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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삶에는 뜻이 있다.

관리자 2010-12-14 (화) 11:18 15년전 2781  

2002 년 2 월 24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 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말씀 : 이사야 43 장 21 절

제 목 : 삶에는 뜻이 있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삶에는 뜻이 있다> 그렇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금빛 나는 종은 한 집사님이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로운 예배를 위해 봉헌한 것입니다. 여기 존재하니까 그 존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오늘부터 예배시작 전에 쳤고 앞으로도 칠 것입니다. 사물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 틈에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에도 우주적인 뜻이 담겨 있으며 공중을 나는 새도 하나님의 뜻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사물이나 생물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사람으로 존재하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딱 한 절 말씀이지만 그 말씀 속에 우리 인생의 전 목적을 함축할 수 있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43 장 21 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뜻 속으로 깊이 들어가 봅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여기서 “지었나니”란 히브리어로 “야챠르티”인데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뤄 질그릇을 만들 듯 제조했다는 뜻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었다면 그 마음 속에 이미 그것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음이 분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아무런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질그릇이 우연히 존재하여 그 자리에 있게 되었거나 토기장이 없이 질그릇이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할 리 없습니다. 질그릇이 분명히 만들어졌고 어떤 목적을 위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여기서 이 백성이란 좁은 뜻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나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을 때 바로 자신을 위해서 지으셨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이 백성이란 좀더 넓은 뜻으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지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내가 이 백성을 지을 때 이 백성을 위해 지었나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내가 이 백성을 나를 위해 지었나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수백만권의 책으로 이렇게 저렇게 방대하게 설명합니다만 성경은 단 딱 한구절로 인생의 목적을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좀 더 살펴보십시다.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무엇을 위해 지었습니까? 이에 연결되는 21 절 후반절을 보십시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찬송이 무엇입니까? 찬송이란 한마디로 노래를 부르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을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가곡이요, 아리아요, 뽕짝과 트로트입니다만 하나님을 위해 노래부름은 찬송입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듣기를 좋아하시어 찬송을 받으시려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자,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내 연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연인이 나를 눈 내리는 날 호젓한 산장에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페치카가 있고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페치카 앞에는 양털 의자가 있는 소파가 있었는데 거기에 날 앉게 했습니다. 연인은 바로 그 앞에 주저앉아 날 쳐다보면서 기타를 치면서 은은한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연인아 너는 아니 워- 이런 나의 마음을“ 연인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아마도 나는 어떤 알지 못하는 행복의 늪 속으로 깊이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날 위해 연인이 노랠 부른 그 날 밤만 그 순간만으로 해도 내 삶은 의미 있었다고 느꼈을 것이고 그야말로 잊지 못할 겨울 연가로서 페치카 장작불에서 느끼는 따뜻함과는 전혀 새로운 따뜻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행복하게 눈도 감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양털의자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저나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께 은은한 노래를 불러드렸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나님 역시 깊은 행복의 늪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바로 그런 느낌에 빠지고 싶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달리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연모하여 연가를 부르게 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그대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대목을 부를 때, 하나님도 그 순간만은 아마도 하늘에 두둥실 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대단히 감성적이시며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사람이 다정한 멜로디로 노래하는 아리아를 듣고 싶으셔서 사랑의 노래, 찬미의 노래를 듣고 싶으시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창세기 1 장 1 절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한번이라도 태초이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호올로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이전에는 하나님의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군천사들도 나오지만 그들 역시 피조물로 영원 전부터 태초이전에도 있었던 영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태초이전에는 공허와 혼돈 가운데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은 외로우셨을 것이며 분명 쓸쓸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셨지만 그의 전지전능하심이 하나님의 외로움을 지워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뭔가 공허하고 허전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얘기도 나누고 자신과 장난도 치고 놀며 자신이 때로는 야단도 치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 눈물도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닦아주고 챙겨주는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외로움 때문에 자신과 형상이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휫바람이나 풀피리도 불어주고 때로는 얘기를 걸어주는 그래서 하나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이가 절실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 자신의 형상을 닮은 남녀로 쌍을 만들어 기쁨조를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자신의 속 심정을 정확하게 꼬집어내는 말을 마침내 토해내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기 첫장에 보면 명시적으로 하나님은 내가 인간을 만든 목적은 첫째는 이렇고 둘째는 이러이러하다고 한 마디도 안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삼라만상을 하나씩 창조하실 때마다 그 뒤에 바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이 보시기에 좋은” 보시기에 좋으면 기쁜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드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이 뒤따른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최고의 기쁨을 위해 인간을 만드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우리 인생을 만드셨는데 우리 허물진 인생들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 인생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물어본다면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존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열심히 이리저리 살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자신을 위해 삽니다. 더더군다나 자신의 삶의 존재이유가 하나님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일이라고 꿈엔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서 좀 더 누리고 좀더 많이 차지하고 좀더 오래오래 살아 낙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 말씀은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의 그런 착각과 오류를 시정해 줍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너희는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기 위하여 존재하고 너희는 나에게 찬송부르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게 된 존재”라고 딱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나신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가무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얼마나 좋아하시는가 하면 하늘나라에서도 찬송이 계속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줄 아는데 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예배에는 사도신경, 설교말씀, 헌금, 성찬식, 세례식 같은 다른 예배요소가 없습니다. 오직 찬송이 하늘나라 예배에서 노른자위를 차지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누구입니까? 러시아의 “스카이꽉찔러!”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스카이 콱찔러”가 있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는 핵심을 콱 찌른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핵심을 찔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었던 시편 69 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뿔이 달린 송아지 제물보다는 찬송을 기뻐하신다”고 하였고 “하나님은 찬송 속에 거하신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알기에 찬송시를 150 편이나 지어 바쳤으며 그 안에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최대의 노래가사와 가락을 담았습니다. 시편 146 편 2 절에서는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7 편 1 절에서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찬양하였으며 시편 마지막 편 마지막 절 150 편 6 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의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인생인 여러분에게 세 가지 사항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과 뜻을 재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찬송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요, 존재의 이유요 삶의 뜻이요 생의 가치요 의미인 것을 다시금 새롭게 재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노트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없다면 여러분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것을 적으시고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찬송을 많이 부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순간 순간들을 찬송으로 은은하게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찬송 중에 하나가 544 장입니다. 1 절이 이렇습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그렇습니다. 하늘 이편에서 잠시 반짝이다가 하늘 저편으로 다 가지 못하고 명멸해 사라지는 별똥별과 같이 짧은 인생, 차 한잔이 식는 순간과 같이 금방 식어가는 인생, 항상 찬송 부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존재의 충만함을 어디 다른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찬송을 부르는데서 느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20 여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적어도 일만번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계산기로 두드려 보면 간단합니다. 하루에 찬송 한 장은 적어도 부르고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예배순서에 있는 그대로 4 번 찬송을 부르면서 20 년을 산다면 정확하게 일만번 정도 정확하게 일만사백이십번 정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머피와 샐리의 법칙을 아십니까? 머피의 법칙은 모든 일이 연짱으로 잘 안되는 것이고 샐리의 법칙은 모든 일이 하나같이 연짱으로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 있지 않습니까?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을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는 인생에게는 샐리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살면 뭐든지 잘됩니다. 내가 인생을 신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찬송을 부르는 삶에 개입하셔서 인생 신나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찬송을 부르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사는 인생은 머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뭔가 잘 안됩니다. 찬송도 부르지 않고 지내는 인생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하나님도 그런 인생, 신경 끄고 사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 때도 찬송과 죽마고우로 잘 지내야 하겠지만 인생을 마치는 순간에도 찬송을 부르면서 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 찬송부르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인생에다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에도 그냥 가시지 말고 찬송을 부르며 대미를 장식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가까이 왔을 때도 그냥 가시지 말고 내가 그런 날이 온다면 찬송가 장을 꼭 부르면서 가겠다는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공로목사님은 백수를 하실 것입니다만 이 세상 이별하시는 날 분명히 그 찬송을 부르실 것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하여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인생의 밤이 다가올 때 “밤이나 낮이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그 찬송도 좋습니다. 그런데 숨이 가빠서 금방 가실 것 같을 때는 찬송가 한 장 다 부르려고 하지 마시고 “영-광 영-광 아-멘 아-멘” 하고 영광 두 번 아멘 두 번하고 이 땅의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좋습니까? 그것보다 더 급하게 가실 것 같으면 할렐루야 하고 가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사시든지 찬송하고 사시고 어떻게 가시든지 찬송으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찬송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함입니다. 찬송을 왜 부릅니까? 찬송을 부름 속에 더 깊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주일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꼭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개그맨 강성범이 하는 <수다맨>과 <연변총각>으로 나오는 개그콘서트는 꼭 봅니다. 강성범이 나오면 모두가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가 하는 개그가 무척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그가 패러디해 놓은 것을 다시 패러디한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 하늘나라에서는 땅에서 집사 50 년 하고 온 사람은 명함도 못내밉네다. 그래도 한 70 년쯤 하고 와야 아! 저거이 ”아멘 좀하갔구나“ 합니다.” 그런데 만일 강성범씨가 어느 주일밤 텔레비전에서 개그 콘서트를 하기 전에 “오늘 이 개그콘서트는 저기 광주가나안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저의 열렬한 팬이신 배태진 목사님을 위해 바칩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그와 나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그렇게 말할 리 없겠지만요- 제가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도 기분이 무지막지하게 째질 것입니다. 개그 콘서트란 시청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습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마치 개그 콘서트와 같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들이 기쁨의 콘서트인 것입니다. 예배에서 우리가 찬송을 부릅니다. 왜 부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기쁨으로 드리기 위해서 부릅니다. 찬송과 영광은 한 배에서 나온 일란성 쌍둥이와 같습니다. 한 통속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약 10 년 전인가 수원 중앙침례교회에서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였는데 한 재미있는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전체를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충 재구성해보면 이렇습니다. 지금은 강 장로님이시지만 옛날에 그 남자는 주색잡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남자의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성도였는데 남자가 주색잡기에 골몰할 때마다 아내는 남편을 탓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더욱 매달려 기도하면서 남편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그 남자는 주색잡기 중에서도 화투치는 것을 좋아했는데 화투의 여러 종목 중에서도 고스톱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화투를 치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이봐 강씨! 이번에는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내가 정말 죽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할래?“ 대답을 하기 전에 ”내가 죽으면 먼저 영안실에 나를 안치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하면서 운을 뗐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그 다음이라니?” "그 다음에 영안실에서 또 패 돌려야지!" 그런데 그가 어느 날 한꺼번에 엄청난 돈을 잃었습니다. 죽고만 싶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도 아내는 새벽기도에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남편 이제 그 발걸음을 주의 성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남자는 새벽 거의 다섯시가 되어 면목이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불이 켜져 있는 교회당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아내가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내와 성도들은 박수를 치면서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목사님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 모든 말씀이 마치 자신을 위해 하는 말씀과 같아 그때 모든 돈을 다 잃고 허탈한 바로 그 죽고싶은 심정에 복음이 그 남자의 폐부 깊숙이 찔렀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이 돌아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불러야 할 손으로 화투만 쳤구나!”,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이 화투패만 열심히 돌렸구나!” 하면서 회개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까지 주색잡기로 날밤을 새웠는데 이제 주님 손을 잡고 살게 해주십시오! 기도했습니다. 주색잡기와 주손잡기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엄청나게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 예수님 만나, “이거”(담배잡는 손), “이거”(술잔잡는 손), “이거”(화투패 잡는 손), “이거”(당구큐대 잡는 손), “이거”(딴 여자와 노는 것) 다끊었네! 이것들이 주색잡기의 다섯 가지 아닙니까? 이것 다섯을 다 합한 것보다도 예수님이 훨씬 좋다네! 하면서 앞으로 주님 손잡고 화투치는 손으로 찬양하는 박수를 치고 화투패 돌리기보다는 이제 이왕 돌리는 것 주님께 영광돌리기로 했다네! 그렇게 전도하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헛된 욕심과 부질없는 탐욕의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기보다는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바치는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분이 교인이 되겠다고 해서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마침 그 분 집에는 북한을 여러 번 다녀온 친북인사가 있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노래를 했는데 이 분이 발동이 걸렸는지 한 자리만 부른 게 아니라 두 곡을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첫 번째는 “장백산 굽이굽이” 그런 가사였고 두 번째 부르는 노래가 하두 씩씩하고 기개가 있어서 저도 한번 조용히 따라 불러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김일성 장군님께 바치는 노래”였습니다. 내일 모레면 제가 북한에 있을 것입니다. 2002 년 남북 새해맞이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남과 북의 모임이 금강산에 있을 예정입니다. 만일 제가 그 때 함께 따라 부르면서 배웠던 그 장군님께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면 북쪽 사람들은 “남조선 목사래 은혜가 충만하구먼!”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노래에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 있고 장군님께 바치는 노래도 있습니다만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우리 하나님께 바치는 노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 성도님들의 인생이 통째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조선일보에 나온 만화 광수생각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가는 만화그림이 상단에 있고 그 밑에는 묘비석이 있는데 아무런 글귀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싶었습니까? 오늘 제가 당신이 살아 생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당신 앞에 우뚝 서 있는 돌은 미래 당신의 묘비석입니다. 당신의 묘비에 쓸 글을 스스로 적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짧은 한 컷의 만화였습니다만 무엇인가를 많이 느끼게 했습니다. 살아생전에 내 묘비명을 한 마디로 한번 적어보는 일은 내 인생을 어떤 목적에 의해 이끌어갈 것인가를 내 인생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한번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 시간 미래 어느 순간 여러분의 묘비에 적을 수 있는 단 한문장의 좋은 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 1 장 11 절 말씀입니다. 축원과 함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존재함을 다시금 가슴 속게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찬송을 되도록 많이 불러 여러분의 인생을 찬송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일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이 더욱 행복해지시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할렐루야 찬송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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