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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관리자 2010-10-18 (월) 23:38 15년전 2529  
 

2001 년 12 월 2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예배


성경본문 : 전도서 3 장 1 절 - 8 절  

제      목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주일 예배에 참예한 모든 이들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벌써 12 월입니다. 2001 년 한 해가 왔는가 싶었는데 이제 벌써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란 낙엽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람이 그저 가볍게 불었는데도 은행잎이 마치 하늘에서 노란 눈이 내리듯 내렸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은행잎이 은행나무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무어라고 말했을까? "잘 있어! 나 간다!" 그러면서 갔을까? 아니면 "나중에 만나자!" 아니면 "나 먼저 간다!" 하고 갔을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면서 떨어졌을까? 그렇다면 은행나무 가지는 은행잎에게 무어라고 얘기했을까? “잘 가거래이 난 아무 할 말 없데이” 은행나무가지와 떨어진 은행나무잎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가운데 거리는 떨어진 나뭇잎들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전도서는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봄이 되어 가지에 은행잎이 날 때가 있고 겨울의 문턱에서 은행잎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난생 처음 울음을 터트리고 이 땅에 태어날 때는 가지에 은행잎이 푸릇푸릇 돋아날 때요, 이제 기한이 다하여 이 땅을 떠날 때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지에서 떨어지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과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로서 시간이요 다른 하나는 정한 때인 카이로스로서 시간입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미래에서 현재로  쳐들어오는 시간 즉 하나님이 정한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범사에 정한 때, 즉 카이로스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요, 우리 인생이 이 땅을 떠나 더 이상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우리 인생 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 12 월이니 겨울에 태어나는 아이이거나 겨울에 혹 태어나신 분들은 가수 이종용이 이런 노래를 불러 줄 것입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런 당신은... 눈처럼 맑은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언제나 맑고 깨끗해...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오늘 본문 전도서 3 장 2 절에 보면 “날 때가 있고”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서 기자는 인생이 저절로 날 때가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태어나게 하신 결과, 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 우연히 갑자기 알지 못하는 어디에서인가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연기의 법칙이나 인연의 사슬에 의해 존재한 것도 아닙니다. 요즘 전생에 대한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만  인생에 있어서 전생이란 허구입니다. 없습니다. 내가 전생에는 약 3 -4 천년전에 이집트의 공주여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았는데 어떻게 하여 갈라진 땅 이 한반도에 태어나 시종도 없이 애들과 남편을 위해 시종만 들다가 내 인생을 시작하는지 모르겠다고 한 사람도 있고 자기는 전생에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서 인도의 고승이었는데 지금은 여자로 태어나서 카톨릭 성당에 다닌다든지 하는 전생에 대한 증언들은 말짱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경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라는 存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운 뜻에 의하여 나라는 존재가 무에서 유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게 된 것입니다. 시편 139 편 13 절에 보면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즉 나의 존재의 존재케 됨은 주께서 나를 지으시고 조직하시고 낳게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인생의 날 때는 그러므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의하여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날 때가 있다면 갈 때가 있습니다. 죽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 장 2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 때가 있으며” 죽을 때란 이 땅에서 생명이 마쳐지는 때, 이 땅에서 삶에다 마침표를 찍는 때입니다. 이 시간에는 은행잎이 은행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때, 우리 인생이 죽을 때에 대해서 깊은 상념에 잠겨 봅시다. 누구나 다 한번 태어나고 누구나 다 한번 죽습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 장 27 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셨다고 했는데 누가 정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창세기 3 장 19 절에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은 죽는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 말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로서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습니다. 다 갑니다. 아담도 가고 이브도 가고 가인도 가고 아벨도 가고 노아도 가고 함과 셈과 야벳도 가고 다 갔습니다. 아브라함도 가고 이삭도 가고 야곱도 가고 아름다운 리브가도 가고 라헬도 가고 천하명군 다윗도 가고 그토록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가고 다 갔습니다. 하나님의 한번 정하신 그 때에 따라 다 갔습니다. 다윗은 마지막 임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2 장 1 절에서 2 절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다 갑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사람이 가는 길로 다 갑니다. 어떤 나무는 예수님 이전에 태어난 나무들이 있어서 수령 4000 년이 된 삼나무들이 아직도 살아 있지만 인생이란 나무는 고작 100 년 안에는 모두가 갑니다. 정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것입니다. 시인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임신한 여인의 태 속에 이미 죽음이 싹트고 있다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 때는 기억하고 그 생일을 축하합니다. 첫 돌을 축하하고 환갑을 축하하고 칠순을 축하하고 축하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날 때는 경하해 마지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의식 속에서 죽을 때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언젠가 목 디스크로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서편제 판소리 음악을 테이프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나이드신 한 분에게 우리 전통 음악이라고 한번 들어보시라고 했더니 리시버를 꼽더니 서둘러 던져 버리듯이 절 다시 줬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는데 말을 안했습니다. 다시 들어보니 아마도 그 전통 음악이 그 사람에게 장송곡 같이 들렸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오래 남고 싶어합니다. 오래 남기 위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복용합니다. 죽음은 피하려 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내게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 속에서 지우려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보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만 자기의 죽음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인제대 김열규 교수는 우리 한국인들의 죽음관을 분석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 “메멘토 모리” 라틴어로는 “죽음을 기억하라!“ 혹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번역됩니다만 사람들은 보통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자기 삶에 죽음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좀더 오래 오래 살아야지! 건강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죽음을 상정하면서 그 죽음을 준비하면서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김 교수는 한국 사람들의 죽음관을 말하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평소에는 죽음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일찍이 한국인에게 죽음은 정결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과는 회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합니다. 김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은 애써 죽음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려 했습니다. 정작 ꡐ사람이 죽다ꡑ는 것은 돌려 표현했습니다. “눈감다”, “세상을 등지다”, “세상을 뜨다”, “밥숫갈 놓다”처럼. 즉 한국 사람에게는 “삶에 커다란 강조점을 찍어왔지만, 죽음은 홀대받고 주변으로 쫓겨났다ꡓ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서로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두려고 하면 우리 삶과 붙어 있는 죽음과 절실하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 삶이 좀더 의미가 있어지려면 이 죽음의 때를 알고 죽음을 삶의 반대쪽에 놓을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삶과 연결된 것으로 이어 놓아야 합니다. 전도서의 멧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죽을 때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메멘토 모리!”!,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니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 자신의 죽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세월이 가면 죽겠거니 다시 말하면 세월이 흘러 죽는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죽음 저편 언덕에서 내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죽음에서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터넷 어느 싸이트에 Check your death clock! 니가 죽을 날 한번 체크해 봐라! 그런 뜻인데 자기 생년월일과 기타 사항을 입력하여 집어넣고 클릭하면 죽을 날이 찍혀 나옵니다. 그래서 흥미로워서 찍어 보았더니 저는 2033 년 7 월 3 일이 제가 이 세상에 떠나는 날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30 년 8 개월은 더 사는 것으로 나와있었습니다. 그것이 컴퓨터의 한계입니다. 저는 내일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해 봅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어느 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어 저에게 죽음이 저와 동행하자고 찾아왔다고 합시다. 어느 날 몸 한 부분에 찌르는 가시와 같은 아픔이 있어서 병원에 들렸습니다. 그랬더니 암이라고 하고 이미 치료나 수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판정을 내렸다고 합시다. 암은 이미 전신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삶을 정리하고자 교회를 사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을 갖는 어느 순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몇몇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고 장례식장에 올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하관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 289 장,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유족들이 삽에 흙을 퍼가지고 제가 누워있는 관에 한 삽 한 삽 뿌릴 것입니다. 그 과정이 마치면 인부들은 흙으로 관을 서둘러 덮을 것이고 거기서 조객들은 점심식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 있지 않아 제 육신은 땅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고 거기에는 무덤과 같이 봉분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1 년이 지나고 수년이 지나도록 자녀들과 저를 기억하는 이들 몇몇은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제 묘소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나면 차츰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배태진이라는 존재 자체는 잊혀질 것이고 자녀들만이 사랑 가운데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나 없이도 세상은 바쁘게 흘러 갈 것입니다. 50 년이 지나고 100 년이 지나면 제 몸은 분해가 되고 뼈도 점점 썩게 되고 300 년이 지나고 400 년이 지나면 제 몸은 거의 완전히 썩어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 흙으로 환원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완전히 분해되고 없어지고 흙으로 변하고 사멸하고 말았는가? 아닙니다. 저는 바로 그때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시신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억만년이 흐른다해도 시간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무시간 속에 있게 됨으로 저는 죽음 바로 이후에 하나님이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9 장 27 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저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날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심판대 앞에 선 저에게 하나님은 이모저모로 물으실 것입니다. 심판대 앞의 심판은 죄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땅에서의 제가 걸어왔던 삶을 평가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너는 내가 은총으로 허락한 일생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저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된 “날 때”와 인생의 날을 다한 “죽을 때” 사이에 있었던 “살 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땅에서 살았던 때”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하고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날 때와 죽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사이에는 살 때가 있습니다. 이 살았던 때가 도대체 어떠했느냐를  하나님은 저의 삶을 놓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살 때, 호흡이 있는 동안에, 살아 숨쉬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심판대에서 저를 칭찬하시기도 하고 저를 야단치시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면은 칭찬하시고 어떤 면은 꾸지람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맡긴 가나안의 양떼들을 왜 잘 돌보지 못했느냐?고 꾸중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그 때에 따라 하나님은 저를 하나님의 오른편에 즉 의인의 편에 서게 하실 수도 있고 저를 왼편 즉 죄인의 편에 서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불과 땅에서 살았던 짧은 짧게는 5-60 년, 길다고 해도 7-80년의 삶, 우주의 전체의 시간에 비해보자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그 순간의 삶을 어떠했느냐에 따라 영원의 삶으로 잇대어 지기도 하고 꺼지지 않은 영벌의 삶으로 연결되기도 할 것입니다. 영원을 산다는 것은 단지 한 오백년 살다가 마쳐지는 삶이 아닙니다. 영원의 삶은 그저 무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존재의 다른 형태 가운데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날 때와 죽을 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날 때, 살 때, 죽을 때, 다시 살 때 혹은 다시 죽을 때로 이어지게 됩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사이에는 살 때가 있고 죽을 때 이후에는 다시 살 때가 있고 다시 죽을 때가 결정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아마도 뼈저리게 뉘우쳐 지는 어떤 한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아하, 땅에서의 그토록 짧았던 삶이 불과 7-80 년도 안되는 삶이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저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구나!” 그러면서 사람들마다 “내가 왜 그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생의 삶을  그 짧았던 때를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가지 못했을까 통탄하면서 후회하지만 그때에 가서는 때는 늦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이는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으로서 부족한 것을 메꾸어 주시고 땅에서의 삶을 칭찬하면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신다면 그때 그 이후에 그는 찬송가 502 장 후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하면서 천국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살같이 빠른 그러면서 불과 100 년도 안되는 짧은 삶이 어떠했느냐에 바로 이 영원의 삶이 결정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그런 여정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죽음의 빛에서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를 비추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때를 잘 대비하면서 영원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죽음의 때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날 때와 죽음의 때 사이에는 살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있는 동안이 있습니다. 생명있는 동안에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 이후를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준비입니다. 잘 죽고 죽음 이후 언덕 너머의 삶을 예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살고지고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노래부르고 한 오백년을 노래부르지만 그러나 백년 안팎에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고 3 수험생이 수학능력평가시험을 대비하면서 한 해동안 열심히 준비하듯이 우리 인생 하나님의 평가를 대비하면서 하루 하루를 이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제 당회에서 우리 교회를 공사하셨던 분이 이미 돌아가시고 없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번 주에 유명한 분 한 분이 시한부 생을 선고받았습니다. 뭔가 보여주려면 이 주일이 걸리지 않는다는 분입니다. 이주일(61.본명 鄭周逸) 씨. 한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인 그가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기자에 따르면 준비중이던 연말 공연도 취소한 그의 얼굴은 핼쓱했고 하얀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침이 계속 나길래 지난 여름 종합검진을 했어요. 이상이 없다길래 그 후 운동도 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했는데…. 불과 한달 전에 판정을 받았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데려 가시는 날은 나이순이 아닙니다. 오늘은 12 월 2 일입니다. 벌써 12 월하고도 이틀이 지났습니다. 우리 인생이 태어날 때를 1 월 1 일이라면 우리가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12 월 31 일, 은행나무 가지에서 은행잎이 떨어지는 그 날이 어느새 금방 찾아올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마쳐집니다. 전도서 12 장 13 절 - 14 절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땅에 살면서 항상 내 삶에 죽음의 때가 다가옴을 생각하면서 내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나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이 고삼 수험생의 수능점수가 나오는 날입니다만 이 땅에서 살 때 하나님께 좋은 평점을 받을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 인생을 슬기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삶이 창세기 1 장 4 절에 처음 나오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은혜로 이 땅에 나게 해주시고 결국 저희의 삶을 이 땅에서 거두어 가시는 줄 압니다. 저희가 이 땅에서 살 때 언제나 죽음과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심판 때에 저희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이 하나님께 좋은 평점을 받기를 원하옵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날 저희가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저희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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