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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설교)시련과 은혜

관리자 2010-11-29 (월) 11:42 15년전 2807  

2001 년 11 월 25 일(주일) 오후 7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12 장 1 절 - 10 절

제 목 : 시련과 은혜  

할렐루야! 시련을 통하여 큰 은혜를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알 수 없는 질병이 찾아 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한창 소아시아를 향하여 전도정책을 세워 의욕적으로 돌아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가시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전도를 위해 가야할 곳은 많고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 장 7 절 후반절에 바울의 질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아마도 몸 속에서 무엇인가 가시와 같이 콕콕 찌르는 통증이 있었기에 “내 육체의 가시”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안질이라고도 하고 어떤 의학자들은 이것을 그 증상으로 보아 분명히 신장에 있는 결석이라고 합니다. 결석이 있을 때 가시와 같이 그런 통증이 있다고 합니다. 제 선배 중에 한 분은 신장에 결석이 있다는 의사의 얘기를 듣고 자신만의 치료방법으로 치료하였습니다. 맥주를 많이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렸는데 정말로 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결석을 빼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위장에 빵꾸가 났습니다. 질병 등 삶에 여러 어려움이 찾아올 때 누구나 어떤 대책을 합니다만 바울은 자신의 몸에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라 곧 바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아이쿠 큰일났구나!”를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밖에서 큰 사건이 났을 때는 아이쿠! 큰일났구나!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남의 집에서 불이 났을 때는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봅니다만 자기 몸에서 정작 사건이 생겼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이쿠 큰일났구나!” 위기를 느낍니다. 사람이 여러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위기 중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같이 심각한 위기가 없습니다. 갑자기 반신이 불수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정신적 고통은 겪은 사람만이 압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할 때 이런 방책 저런 방책을 써봅니다. 좋다는 의사, 좋다는 처방, 좋다는 병원, 좋다는 약을 다 써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기도에 들어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바울 사도는 몸에 찌르는 가시와 같은 통증이 있었을 때 곧장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나님, 이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찌르는 가시와 같이 아픈 것을 고쳐주시고 이 고통에서 놓여나게 해주십시오” 바울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곧 바로 치유케 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도하면 많은 사람이 치유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병은 물론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바울이 밤늦도록 설교할 때 유두고 같은 청년이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바울이 기도하여 살려냈습니다. 바울의 그림자만 스쳐지나가도 또는 바울이 가진 수건을 건드리기만 해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거듭 기도하였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없애주시지 않았습니다. 세 번씩이나 기도했는데도 찌르는 가시와 같은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가 드린 기도는 그때까지 무엇이든지 들어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회개시켜 바울을 사도로 만드신 후에 그로 하여금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 그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주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갔다온 경험까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사랑하셔서 그가 기도할 때마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바울이 안수하고 기도하면 나았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그렇게 연이어 기도를 드렸는데 고통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때쯤 해서 하나님께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네 번째부터는 질병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 저에게 이 고통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저에게 허락하십니까?”를 물었습니다. 바울 사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실로 많은 내용들이 오고갔습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허락하신 그 뜻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12 장 7 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가슴속에 하나님께서 울려주신 진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마디로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잘나가고 건강할 때는 교만하다가도 뭔가 브레이크가 걸리고 질병이 찾아오면 겸손하게 됩니다. 바울은 정말 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토록 사랑 받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사랑하셔서 지극히 많은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말씀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치유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방언과 통변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그를 만났고 그에게 하늘의 계시를 일러주셨습니다. 마치 하늘이 주신 모든 은혜는 바울 사도가 독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사람이 잘 나가면 그것이 자기가 잘나고 자기라는 존재가 크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고 자기라는 우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잘되기 시작하면 나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함정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참 비행기를 타다가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무척 잘 되면 사람은 죄인이라 금방 그것이 자기가 무엇이나 된 듯이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기라는 우상에 빠지게 되고 자고하게 됩니다. 자고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고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자기의 공덕은 높이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교만하다가 넘어지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섰다고 생각했을 때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시련을 주셨을까? 왜 예수님께서 가시와 같은 시련을 주셨을까요? 물론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나쁜 버릇을 고치게 하려고 나쁜 버릇이 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교육적인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랑하였기 때문에 시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자고하여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적당한 시련을 주시어 그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시련을 주시어 적당한 고통을 주시어 바울이 겸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요셉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요셉에게 수많은 시련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되든지 못되든지 그냥 놓아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였기에 이모저모로 훈련시키고 감옥에도 몇 년 동안 있게 하여 좌절을 경험케 하면서 동시에 기도하게 하고 영성훈련을 거치게 하였습니다.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 세상 모든 것과 차단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후에야 큰 일을 시키시고 애급의 총리대신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연단이었습니다.  

바울은 직접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2 장 9 절 전반절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든지 잘되게 해주시고 무엇이든지 풍성하게 허락하시고 무엇이든지 올라가게 해주시고 무엇이든지 차지하게 해주신 것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족한 은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때로는 올라가게 해주심이 아니라 내려가게 해주시고 잘 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되게 해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게 해 주시고 푸른 풀밭에 있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게 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더 귀중한 은혜입니다. 그것은 바로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믿음으로 눈으로 볼 때 아하! 그것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아하!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 더 큰 은혜로 나에게 채워주셨구나!를 고백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시련 속에서 주시는 족한 은혜를 한참 뒤에 깨우치게 됩니다. 시련은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에게 시련을 주신 것은 바울 사도를 미워하시기에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더욱 온전하게 훈련시키고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시련이 찾아올 때도 뜻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내 삶에 시련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통하여 나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렵니까? 믿음의 사람은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을 통하여 나에게 어떤 족한 은혜를 주시렵니까?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을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는 것일까?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아하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이 고통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아직 날 버리지 않으셨기에 나에게 매를 때리시고 깨우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고 가르치시려고 또 커리큘럼을 마련하셨구나! 아하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시어 이렇게 견책하시는구나! 아하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기에 시련의 사건을 통하여 나의 가는 방향을 바로 잡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시련을 통하여 나를 어떤 모습의 그릇을 만드시어 거기에 새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까? 곰곰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나중에 시련이 지난 한참이후에 지나온 삶을 살펴보면 분명 그렇게 고백이 됩니다. 시련 그 자체도 은혜가 될 뿐 아니라 시련 뒤에 물 붓듯이 퍼부어 주시는 은혜도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집사님이 경영하던 사업이 실패하고 나서 "하나님은 틀림없이 계십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 사업이 그대로 잘 나갔다면 언젠가는 저의 영과 가정, 육이 아울러 망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업은 망했지만 영과 가정은 살았습니다. 내 심령은 이제부터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나갈 때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은 은혜초보자입니다. 그러나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믿음의 성숙하고 온전한 지경에 이른 사람입니다. <여수의 애양원에 가면 나병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상실한 분들이 모여서 성서를 암송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손이 망가져서 점자를 읽을 수도 없는 딱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나만 성한 귀로 성서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70 세가 넘는 노인들이 되었지만 신약성경을 모두 암송합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간증하면서 “내가 문둥병에 걸려서 손도 망가지고 눈도 보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게 되었으니 내가 문둥병에 잘 걸렸소 잘못 걸렸소?”라고 물어보면 대개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그 분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 편 71 절과 72 절을 암송으로 들려준다고 합니다>.  

주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 뜻은 그저 평범하게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 능력이 강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면 금방 이해가 되겠는데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깊은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까? 약하지만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무기력하게 연약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가 힘이 있는 자에게 힘이 없는 자가 당하는 표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정말 힘이 약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무기력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온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 힘없는 자의 표상인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세상에 나무 막대기 둘을 열십자로 묶어 놓은 것에 달려 죽어가는 안타까운 줍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속하시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신다면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폭풍을 일으키시고 비바람을 일으키시어 굉장한 사건을 만들어 일을 하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십니다. 마구간의 밥통에 나게 하시고 거기서 누워 계시는 어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지극히 큰 사건이나 굉장한 능력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약함을 통하여, 지극히 무기력함을 통하여 자신의 전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약하게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어 가신 모습 속에서 들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을 모든 사람을 큰 힘으로 복종시키고 무릎을 꿇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모두가 부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약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십자가의 신비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강하여 짐이라고 하였을 때 주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큰 뜻을 깨우치고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란 약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심입니다. 바울은 비록 육체는 병고로 약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천지사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기로 하였고 12 장 10 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어째서 약할 때 강한가? 사람이 강하다고 느낄 때는 내 힘만 믿고 까불게 됩니다만 약할 때는 겸손하여 도움을 요청합니다. 강한 사람은 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가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함정에 빠지고 낭패를 당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고 자기 힘으로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전능자의 힘을 얻게 되고 강하게 됩니다. 자신이 약할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 하나님, 저는 미약하오니 역사하시어 주님의 능력의 불을 붙여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간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능력의 주님께서 온전하게 해주시고 능력으로 채워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는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서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함께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약하여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채우시고 온전케 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함을 알고 의지하는 자가 참으로 강한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후서 12 장 1 절에서 10 절을 통하여 우리는 신앙적으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문제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나에게 어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주어질 때, 나에게 어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올 때 아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하라는 명령이구나 그렇게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책 저런 방책을 찾아 거기에 의존하기보다는 제일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문제가 물러가고 기도할 때 힘이 주어지며 기도할 때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거듭 기도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회개를 명하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시련을 통하여 은혜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햇볕이 비추일 때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시련 가운데 쏟아지게 됩니다. 어떤 시련은 오히려 큰 은혜가 오는 통로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시련이 올 때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게 보지만 그리스도인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은혜를 채우시기 위해서 나를 준비시키시는구나!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까? 그렇게 믿음으로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약할 때에 가장 강하게 됩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오지 않습니다. 내 심령이 가난할 때 내가 연약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능력으로 채우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언제나 연약한 자로, 겸손한 자로 서있어야 합니다. 저는 설교 원고를 써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이만하면 잘 준비됐다고 기도하지 않고 올라갈 때는 성도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고 원고가 보잘 것 없어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얹어주옵소서 기도하고 하면 성도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어느새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저는 이 시간 한 기도문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기도를 지은이는 이름이 없습니다만 그 역시 시련을 통하여 깊은 은혜를 받은 분입니다. 함께 기도하십시다.

기도> 주님, 이전에는 저희가 철이 없어 은혜가 시련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고 시련은 없어지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은혜만이 축복이 아니라 시련도 축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시련에서 받은 은혜는 더할나위 없이 고귀하고 은혜로 받은 시련처럼 보배로운 것이 없습니다. 은혜와 시련, 이 둘은 내 마음대로 오고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모르는 사이에 큰 은혜가 임하고 내가 원해도 시련은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창작하거나 고안할 수 없고 시련을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고 교육하실 때 찾아옵니다. 다만 저희가 믿는 것은 주님은 저희가 감당하지 못할 은혜는 주시지 않고 감당하지 못할 시련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모두가 다 은혜요, 진실한 신앙으로 두드릴 때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어떠한 경우라도 주님만 찬송하게 하옵소서. 어떠한 경우라도 믿음의 절개를 지킬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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