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년 10 월 6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에베소서 2 장 1 절 - 7 절
제 목 : 왜 사느냐고 묻거든!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나안 성도 여러분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 오늘 성경말씀이 에베소서 2 장 1 절에서 7 절까지입니다. 제가 글자수를 세어 보았더니 이백예순네자였습니다. 이제부터 이 말씀을 다이어트를 해서 말씀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을 딱 열 자로 줄여 봅시다. 핵심이 되는 구절은 에베소서 2 장 4 절에서 5 절에 있습니다.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말씀을 좀더 요약해 봅시다. 주어는 “하나님”이시고 동사는 “살리셨다”입니다.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는데 무엇 때문에 살리셨느냐?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으로 살리셨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살리신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입니다. 이를 열 마디로 다이어트하면 “그 큰사랑으로 살리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의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시기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를 살게 하셨고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모두가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랑과 관계없이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진 일은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일도 사랑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신 일도 사랑을 빼놓고 형용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이예요! 꼭 해바라기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하시는 일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인생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들어야 할 사실은 첫째 우리는 미움을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태어나게 하신 것은 천하보다 귀한 무엇인가 고귀하신 뜻이 계십니다. 하나님 창조하신 그 어느 것이든지 이름 없는 잡풀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그것 중에 존재된 뜻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존재하게 된, 태어나게 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으며 그 큰사랑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미움을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시당하기 위해서 누구에겐가 따돌림을 당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설움당하기 위해서 누구들에게 왕따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가장 듣기 싫은 말, BEST OF THE BEST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얘, 그래 너 같은 걸 낳느라고 느그 어매가 미역국 먹었겠구나! 쯔쯔쯧!” 사랑을 한없이 받기에도 한없이 짧고 부족한 인생인데 어떻게 미움을 받기 위해 한 인생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본부에서는 직원들의 생일이 오면 직원 열 다섯명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생일축하선물도 주고 생일축하노래도 해줍니다. 제 생일도 축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생일 축하노래를 1 절은 <생일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생일 축하합니다> 젤 첨에는 잘나가더니 2 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어? 지지리도 못난게 왜 태어났니>. 물론 웃으려고 불렀지만 그 노래를 듣고 먹었던 생일케익이 소화가 되지 않아 한참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무시를 받고 미움을 받을 때 따돌림을 받고 왕따를 당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존재성을, 자신의 identity를 어디에 둘지 몰라 불행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신경쇠약도 걸리고 생이 다가기전에 생에 자신이 마침표를 스스로 찍습니다. 불행하기 위해 이 인간세계에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은 둘째 우리는 미워하기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큰사랑으로 살리신 그 사람을 미워하라고 존재하게 하셨겠습니까? 만유의 존재하는 생명은 사랑이지 미움이 아닙니다. 세상에 누구를 미워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그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 사람의 존재이유가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해꼬지하고 누구를 해치고 누구를 따돌리고 누구를 증오하기 위해 태어난 인생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미워하지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에서 보배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 장 22 절 말씀입니다. 형제를 미워하여 노하거나 형제를 미워하여 “라가라!” 라가란 뜻은 남자에게는 “무가치한 놈!”, 여자에게는 “무가치 한 년!“ 이라고 말하고 자매를 미워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은 지옥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하나님 그 크신 사랑으로 존재하게 된 인생이 그 목적과 반대인 미워하는 인생을 산다면 예수님은 단호히 그를 지옥불에 들어간다 하셨습니다. 싸우나에 들어가서 한 10 분만 있어도 무척 뜨거워서 문을 박차고 나오는데 지옥불 꺼지지 않은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면 그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모든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이 아니라 미워해서는 안될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털끝만한 미움도 가져서는 안되고 우리 마음속에 미움의 ”ㅁ“ 자도 지녀서는 안됩니다. 미워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되지만 미워하는 말도 해서는 안됩니다. 지옥불의 엄청난 뜨거움이 혀끝과 입술과 그 근원이 되는 마음을 사를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초등학교를 지나가다가 본 일입니다. 어떤 애가 엎어지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징징 울자 어떤 엄마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면서 굉장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넌 누굴 닮아서 지지리도 못났니! 털어!!” 하면서 아이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징징 우는 모습과 화를 내는 엄마의 얼굴을 안타깝게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미움을 당하는 이들은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남의 불행을 조장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얼마나 우리 인생은 서글픈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미움을 받는 사람의 맘속에는 지옥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미움을 주는 사람의 맘속에는 반대로 천국이 존재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역시 같은 지옥이 존재합니다. 미워할 때 지옥에 가지만 미워하는 사람의 맘속에도 이미 존재하는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알아야 할 사실은 셋째,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 여러 가지 동사들이 나옵니다만 그 두 동사들을 크게 분류해 보면 “하라!”, 그리고 “하지말라!” 두 동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많은 동사들이 있습니다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런데 이 모든 “하라!”는 내용은 결국 무어냐/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부모를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값주고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라! 요약하고 요약하자면 너는 사랑하기 위해 존재되었다 그 말씀입니다.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 3 학년 때인가 저는 죽어라 국민교육헌장을 외웠습니다. 못 외우면 교실 바깥에 나가서 의자를 들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기 때문에 따뜻한 교실 안에 있으려면 외워야 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첫 부분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우리가 왜 태어났을까요? 여러분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까? 중학교 때 저희 집에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좋아 어디를 가든지 그 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여학생들이 보면 야! 쟤가 벌써 저런 꽤 수준있는 책을 읽는구나! 그렇게 말해주기를 제가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 책을 가지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 책이 저자가 누구인지 루이제 린저인지 김형석 교수님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그 책을 언제나 끼고 바깥에 나갔지만 한번도 그 책을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느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실랍니까? 우리 교회에 등산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아니 왜 등산하시죠? 묻는다면 “아 그거 말입니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 명답을 하실 분도 많습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했던 마호멧이 언젠가 그랬다고 합니다. “산아 이리 오너라!” 한 종교의 교주가 이리 오라고 했는데도 버르장머리 없이 산이 마호멧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호멧이 다시 산에게 말했습니다. “안 올래? 그럼 내가 가마!” 하면서 산을 향하여 걸어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당신, 왜 살아!” 물었다면 여러분은 “아! 태어났으니까?”라고 명답을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런데 당신 왜 태어났어?”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랍니까? “울 엄마 아빠가요! 어느 바람 부는 날에요, 갈대밭에 갔는데요, 그만 저를 가졌대요! 저는 계획에도 없었대요, 가져 가야할 것을 안가져갔나봐요!!” “왜 사느냐고 묻거든!“ 이 질문으로 질문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우리 인간 실존과 우리 인생의 상황이 하나의 질문이라면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진리의 대답입니다. 약 2-3 주전에 저는 집에 있는 책을 주제별로 정리했습니다. 정리하다 보니 모든 것들이 주제별로 되지 아니해서 서로 키가 같은 것들을 나란히 하여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애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잘 정리 해 놓았으니 만지지 말아라!고 했더니 아들이 ”아빠, 이 책들은 전시하기 위해 있는거죠!“ 하면서 핵심을 찔렀고 딸은 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책정리를 마무리할 시점에 아내가 도와주었는데 아내는 한 책을 들고 이 책은 어디다 꽂아야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책제목이 “BORN TO LOVE"였습니다. born은 태어난 그 뜻이고 to love는 사랑하기 위하여 그 뜻이니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그런 뜻의 책제목이었습니다. ”BORN to be loved“는 역으로 사랑받기 위한 그런 뜻입니다. 저는 그때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란 책제목이 떠오르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이 두 책제목이 마음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이런 결론이 되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어?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지!”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달리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인을 용서해 주려고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죄인을 용서해줍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오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성경의 핵심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지금 와 있으며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우주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우주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사람이 되며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고 사람은 사랑할 때 삶의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시간에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왜 노래를 부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사랑하며 노래하며 살기 위해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부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알아야 할 사실은 넷째,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근대 실존주의 철학자 그 유명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존재란 허무할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무엇을 해야하는 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 나 자신도 모른다. 그는 인간을 세계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채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거장 하이데거도 인생과 존재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데 제 아이 중 하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신철이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니면서 부르는 콧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x2) /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복음성가는 이민섭 씨가 작사작곡한 것인데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렇지 아니하건간에 상관없이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이왕 태어난 거 오지게 사랑도 받고 또 오지게 사랑하다가 가는 겁니다.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덥썩 안기는거죠! 거기 가서 또 오지게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제 진성구 목사님의 장모님이신 정재은 권사님이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을 82 년 동안 하시다가 가셨습니다. 거기 뭐하러 가셨습니까? 이 땅에서 하남님 사랑 많이 받고 또 예수님 사랑으로 사랑 많이 하시다가 이제 하나님께로 더 큰사랑 받으시러 떠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사랑입니다. 인생이 무척 복잡하고 다단해 보이지만 그 핵심을 파헤치고 그 핵심에서 다시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자면 바로 사랑에 도달합니다. 인생이 일하고 쉬고, 사고 팔고, 울고 웃고, 보고 듣고, 모이고 흩어지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러지만 결국 그 내면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사랑입니다. 알멩이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일입니다. 어떤 이가 “내 인생의 절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노래했습니다. “그대 나의 사랑”이란 노래도 있습니다. 인생의 절반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일에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받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없으면 인생의 절반이 어디로 날라가고 사랑받는 일이 없으면 나머지 절반도 증발해버려 하이데거 말대로 “존재와 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빼버린 인생은 단지 앙꼬가 없는 찐빵이 아닙니다. 아예 찐빵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도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고 신비스럽게 보이지만 성경도 단순합니다. 예언서가 있고 시가가 있고 지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도 있고 칭찬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속을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면 결국 성경도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무척 사랑하시되 오지게 사랑하시고 오지게 당신의 형상인 사람들로부터 오지게 사랑을 많이 그리고 뜨겁게 받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이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핵심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사랑받으실 때 가장 최고로 영광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은혜를 내리시는 뒷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역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과 사랑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을 받으시는 것을 하나씩 빼어 놓는다면 거의 남는 것이 없습니다. 가수이고 목사님인 조영남이 작사작곡하여 1979 년에 발표한 성가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그때에 / 하늘과 땅이 만들고 / 산과 바다를 만들던 그때에 에덴 동산 저편에 / 한 쌍의 인간을 살게 했네 / 생명어린 숨결과 따뜻한 마음만의 인생은 사랑 영원한 사랑 / 에덴동산 저편에 미움의 싹이 움트던 그때부터 / 에덴동산 저편에 싸움이 시작되던 그때부터 / 조그마한 거짓으로 인간은 죄악에 빠졌네 / 생명이 멀어지고 영혼이 사라져도 / 인생은 사랑 영원한 사랑 / 이천년전 유대땅에 한 어린아이 탄생했던 그때부터 / 세상죄 짊어지고 남 위해 피흘렸던 그때부터 / 사랑이 미움 이기고 평화는 전쟁을 이겼네 / 마지막 숨을 거두며 그가 남긴 한마디 / 인생은 사랑 영원한 사랑 / 인생은 사랑 영원한 사랑. 저는 조영남이 노래하는 것을 2 M도 안 떨어진 곳에서 들었습니다. 그래 그 감동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때, 인생은 사랑 영원한 사랑” 인생과 사랑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인생이란 시간이란 보자기에 쌓여져 있습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인생은 하루 하루의 시간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루 24 시간 일분은 60 초 한시간은 60 분 그러므로 한시간은 3600 초 하루는 86400 초입니다. 하루를 잘 사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주어져 있는 하루라는 인생의 보자기에 무엇을 넣으시겠습니까? 그냥 보자기와 인생의 보자기와 차이점은 그냥 보자기는 무엇을 집어넣었다가 다시 뺄 수도 있는데 인생이란 보자기는 한번 집어넣으면 다시 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보자기에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나중에 그 채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갔을 때에야 집어넣었던 것을 다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칭찬을 받을 수도 야단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혜롭고 현명하여 보다 가치있고 가장 좋은 것으로 여러분의 보자기를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채워 놓을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 원망과 후회로 채울 수 있습니다. 뭘 채워 넣든지 채우는 것이야 자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담임목사로서 제가 여러분에게 무척 권면하는 것은 여러분의 보자기에 “사랑을 함”으로 채우시고 “사랑을 받음”으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 때에 어떤 분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주셨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메모를 남겼습니다. “샬롬! 사모님께 부끄럽지만 제가 담은 김치랍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드립니다. 맛이 워낙 쩜쩜쩜 사모님! 드시고 ”이런 김치맛도 있구나..“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드리고 싶어서 드립니다.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사랑에 - ” 정성껏 싼 보자기 안에는 그리고 간단히 쓴 그 글에는 사랑을 받음도 있었고 사랑함도 잔잔히 배여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하늘나라 바로 그 옆집(THE NEXT DOOR TO THE KINGDOM OF HEAVEN)에 와 있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늘나라의 기쁨은 엄청난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조그만 김치를 나누어 먹고 간단한 글을 몇자 적는데도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일에 바로 거기에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나라와 그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존귀한 주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보자기에 소중하고 소중한 사랑으로만 -사랑을 받고 사랑으 하는 일- 정성스럽게 싸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귀한 가르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크신 사랑으로 다시 살려 주심을 감사하오며 사랑으로 저희 생을 존재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 사랑받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사랑을 받으며 늘 기쁨 가운데 하늘나라를 누리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크신 복을 주시옵시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뜨겁게 사랑받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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