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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부요한 자!

관리자 2010-10-18 (월) 23:34 15년전 3177  
 

2001 년 10 월 28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 장 13 절 - 21 절

제      목 : 하나님께 부요한 자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성도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부자를 비유로 드시면서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의 결말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에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선생님 제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 동생에게 야단을 칩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다시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면서 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해 작황이 좋아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중에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가 그래 이렇게 해야지 하면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리고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광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김장환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실 때 이 본문을 가지고 하셨는데 아직도 기억이 남는 것은 코카콜라 회사 사장이 그토록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나중에 죽을 때 코카콜라 단 한 병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는 말씀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옛날 이스라엘의 유산상속법은 장자를 특별히 우대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산은 비록 적다하더라도 차자에게도 물려주는 것이 법입니다. 장자에게 가장 많이 주고 그 다음에 그 다음 차자의 몫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형은 장자우대법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아버지의 유산을 자기가 다 독차지하였는 모양입니다. 그러자 동생이 형한테 가서 자기에게도 유산을 달라하였지만 형은 아마 동생에게 ”아버지가 다 나 가지라고 했다“하면서 한 푼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열불이 치솟아 올라 형에게 대들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고대에서나 중세에서 유산 때문에 피로써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이란 유산을 받기 위하여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형을 유배 보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모의 유산을 받기 위하여 형제자매간에 소송을 벌여 지방법원에서 안되면 고등법원으로 가고 그래서 집안이 유산은 못차지 하면서 가족간이 해체되고 풍지박산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생도 어떻게든 자기 몫의 유산을 받고 싶었습니다. 궁리를 하다가 당시 모든 문제를 시원시원하게 풀어주시고 영향력도 있으신 예수님께 찾아가서 하소연하였습니다. 그 당시 권위 있었던 예수님이 한 말씀하시면 자기가 유산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의 교훈을 삼아서 ”삼가 탐심을 물리쳐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이 무엇입니까? 탐하는 마음입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더 차지하고 더 소유하려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탐심은 어떤 절제력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계속 더 가지려고 더 쌓아두려고 합니다. 탐심이 있을 때 ”더 많이 좀 더 많이“ 내 것으로 만드는데 소유하는데 혈안이 됩니다. 사람의 탐심이란 뭔가를 계속 더 채우려는 항아리와 같습니다. 정채봉이 쓴 ”나“라고 하는 동화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신께 빌었다. 쌀 항아리를 채워 주시고 과일 항아리를 채워 주시고 고기 상자를 채워 주소서. 하도 졸라대는 통에 신은 허락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쌀 항아리와 과일 광주리와 고기 상자를 주워 담으면 기도대로 커지게끔 만들었다. 그 사람이 쌀 항아리 앞으로 가면 쌀이 저절로 생겼다. 쌀 항아리에 쌀을 퍼담는 그는 신이 났다. 한참 쌀을 담다 보면 쌀 항아리는 커지는데 고기 상자가 그대로인게 그는 불만이었다. 이번에는 고기 상자 앞에 섰다. 이내 고기가 절로 생겼다. 고기를 집어 넣는대로 고기 상자 또한 커졌다. 쌀 항아리와 고기 상자는 커졌는데 비해 과일 광주리가 적은 것이 눈에 띠였다. 그는 과일 광주일 앞으로 갔다. 한참 과일을 광주리에 담다 보니 쌀 항아리가 작아 보였다. 그는 다시 쌀 항아리한테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기 상자가 작아 보이지 않은가 그는 고기 상자한테로 달려갔다. 다음에는 또 과일 광주리한테로 달려갔으며 이렇게 번갈아 쌀 항아리와 고기 상자와 과일 광주리를 채우다 보니 어느 덧 죽는 날이 다가왔다. 그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게걸스러운 거지가 되어 살아온 자기 삶을! 그는 신께 항의하였다. “어찌 이렇게 거지인 채로 살아오게 하셨습니까? 신이 대답하였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네 탓이다. 꽉 차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 아니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징은 더 모으고 더 축적하고 더 이윤을 남기고 그래서 자본을 확대재생산하고 더 큰 힘을 축적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아래서 인간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쌀 항아리에 더 많은 쌀을 채우려 하고 고기 상자에 더 많은 고기를 채우려 하고 과일 광주리에 더 많은 과일을 채우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기상자 작은 것은 보이고 쌀 항아리 작은 것은 보이고 과일 광주리 작은 것은 보이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서 삶을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은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즉 자본만 보이지 인간은 보이지 않고 더더욱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인다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고 하나님이 보인다면 자신의 항아리와 광주리와 상자를 더 크게 하려는데 기도하는 일에 쓰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요즘 미국은 탄저병의 공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탄저균이 들어오면 수일내에 죽는 무서운 병입니다. 탄저균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겨우 보이는 작은 미생물입니다. 이 적은 것이 자기보다도 몇 천만배 큰 인간을 수일내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탐심은 탄저균보다도 훨씬 더 무섭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더 가지려는 우리의 탐심을 통해 들어와서 우리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탐심이 가진 역기능을 생각하고 삼가 이것을 물리쳐라 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란 명사형은 산다는 동사형입니다 즉 생명은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 장 10 절에는 예수님께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 함이니라” 풍성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잘 사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이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 잘 살아? 그렇게 물어본다면 대체로 경제적으로 잘 사느냐는 뜻입니다. 일반적인 판단기준은 사람들은 보통 잘 산다고 할 때 우선 떠올리는 것이 아파트 평수도 넓고 그리고 별장도 하나 가지고 있고 골프 회원권도 있고 차도 비까번쩍한 차를 가지고 있는 것과 잘 사는 것을 일치시킵니다. 그런데 자! 한 여인의 삶을 살펴봅시다. 1870 년 어느 날 증권회사가 몰려 있는 월가에 온통 검은 색깔 옷을 입은 자그마한 몸집의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이 여인의 뒤를 좇았으나 여인은 매서운 눈을 부릅뜨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월가의 악녀라고 부르는 헤티 그린이라는 여인으로 1800 년대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고 또한 가장 지독한 구두쇠이기도 하였습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헤티는 아버지로부터 약 9 억원 정도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녀는 50년 동안 주식과 채권 등 온갖 수단으로 재산을 100 배 이상으로 불렸습니다. 그녀의 생활신조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었습니다. 서른 세 살이 되던 해에 백만장자인 에드워드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에드워드는 아내의 재산에 일체 손을 안댄다는 각서를 헤티에게 제출하고서야 비로소 결혼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헤티는 에드워드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투자한 주식이 부도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자 곧 이혼을 해버렸습니다. 이후 헤티는 재산세를 내지 않기 위해 값싼 호텔에 전전하며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녀는 의복과 세탁비를 아끼려고 아이들에게 매일 똑같은 검은 색 옷만 입게 하였고 땅에 닿는 끝 부분만 빨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아들이 무릎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녀는 돈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아이를 직접 치료하였지만 2 년후 아들은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울적할 때마다 은행 귀중품보관실의 바닥에 앉아 항상 증권과 채권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종이에 싸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온 마른 빵조각을 꺼내 먹곤 하였습니다. 1916 년 헤티 그린은 81 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원인은 우유값 때문이었습니다. 우유값을 덜 내려고 우유배달원과 말다툼을 하다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900 억원이 넘는 재산 중에 그녀는 단 돈 일원 일센트도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다만 “악녀”라는 이름만 세상에 남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헤티 그린은 900 억원이 넘는 재산이 있었고 81 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여러분 헤티 그린이 잘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있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해서는 곳간을 때려 지을 만큼 쌓아놓고는 그렇게 수확하도록 단비와 햇빛의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 사람 주변에 있는 이웃과는 나눌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욕심만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는 이의 영혼을 지금 당장 데려가신다면 그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종말이 빞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2 장에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 장에도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의 종말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 장 19 절부터 26 절에 나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여 그는 음부에서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의 삶의 또 하나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헤티 그린이 죽은 지 약 6 년 후인 1923 년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있는 헤티 그린의 남편과 이름이 같은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당시 미국의 최고 부자라고 일컬어지던 일곱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 일곱 사람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나라의 재산)을 능가할 것이라고 신문들은 떠들어댔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기자가 시카고에서 그들이 모였던 1923 년의 그 날로 시작해서 꼭 25 년이 지난 후에 부를 자랑하던 그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첫 번째 사람 강철회사 사장인 챨스 슈억은 이름과 같이 수억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25 년후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 째 사람 밀 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가운데 죽어 갔습니다. 세 번 째 사람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 째 사람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니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나와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 웰스프리트 회장이었던 J.C 리버모아는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일곱 번 째 사람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걸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일곱 사람 모두가 자기 자신에는 무척 부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연장선상에 있고 예수님 같은 장소에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2 장 33 절을 보면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어떤 자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이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즉 여기서 예수님은 하늘에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저축을 하늘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교회에다 헌금을 많이 하라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 부요함을 안겨 드리는 일인데 예수님은 이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일로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을 저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제한다는 것은 꼭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준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구제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소중한 부분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더 넓게 해석하면 “더불어 함께 산다” 그 말입니다. 나사로와 같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못 사는 삶에 함께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즉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은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대상 이웃과 더불어 살고 함께 나누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표본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 장 9 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늘의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심으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으로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예수님 혼자 드셔도 충분치 않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도 나누셨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나누셨습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나누어주어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는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은 영생도 혼자 독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생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를 개혁하자는 것은 결국 그 종교를 개혁하여 우리의 삶을 개혁하자함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좀 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좀 더 돈을!! 좀 더 편리함을!! 좀 더 쾌락을!! 좀 더 높은 지위를!! 좀 더 힘과 권력을!!“ 외치고 있습니다. 교회도 좀 더 많은 성도를! 좀 더 큰 성전을! 하는 좀 더 병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무슨 성전을 더욱 크게 짓는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성전이 얼마나 크고 아름답냐고 하였을 때 오히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에 돌 하나가 놓여 있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인 소유와 탐심을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양식, 나누고 주고 베풀고 섬기는 그래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양식으로 개혁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나안 교회는 자본주의적 성장의 원리를 따라 좀 더 크게 좀 더 많게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보여주신 교훈에 따라 나누고 섬기는 일로 더불어 나누는 일로 가난해지지만 하나님께는 부요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이해인 수녀님이 기도시인 나눔에 대한 묵상기도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주고도/한끝의 후회가 없는/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나눔은 언제나 자신을 주는 행위입니다/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미소/나의 기쁨, 나의 재능, 나의 지식/그리고 나의 물건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바로 내 생명의 일부를 주는/경건한 행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의 정성과 나의 노력과/나의 시간과 나의 마음을/더 많이 바칠수록/남에게 더욱 빛나는 선물이 됨을/항시 기억하게 하소서/나눔은 언제나 겸손의 행위입니다/당신과 이웃에게 나를 주려 할 때엔/잘난 체하는 마음 없애시고/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겸허하고 진실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숨어서도 만족하는/기도의 행위입니다/자신의 善을 과장하여 떠벌리고 다니거나/타인에게 은근히 보답을 강요하여/인사받길 좋아하는 유혹에서 / 우리를 지켜 주소서

나눔은 언제나 용기있는 행위입니다/남의 비위를 맞추려 눈치를 보며/체면따위에 얽매여 움츠러드는/비겁한 겁쟁이가 아니 되게 하소서 나눔은 끝없는 사랑의 행위입니다/주고 또 주어도 줄 것이 남는 연인들의 마음처럼/더 주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더 나누지 못해서 고민을 하는/풍요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주님!/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참다운 나눔의 행위를 통해서만/당신과의 만남이, 영적인 성숙이/천국이 가능하다는 것을/잊고 있었습니다/당신이 주신 신앙과 은총의 선물만 가지고도/이웃과 충분히 나눌 것이 많은 부자임을/잊고 있었습니다/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사랑의 의미를 더욱 새롭히신 주님/당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나눔의 신비가/우리의 매일 속에 실현되게 해 주소서/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신비를/우리 모두 체험하고 맛들이게 하소서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고/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이승의 순례자인 우리가/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당신께 빌려 받은 것임을/항시 기억하게 하소서 벗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당신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먼저 주어진 처지에서 인간과 사물을/깊이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나눔의 기쁨으로 말미암은 평화가/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나눔과 섬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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