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년 9 월 22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마태복음 8 장 28 절 - 34 절
제 목 : 돼지에 대한 연구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나안 성도 여러분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추석은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마태복음 8 장 28 절에서 34 절에 나타난 예수님이 일으키신 한 사건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이 누구누구입니까? 첫 등장인물은 예수님입니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 두 사람, 등장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세 번째 등장인물은 귀신들 역시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네 번째로 등장하는 돼지떼들입니다. 다섯 번째 등장인물은 돼지를 치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네 번째 등장인물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돼지와 돼지떼들”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할까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복음을 전하시던 중 가다라 지방에 가셨는데 거기에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말하기를 29 절입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때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를 그냥 둘 리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분명히 꺼지지 않은 지옥불 속으로 집어넣을 것이라고 미리 겁먹은 나머지 예수님이 자기들을 처리하시려는 방향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31 절에 나옵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 진대 돼지떼들에게 들여보내소서 한 대”. 왜 귀신들이 돼지떼들에게 들여 보내달라 하였을까? 물론 성경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만 귀신들이 돼지떼들을 좋아하거나 자신과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만 어떤 이유도 성경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을 허락하시고 “가라!” 하셨습니다. 32 절에 나옵니다.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살하거늘”. 귀신들이 돼지떼들에게 들어가자 그 돼지떼들은 전원 바다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맙니다. 마가복음 5 장 13 절에 보면 이 돼지떼들은 거의 2000 마리나 되는 많은 숫자였습니다. 왜 귀신들이 돼지떼들에게 들어가려고 했으며 왜 예수님은 2000 마리나 되는 많은 돼지떼들을 귀신들과 함께 몰살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이 시간 이 질문을 풀기 위한 예비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이 가지고 있는 돼지에 대한 관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돼지는 별로 밝거나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보통 동생물들의 어떤 특성이 있을 때 인간과 견주어 말합니다. 생각하는 인간을 갈대에 비한다든지 무엇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을 금붕어 IQ를 지녔다고 한다든지가 그렇습니다. “금붕어의 항변”이라는 얘기 아십니까? <당신들 말야.. 수족관에서 나를 키우는건 좋다 이거야..근데.. 달랑 두마리 집어넣고 물래방앗간 설치하는건 좀 오버 아냐? 그리구 말이야..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구 말하는데..당신들이 시간 재 봤어..? 또,에....그리구 말이야.. 당신들은 내 기억력이 3초라구 말하는데..당신들이 시간 재 봤어..?
재 봤냐구..? 당신들은 내 기억력이 3초라구 말하는데..당신들이 시간 재 봤어..? 재 봤냐구..?> 하나님의 은혜를 3 초도 안되어 까먹는 인간은 금붕어 IQ를 닮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동물을 사람에 견주어 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슴과 같은 동물은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함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메옵니다 하면서 다윗은 사슴을 자신의 영혼에 견줍니다만 돼지는 단 한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먼저 율법서에 나타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낙인이 찍혀져 있습니다. 우선 레위기 11 장 7 절에서 8 절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도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다 여겨 돼지를 사육하지도 않았습니다. 동양뿐만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돼지는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서양철학자인 John Stewart Mill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서양사람들 중 일부는 “돼지”를 애완동물로 키워 돼지머리에 스카프도 씌우고 목에는 목걸이도 걸어주고 또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슬람 사람들은 돼지를 저주하고 혐오하고 미워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보기만 해도 눈이 부정했다고 눈을 씻을 뿐 아니라 온 몸을 샤워하고 돼지소리를 들으면 귀가 부정하다고 귀를 씻고 돼지꿈을 꾸면 우리는 복권을 사거나 돼지꿈을 꾼 사람에게 그 꿈을 사려고 난리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꿈을 꾸면 앞으로 흉악한 재앙이 닥칠 것으로 여겨 성전에 가서 정결케 되는 제사를 드릴만큼 돼지를 혐오하였습니다. 우리는 돼지고기 삼겹살을 즐겨 먹지만 이스라엘인과 유대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이슬람교도들도 구약성경을 코란과 함께 자기네 경전으로 사용합니다만 성경과 함께 코란에서도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낙인이 찍혀져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이슬람 세력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만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싸우고 있습니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최대의 욕은 “돼지새끼들!”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상대방에게 “니들 죽으면 니들 시체를 돼지들과 함께 묻어주겠다”고 하는데 공언하는데 이야말로 그들에게 최대의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 지혜서라고 불리우는 잠언에도 이와 같은 부정적인 관념이 나와 있습니다. 잠언 11 장 22 절에 봅시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와 같으니라”. 여러분 돼지가 이가 빠졌다고 금이빨을 하여 희죽 웃을 때 금이빨이 빛이 나고 돼지가 코에다는 금고리를 하고 두 큰 귀에는 금귀고리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목에는 진주목걸이를 하고 피에르가르댕에서 나온 비단 스카프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어쨌든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돼지는 무척 부정적이고 불결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역시 돼지는 상쾌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 장 6 절에 봅시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또 돌아서서 너희를 공격할까 함이라.” 귀하고 값어치 나가는 것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자들에게 주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나 돼지는 개나 돼지 그 자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개와 같은 인간 돼지와 같은 인간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어쨌든 예수님께도 돼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뿌리박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점가에 “개미”라는 책이 3 권으로 하여 출판되어 나왔을 때 그 책은 한동안 우리날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란 프랑스 작가는 12 살부터 개미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개미만 가지고 20 년 동안 개미를 연구했습니다. 개미란 소설을 쓰기 위해 무려 12 년 동안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돼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습니다. 또한 “돼지학”이라는 학문적인 과목이 없습니다. 제가 12 간지로 보면 돼지띠인데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돼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인가 실업이라는 과목인지 무슨 과목인지 모르지만 “돼지”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돼지들의 그림들과 함께 나와 있었고 어쨌든 저는 돼지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과목 시험을 칠 때면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책에 나와 있었던 돼지들의 종류를 외우고 있습니다. 요오크셔, 바아크셔, 랜드 레이스, 라지 화이트, 폴란드 차이나, 햄프셔, 뉴햄프셔 등 돼지들의 종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자라난 곳에 돼지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돼지들이 먹이를 먹는 모습과 돼지새끼들이 어미 돼지들과 함께 있는 모습, 그리고 돼지들의 눈과 돼지코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을 했습니다만 이 시간 돼지들에게서 느꼈던 인상들을 몇가지만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돼지는 인사를 하거나 인사를 해도 받지 않습니다. 돼지는 같이 한 우리에 사는 돼지들과 교제를 하지 않습니다. 동료돼지들이나 그들이 한 뱃속에 태어난 형제자매 돼지라고 할지라도 자기들끼리 악수를 하거나 자기들끼리 눈인사를 하거나 저는 돼지들끼리 포옹하거나 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돼지한테 아무리 인사를 해도 돼지로부터 인사 받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밥을 주는 주인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라인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인사를 해도 무뚝뚝하게 서 있다가 내릴 때 다시 안녕히 가십니오 추석 잘 쇠십시오 해도 아무런 말을 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내리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속으로 저 사람은 돼지 닮았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둘째, 돼지는 지 먹을 것만 먹고 결코 자기 먹을 것을 이웃 돼지에게 나누어준다든지 옆에 있는 배고픈 돼지에게 양보하거나 지금 자고 있는 돼지를 위해 조금 남겨 놓고 먹는다든지 그러지 않습니다. 오직 먹는 일 외에는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돼지 눈은 언제나 먹을 것만 쳐다봅니다. 그러기에 돼지는 일편단심 먹는 일에만 집중해 있기 때문에 살만 찝니다. 약 이주 전 한겨레 신문에서 중국 베이징 하성봉 특파원이 보내온 기사를 읽었습니다. 인민일보 등 중국언론이 지난 10 일 위난성 돼지사육협회가 쿵밍 세계박람회장 부근 윈산춘에서 실시한 “돼지 무게대회“에 700 kg 짜리 돼지가 출전해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돼지’로 기네스북 신기록을 신청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돼지 주인에 따르면 이 특대 저팔계는 다른 돼지들과 같은 보통사료를 먹었으나 지금은 한끼에 7 kg의 사료를 먹어야 배부를 정도라고 말하였습니다. 돼지는 자기 뱃속을 채우는 일 외의 다른 일들은 다 부수적인 일입니다. 먹고 살찌는 것이 돼지가 존재하는 존재의 이유입니다. 셋째, 돼지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주인이 먹이를 퍼주기 위해 저리 가라고 해도 가지 않습니다. 먹이를 주기 전에 돼지들은 먹이통에 올라와서 꿀꿀거립니다. 주인이 오면 꿀꿀꿀 합니다만 주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인이 먹을 것을 빨리 달라고 꿀꿀꿀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먹이통에서 발을 비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먹을 것을 퍼부어 줄텐데 도무지 비키지 않아서 결국 몇 대 때려야 꿀꿀 하면서 비켜납니다. 저는 한번도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아멘하면서 순종하는 돼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넷째, 돼지는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 병리학 교실 채찬희 교수님은 국내에 흔치 않은 돼지연구가입니다만 이 분에 따르면 돼지도 여러 질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돼지가 걸리는 병 중에는 가장 큰 병은 식욕부진이라는 병입니다. 그야말로 돼지가 이 병에 걸리면 삶의 존재이유를 상실하는 그런 큰 질병입니다. 이 질병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우리에서도 이 병에 걸린 돼지도 있고 그렇지 않은 돼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식욕부진에 걸린 돼지가 못 먹고 있을 때 식욕이 왕성한 돼지가 그렇지 않은 돼지를 위문하거나 등을 두드려 준다든지 아파 밥을 못먹고 있는 돼지를 위하여 죽을 쑤어 준다든지 옆에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간호해주는 돼지를 지금껏 한 마리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섯째 돼지는 하늘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향해 은총을 비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돼지는 오직 먹을 것만 바라보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기거나 두 손 모아 기도하지 않습니다. 돼지의 시선은 오직 먹을 것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돼지는 자기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한 지성은 오직 생산하고 소비하는데만 만족해 있는 산업사회의 인간을 1 차원적 인간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마르쿠제는 이 "일차원적 인간"들은 끊임없이 소비하는 데 지칠 줄 모르고 먹고 쓰는데 자신의 욕구를 바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가 고상한 말로 일차원적인 인간이라 하였지만 실상은 산업사회에서 조련된 인간을 한마디로 ”돼지“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여섯째, 돼지는 부단히 꿀꿀거리지만 결코 노래를 부르거나 주인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배가 채워졌다고 감사하여 돼지가 주인에게 꾸벅 인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만족하면 양지바른 구석에 가서 쿨쿨 잡니다. 돼지의 주요 일과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꿀꿀거리면서 밥을 달라거나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쿨쿨 자는 일입니다. 꿀꿀과 쿨쿨입니다. 꿀꿀과 쿨쿨 하는 사이에 살이 뒤룩뒤룩 쪄가는 일입니다. 허나 돼지는 잘 먹게 해주었다고 잘 자게 해 주었다고 주인에게 노래를 불러 드리거나 매번 양식을 주는 주인에게 단 한번도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돼지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릅니다. 이번 추석에 상을 채려 놓을 때 먼저 젓가락을 들자마자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 있는데 자기도 좋아한다고 먼저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돼지와 약간 닮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예의를 지킬 줄 아는데 돼지는 먹을 것이 앞에 있으면 오직 주둥이 쳐 박고 부모건 누구건 나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먹을 것만 보인다는 일심으로 제 먹을 것에 바쁩니다. 부모를 위해 조금치라도 배려하거나 최소한의 예의도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신을 위해 돼지새끼들은 케익 하나를 준비해 촛불을 밝혀 드리면서 Happy Birth Day 노래를 합창하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돼지에 대해 일곱가지 돼지적 속성을 말씀드렸습니다만 만일 우리 보편적 인간들이 이 일복가지 중에 네가지 속성이 있다고 하면 돼지라고 할 수 있고 다섯이나 여섯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꿀돼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5 년에 출품한 영화 중에 “개같은 내 인생”(My Life as a Dog)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만 라쎄 할스트롬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인 '개 같은'이란 말은 우리식 대로 해석하면 큰 욕이 되지만, 스웨덴의 관습에서는 좋은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돼지같은”이라는 말을 하면 서양이나 동양이나 욕이 되고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가장 큰 심한 욕이 됩니다. 우리가 “돼지같은” 이라고 했을 때 돼지를 사람과 견주어서 말하는 표현법입니다. 그런데 “돼지보다 못한“ 그렇게 말하면 ”돼지같은“이라는 욕보다도 더 심한 욕입니다. 사람도 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이 참으로 다수입니다. 귀신들이 돼지떼들에게 보내달라고 했을 때 왜 예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을까요? 만일 예수님 주변에 사슴이나 양들이 노닐고 있었는데 귀신들이 저 양떼들에게 보내달라고 했을 때 과연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을까요? 성경에는 사슴이나 양떼들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리떼들로부터 양떼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으니 귀신들이 만일 양떼들에게 들어가겠다고 하였다면 그것을 허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 가운데는 어떤 상징성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만드셨을 때 입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인간들을 가르쳐 말씀하셨듯이 돼지떼들에게 귀신들을 보내어 몰살시키신 것도 어떤 예수님의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인간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을 위해 살아가는 돼지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자기 먹을 것만 알지 주변에 고통 당하거나 어려움 당하는 일을 외면하는 돼지떼들, 나누려하지도 않고 섬기려 하지 않은 오직 저만의 배를 채우려 하는 돼지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소유하는 일에, 먹고 차지하고 배를 채우는 일에만 꿀꿀거리는 멀리 있지 아니하고 가까이 있는 돼지떼들, 1 차원적 인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신을 있게 하고 존재케한 분을 기억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돼지떼들이 너무도 많이 널려 있습니다. 그저 꿀꿀거리고 그저 쿨쿨 자는 돼지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은 인생들이 얼마나 이 세상의 들판에 널려 있습니까? 로마서에 보면 이런 인생들을 금수와 같은 인생들, 돼지같은 인생이라고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 장 21 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오늘 성경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 가운데는 세 가지로 하나로 합성되어 있습니다. “귀신들”과 “돼지떼들”과 “죽음”은 하나로 일체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신들을 멸망시키십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배만을 채우려는 돼지떼들과 같은 인생들도 멸망시키십니다. 그런 인생들이 아무리 2000 마리와 같이 많다고 해도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신들과 돼지같은 인생들은 결국 죽음과 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본문에는 귀신들린 자 두 사람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귀신들이 빠져나가고 그야말로 돼지 같은 인생을 살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온전한 회복을 얻었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멀쩡한 인간으로 자유함을 얻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며 동료인간들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께서는 회복시켜 주시고 정상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개와 같은 인생 돼지와 같은 인생들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도 않고 진주와 같이 값진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진주목걸이를 걸어주고 거룩한 것들을 가득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 때, 온전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살 때, 감사하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살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 속에 거룩한 은혜로 채워주시며 진주와 같은 하늘의 보화를 우리 인생에게 걸어주시어 아름답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택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자유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선택하여 결국 귀신이 들어와서 함께 바다로 빠져 들어가 죽는 것도 그 사람의 선택이요,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귀한 형상으로서 거룩한 은혜를 받고 하늘의 보화로 넘쳐 할렐루야 감사하며 기도하며 기쁨으로 사는 것도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한번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 이는 좋은 양복을 선택할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한번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사느냐? “그저 차지하며 소유하며 누리며 나 홀로 즐기며 배부른 돼지같이 살 것이냐! 아니면 나누고 베풀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존재하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 살 것이냐?에 놓여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람으로 지으셨으니 돼지 같이 살지 않게 하시고 사람같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 저희 속에 돼지를 닮아가는 그런 속성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가라!“고 명하여 주시옵시고 저희 속에 이기주의 향락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귀신들이 혹 있다면 꾸짖어 쫓아내 주시옵시고 오직 온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나누며 베풀며 더불어 함께 존재하는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지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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