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년 2 월 28 일(목) 오후 10 시 에스더 기도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말씀 : 누가복음 10 장 30 절 - 37 절
제 목 :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할렐루야! 오늘은 에스더 기도회의 날입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심정으로 기도한 여인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가 에스더 기도일을 정한 것은 민족을 위하여 에스더 여인처럼 기도하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남북 모두 합쳐 칠천만 겨레입니다. 남쪽 4700 만 북쪽 2300 만 해서 칠천만 겨레입니다. 에스더가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는 자신이 유대인이었으므로 자신을 위한 기도였으면서도 민족을 위한 기도의 두 차원을 포함하였듯이 여러분이 드리는 에스더 기도회는 여러분이 칠천만 겨레에 속하여 있으니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기도요 민족을 위한 중복기도 두 차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저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을 여러 각도로 해석합니다만 저는 오늘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성경이 해석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 아멘하게 됩니다. 성경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오늘의 상황 속에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을 “한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5 천년 동안 969 번의 외침을 당하였습니다. 명성황후를 보시면서 우리 약소국인 우리 민족이 이리 뚜드려 맞고 저리 뚜드려 맞는 그런 역사였습니다. 나라의 국모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서 잡혀가 찔려 죽고 화장을 당하는 그런 역사를 근대사엑서 경험하였습니다. 5000 년 역사 동안 너무도 많은 전쟁을 경험했고 역사가들에 의하면 전쟁이 없이 펴화로운 나날들을 지내온 때는 별반 없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삼국이 형성되면서부터 수없이 싸우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서 수없는 백성들이 죽어갔고 이 강산은 피로 물들여졌으며 후삼국이 만들어지고 고려가 태동되기까지도 서로 전쟁으로 강산을 피로 물들였던 역사를 우리는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수시로 전쟁에 동원되어 한번도 따뜻한 밥을 먹고 일터로 가지 못했습니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이후에도 조선시대에는 계속해서 중국의 침략을 받고 일본의 침략을 받아 삼천리 금수강산이 피로 뒤범벅이 되고 시체 썩는 냄새가 온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최근세사를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사대강국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어 결국 일본에 의해 완전히 속국이 되는 비련의 역사를 맞이하였습니다. 더더욱 현대사를 보면 미소강국의 분할점령에 의해 지푸라기 보다 이념에 의해 서로 동족상잔을 벌여 같은 한 민족 한 핏줄인 겨레를 500 만명이나 죽이는 역사를 겪었습니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서로 바보같이 이념에 의해 좌우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였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의 부시가 온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자국의 군수산업체에서 판매하려는 전투기 100 대를 사 달라고 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는 약 20 조원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을 팔기 위해 부시는 미리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하면서 애드발룬을 뛰어 놓고 무기를 팔아먹으려고 온 것입니다. 만약 20 조원이라는 돈으로 우리가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영양보충을 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돈입니다. 이래저래 우리 민족의 백성들은 외세라는 강도에 의해 나쁜 권력자들의 강도에 의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 역사였습니다. 마치 여리고 언덕에 쓰러진 어떤 사람과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해왔습니다.
둘째, 여리고 언덕에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새로운 해석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오늘날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는데 상처입은 사람으로 여리고에서 강도만난 사람으로 오신다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때로는 아무런 대책이 없이 쓰러져 있는 전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어떤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에수님의 또 다른 비유를 예로 듭니다. 마태복음 25 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 장 34 절부터 40 절까지 봅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어떤 능력있는 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상처입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자의 모습으로 병든 자의 모습으로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즉 여리고 언덕에 쓰러져 죽어 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세계신학계에서는 영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영성(SPRITUALITY)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룩하신 사건을 알아봄이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알아봄도 영성입니다. 돌 틈에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송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손길을 느끼는 것도 영성입니다. 지극히 적은 자의 모습 속에서 현존하시는, 또는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 당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도 바로 고난의 영성입니다. 바로 깨어 있는 영성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이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녀 테레사는 “자기가 돌보는 사람들”을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죽어가는 자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테레사는 고통 당하는 자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이 투정을 하고 여러 가지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짜증을 내곤 하였지만 테레사는 한번도 눈살을 찌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더 테레사는 그들을 돌볼 때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이 주께 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가 쓴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마더 테레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볼 때 최선을 다하여 돌보았고 주님에게 사랑을 바치듯이 사랑을 바쳤습니다. 테레사는 깨어 있는 영성으로 활활 타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점점 성숙한 지경에 이르러야 합니다. 믿음의 첫 단계는 복을 받고 감사하고 교회에 헌신하고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점점 더 자라면 거기에는 믿음과 사랑을 합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통 당하는 이들의 가슴 속을 깊이 함께 느끼며 거기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깊은 경지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더 기도회를 드립니다. 특별히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소리없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서방언론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물론 우리 남쪽의 언론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이기 때문에 무기를 구매하고 군사력을 키우면 북한도 그와 맞서서 이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대부분의 경제력을 거기에 쏟아붇고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돌아갈 분량의 식량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양과 일부 눈에 띄는 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수많은 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세계아동기금이나 세계식량기구 같은데서 식량을 원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코끼리 비스켓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 여신도들은 북한의 우리 아이들이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고 영양실조로 신음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에스더의 영성이며 그것이 오늘의 에스더가 기도해야 할 기도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신학자는 기도와 노동의 통일, 기도와 대지에 대한 충성의 일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즉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단지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내용대로 사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에스더로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단지 하나님! 북한에 있는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옵시고 저들에게 영양실조로 고통당히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끝난다면 그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헥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를 봅시다. 야고보서 2 장 15 절과 16 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저는 오늘 에스더 기도회가 진정한 에스더 기도회가 될려면 기도와 일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통로를 통하여서든지 북한에 있는 아동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 길을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찾으라 찾을 것이요!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은 오늘의 에스더로서 깨어 있는 영성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북쪽에 있는 동포들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따뜻하게 돌보고 이들을 품에 안고 우리 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먹이는 것이 오늘의 에스더들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기도일입니다.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했던 에스더를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의 에스더들이 이 저녁 모였습니다. 이 시간 여기 모여 있는 여신도회원들에게, 에스더가 불이 붙는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그 뜨거운 가슴을 저희에게 옮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에스더처럼 아름답게 하시시고 민족이 고통 당하고 이웃이 아픔이 있을 때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 고통을 나누려고 하는 긍휼의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희 민족이 반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까닭에 너무도 남북 양쪽에 고통이 많습니다. 특별히 아무런 잘못이 없는 북한의 자녀들이 아사의 고통으로 영양실조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저희의 북쪽에 있는 동포들 특히 어린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가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해주시고 저들의 아픔 속에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깨어 있는 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 여신도를 사랑해 주시고 저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저들을 위해 저희 있는 것을 나누어 따뜻한 사랑으로 돌보는 이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셨던 사랑을 만분지 일이나마 나누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가나안 여신도들을 사랑하시고 그 마음 속에 사랑의 불을 점화시켜 주시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 사랑의 증인이 되는 이 땅의 사랑의 불덩이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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