이 탄생될 것을 예고하고 꿈에 나타나 지시하시고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하늘에서 완벽하게 모든 탄생과정을 지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늘에서는 예수님 탄생시에 가장 바쁘게 천군천사들이 움직여 일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빈틈없는 설계도와 일정을 마련하시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 속에서 한치의 어그러짐이 없이 진행시키고 있음을 오늘 마태복음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는 이것이 최근에 하늘에서 급조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이미 예고되고 계획되었음을 말씀해 줍니다. 1 장 22 절을 읽어봅시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여기서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선지자란 이사야 선지자를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800 년전에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이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수백년 전에 이미 이를 예고하고 준비하여 실행하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선지자가 말한 예언의 내용이 23 절에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800 년 전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이미 플랜을 짜놓고 그것을 선지자로 선포케 해놓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선포한 내용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까 21 절에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는데 23 절에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름이 둘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요 임마누엘이 예수님이다 그 말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을 분해해 보면 이렇습니다. 끝자는 “엘”로서 하나님을 뜻하고 임마누엘에서 “마누”는 “우리와” 그런 뜻이고 맨 첫 자 “임”은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으로 정리됩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한 여인에게서 난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즉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 말입니다. 이를 좀 더 설명해 봅시다. 요한복음 1 장 1 절을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그대로 <임마누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한 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빌립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4 장 8 절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한 것입니다. 빌립은 감히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니 분명히 참으로 간땡이가 큰 제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요한복음 14 장 9 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도무지 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한 인간이 그런 말을 했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건방진 말이었거나 이단 사이비 교주가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단하게 “나를 본 자는 하늘 아버지를 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사자이므로 나는 하나님 대신이다”, 이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뜻도 아닙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 말은 “나는 곧 하나님이다” 그 말입니다. 세상에 바로 그 말을 듣고 간땡이가 큰 빌립도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 면전에서 하나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데 겨울이라 호호 하얀 입김이 나온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이 됩니까?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음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세상에 오시겠느냐! 천상에 계시어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늘의 사자나 심부름꾼을 보내어 처리하시지! 죄 많고 더러운 이 사바세계에 직접 강림하시겠느냐!고.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세상에 보내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 계셔서 인간 세상은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보내어 다 처리하시고 영광만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신 줄로 만 생각합니다. 둘째로 만일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해도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행차하신다면 거룩한 구름을 타고 뭇 천사들과 천군들에 의해 옹위되어 찬란하게 행차하셔야 하나님이 하나님 같으실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오셨기에 하늘의 용포를 입고 번쩍거리는 관을 쓰고 천사가 찬양하는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천사장 나팔소리와 함께 "물렀거라!“ 우렁찬 소리가 들리면서 오색 색종이와 금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하늘의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고 마침내 이 지구 땅에 착륙하시면 붉은 비로드가 쫙 일자로 펼쳐져 있는 가운데 예쁘게 생긴 천사들이 커단 나비 부채로 옹위하고 천사장이 앞에 서서 그의 강림을 알리고 천군의 호위 가운데 만유를 주재하시는 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으로 그렇게 상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를 오신다고 한다면 뭔가 세상의 제왕들이 지방을 초도순시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그 행차가 화려하거나 위풍당당하게 오시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은 전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연약한 어린 처녀의 몸에 낳으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쫓겨다니시기도 하고 참으로 하나님이 가난한 목수 부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진정 신비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의 허를 찌르는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되 참으로 인간에게 친밀한 방법으로 참으로 그리움과 정을 가지게 하는 방법으로 참으로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볼 수 있는 형태로 참으로 사람이 사랑하기가 쉬운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아기로 오셔서 사람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안아볼 수 있고 그 고운 아이의 부드러운 손가락을 만져볼 수 있고 아이가 방긋 웃으면 너무 귀엽다고 주변의 친척들이나 이웃사촌들이 예수님의 볼에다 가볍게 뽀뽀도 당하는 그런 귀엽고도 여린 모습으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기상천외한 발상입니다. 한 아기로 연약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 속에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방법으로 인간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 가운데 수천수만의 천사들에 둘러 쌓여 오신다면 가까이 범접할 수 없어서 두려워는 하겠지만 그리고 존경은 바치겠지만 그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 깊게 사랑하게 되고 연모하는 마음이 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말도 나누시고 사람들과 함께 걱정을 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람들이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으면 우시기도 하시고 걱정하지 말아라! 어깨를 감싸 격려해주시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복도 내려 주시고 시각장애자를 고치실 때에도 자상하게 흙을 개어서 눈에 붙여 주시어 낫게 해주시고 사람들과 함께 고기도 구어 먹으시고 포도주도 함께 나누시고 사람들을 꾸짖으시기도 하시고 칭찬하시기도 하시는 방법으로 사람들 바로 옆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때로는 다정한 친구와 같이 때로는 말동무와 같이 때로는 식구들 같은 사랑으로 옆에 계시어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하시되 가장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으시는 방법으로 우리 곁에 현존하신 것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인간들이 잘못하면 엄중히 벌을 내리시고 상을 내리신다고 해도 천사들이 대독하고 대신해서 건네 준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만 하고 경배만 하고 찬양만 하지 그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킨쉽이라고 있습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것입니다. 요즘 교육학에서는 이 스킨쉽을 강조합니다. 자녀들을 가르칠 때 손으로 만져주고 안아주면서 교육을 할 때 삼중 사중 오중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 가장 교육이 잘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시어서 상처입은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수염도 있는 자상한 모습으로 오시어 물을 마실 때는 가끔 그 물이 흘러 수염을 타고 흐르기도 하고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는 꼴깍하는 소리도 들리고 허물과 잘못을 지은 사람을 보고서는 한없는 너른 가슴으로 그 죄를 감싸 안아주시고 하시니 어찌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통하여 오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주시는 방법으로 눈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사랑하시고 가장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시는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이후 수백억의, 수천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연모하고 그를 위하여 사랑과 충성을 바치고 헌신하면서 더욱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어떤 기계적 법칙과 같아서 잘못하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딱 그만큼 벌을 주고 만들어 놓은 하늘의 무슨 법전과 같은 것이 있어서 죄를 지은 만큼만 심판을 하고 도무지 융통성이나 용서와 같은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면 사람이 그 원리나 법칙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얼마전에 대통령이 농민들과 대화를 하려할 때 한 사람이 일어서서 무슨 질문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호원이 그를 제지하여 끌고 나갔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서 왜 농민은 대통령에게 질문도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고 지구의 최고권력자도 아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함께 포도주잔도 기울이고 떡도 나누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병도 고쳐주시고 너무도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우리가 얘기할 때 맞장구도 쳐주시고 떡을 먹을 때는 자기 몫을 떼어서 배고플 터이니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분으로 오셨으니 얼마나 참으로 멋있는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친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입네!!” 하는 위풍당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행세를 하신 것이 아니라 친구와 같이 어울리고 친구와 같이 다정한 모습으로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는 친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 겨울 추위는 서려 내 뺨을 스미는데/언손을 잡아줄 친구는 어디서 무얼하나/부드런 손길로 어루던 친구여 내게와서/나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스이 녹여다오/아득한 그대의 품으로 이 몸을 감싸요/그 춥던 겨울이 가고 화사한 봄이 와도/그토록 정답던 친구여 내 곁에 있어요/우리의 두 손을 꼭잡고 진실한 믿음으로/험하고 거칠은 세상을 웃으며 헤쳐가요> 여기서 친구가 어떤 친구입니까? 한 겨울 추위가 내 뺨을 얼게 하고 내 손은 얼어 있는데 그 친구는 내게 와서 내 뺨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고 언 손을 꼭 잡아줌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조차 따스이 녹여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험하고 거치른 세상에서 아늑한 품을 가지고 내 곁에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정겨운 마음, 진실한 믿음으로 웃으며 함께 가는 친구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어떤 종교의 교주나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어떤 굉장히 높이 있어서 범접하지도 못할 위엄이 있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화사한 봄에도 내 곁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겨울 그 추위에도 함께 헤쳐갈 수 있는 친구와 같이 우리 인생들 곁에 계시어 세리들의 친구도 되시고 죄인들의 친구도 되시는 그런 모습으로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 이상 더 이상 멋질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세계에 가되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따사로운 마음을 지니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고뇌와 아픔을 지니고 인간의 눈물을 지니고 인간의 환희와 기쁨을 지니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오시어서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하시고 사람들이 당하는 남모를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시고 사람들이 겪는 질고를 자신의 질고로 여기셨으며 사람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자신의 등뒤에서 아니 온 몸으로 느끼셨으며 사람들의 한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는 참으로 여리시고 애잔한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하나님이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어 세상사는 아랫것들에게나 맡기고 당신은 하늘보좌에만 계시어 인간세상사에 관심을 두시지 않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하나님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조금치의 융통성도 없이 아무리 애걸하고 복걸해도 은혜가 없고 용서가 없는 그런 기계적인 하나님(deus ex machina)이 아니신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것을 틀어쥐고 앉아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전횡을 하고 인간의 생각과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이 죄로 인해 신음할 때 그 아픔을 눈꼽만치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린이와 같이 귀여운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옆에 계시어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받고 사랑도 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슬픔과 고통도 함께 나누시고 위로도 하시고 때로는 감정이 격해질 때는 눈물도 흘리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따뜻한 사랑의 가슴을 지니고 있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들도 너희들끼리도 사랑해라고 말씀해주시고 따르는 제자들의 발에 낀 때를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시는 바로 그 정겨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하나님이 “너희들이 잘못된 것 다 나의 허물이요 나의 잘못이다” 모든 허물을 다 뒤집어쓰고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우리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사람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수천억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계같은 별무리들이 또 수천억개 있는 이 우주를 단 한치도 어그러짐이 없이 정해진 궤도를 돌게 하시고 66 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소우주와 같은 우리 몸을 창조의 질서에 따라 돌게 하는 그 하나님이 마침내 희노애락을 지닌 사람이 되고 사람인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랑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희망하는 하나님 예수님 안에서 임마누엘 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어 이 땅에 예수님으로 따뜻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으로 오시어 저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주심을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오늘도 저희와 함께 임마누엘해주시옴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 땅에 살 동안 임마누엘 예수님 사랑하며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께 순종하고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곁에 친구와 같이 다정하게 계신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깊이 사랑하며 더 깊은 교제가 오고가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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