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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삶의 다섯 가지 유형

관리자 2010-12-14 (화) 12:06 15년전 1860  

2003 년 6 월 29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빌립보서 1 장 18 절 - 21 절

제 목 : 삶의 다섯 가지 유형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충만하게 나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물론 무엇으로 나누느냐에 따라 이런 유형, 저런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격에 따라 내성적인 사람 외향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고 체격에 따라 비만형, 근육형, 훌쭉이 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누구나 바라는 <행복>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삶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행복무관형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지극히 소수로서 사람들 중에 약 1-2% 정도 있는데 행복과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와도 그저 그것이 운명인갑다 생각합니다. 복에 겨울 정도로 행복이 자신에게 다가와도 그것이 행복인줄 모른 채 그저 그런 것이 있는 갑다 하고 살아갑니다. 행복한 현실을 좋다고 느끼지 않으며 불행한 현실을 나쁘다고 느끼지 않으며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릅니다. 삶의 어떤 목표의식도 없이 좀더 나아져야 하겠다는 바램도 없습니다. 그저 사니까 삽니다. 하루가 오니까 그저 하루를 지냅니다. 밥이 있으니까 밥을 먹습니다. 잠이 오니까 잡니다. 그저 내가 뭔가 더 나아져야 겠다 뭔가 좋은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어떤 희망이나 기대감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벌레와 같이 기어가되 어떤 목표를 가지고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거기를 향해 가면서도 왜 거기에 가는지 모릅니다. 그저 본능적인 충동을 따를 뿐입니다. 그저 행복과 담을 쌓고 살아가고 그저 운명에 맡겨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사전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둘째는 비틀행복형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약간 왜곡되고 비틀어진 경우인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꼭 열명 중 한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불행하면 내가 행복하고 남이 더 불행해지는 것을 보면 나는 더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지 못하면 내 배가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남의 불행한 것에 자신을 견주어 보고 상대적인 행복감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데우스란 영화에 보면 샬리에르란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모차르트가 자작곡을 연주할 때 황제가 로얄석에서 하품하는 것을 보고 2 층에서 관람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미소를 감춥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시원찮게 여기는 황제를 생각하면서 기분 좋아라 합니다. 남이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을 내 기쁨으로 여깁니다. 남을 쳐다보고 그것을 남과 비교하면서 내 행복과 불행을 확인합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자기와 금방 비교해 보고 불행을 느낍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남을 불행하게 하면서 자기의 행복을 얻으려는 비틀어진 행복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정신적인 질환에 속합니다. 이런 이들이 많을 때 우리 사회는 점점 불행해집니다.  

셋째는 행복추구형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많습니다. 거의 6-70 % 이상이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자 정직하게 땀도 흘리고 눈물도 흘립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싶다는 감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때로는 좌충우돌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돈도 벌고 저축도 하고 돈도 쓰고 배드민턴도 치고 함께 여행도 가고 행복한 순간을 담기 위해서 열심히 사진도 찍습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인내하고 오늘을 희생하고 행복을 위해서라면 감정을 내리누르기도 하고 먼 훗날을 위해서 참아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행복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박이 터지듯 행복이 온다고 기대하지 않고 그저 성실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씨를 심어 거두려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산 사람은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거나 그의 삶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무두셀라라는 사람은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지만 그의 이름 넉자와 함께 단지 그가 몇 년을 향수하고 죽었더라! 단지 그렇게만 나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의 인생이 신앙적이 아니고 그저 자신의 장수를 위해 열심히 땀흘린 사람은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거나 단지 죽었더라고 나옵니다.  

넷째는 이웃행복형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한 7 -8% 정도될까 말까 합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더 큰 행복 더 진하고 농도있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적극적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내가 행복하게 살려고 할 때 누리는 행복보다도 더 진한 행복감이 밀려온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원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일도 발 벗고 나섭니다. 헌혈 같은 일도 열심히 하고 노약자나 장애인들을 위해서도 땀을 흘리고 올 때 삶의 진한 보람을 누리며 돌아옵니다. “그래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의 토대이고 근원이다”는 숭고한 가치철학을 가지게 됩니다. 이 사람은 어느 때인가 “너를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다”.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다”는 하나님께서 인생 속에 감추인 비밀을 발견하여 즐거움 가운데 삽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고양됩니다. 요나단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친구 다윗이 잘되는 것을 자신의 잘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다윗을 제거하면 왕의 자리는 자연 자기의 것이 될 텐데도 다윗을 제거하려는 사울의 계교로부터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바라기 보다는 친구 다윗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요나단의 삶은 성경에 기록되어 세대와 세대로 전달되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하늘행복형입니다.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유형은 물론 네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이 지닌 가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면서 자기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만족해 합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여기에 속하는 유형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 장 20 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자신이 존귀하게 되고 자신이 명예롭게 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가 무엇입니까? “생사를 다 바쳐“ 그 뜻입니다. 생사를 다 바쳐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존귀란 높을 尊 부할 貴입니다. 그리스도가 높게 되고 그리스도가 부하게 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높여주고 부하게 해주면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해드리는 일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바치겠다, 그리스도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은 기꺼이 헌신짝처럼 바치겠다는 의지와 각오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만족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행복과 그리스도의 존귀가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생의 가치관입니다. 자신의 기쁨을 자신에게 두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두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그리스도의 존귀에 두었습니다. 빌립보서 1 장 1 절에서 4 장 23 절 전체를 샅샅이 그 어디를 훑어보아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구합니다. 빌립보서 1 장 11 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 사도가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찬송이 되기만을 구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 장에도 있습니다. 3 장 7 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한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게 유익한 것이 많아질 때 사람들은 행복을 누립니다만 바울 사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게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데 해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들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하여도 대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자신을 위해 챙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축통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두막 집 한 채도 없었습니다. 행복을 위한 여유자금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전혀 챙기지 않고 자신의 삶은 온데간데없는 바보같은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끊임없이 다 퍼내주고 늘 비워있으면서도 바울 사도의 마음의 곳간은 늘 넘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바울 사도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 장 17 절에 보면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늘 찬송과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4 장 12 절에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사는 일체의 비결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 장 13 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4 장 18 절에서 바울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족한지라”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 장 27 절은 자신에게는 근심이 없다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저 행복감으로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 것도 아닌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바울은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든 능력도 있고 쓸 것도 풍부하고 근심도 없고 마음에는 차고 넘치는 기쁨이 있고 자족하며 사는 일체의 비결도 있고 이만하면 더 이상 그럴 수 없이 행복한 것 아닙니까?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새벽에 빌립보서 1 장 1 절에서 4 장 23 절까지 하루에 한 절씩 하여 81 회에 걸쳐서 말씀을 전하면서 점점 확연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를 존귀케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을 신약성경에 기록케 하여 세대와 세대를 넘어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 때 주님께서는 감옥 안에서도 사도 바울에게 넘치는 기쁨을 심어주지 않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도 사도 바울에게 능치 못할 능력과 모든 것을 쓰고 남아도 될 풍부함을 안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행복을 안겨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를 부를 만큼 그에게 행복을 가득 안겨주십니다. 그냥 사람들이 자신이 열심히 땀을 흘리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행복과는 도무지 비견할 수 없는 행복을 그에게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행복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이들을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행복을 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가셔서 그를 행복하게 해 주십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거나 남이 행복할 때 내가 불행감을 느끼는 삶이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한 삶입니까? 나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 이리 힘쓰고 저리 애쓰고 나의 감각과 쾌감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일은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결코 언제까지나 남지 않습니다. 그저 그때뿐이고 그저 다 없어지고 기록도 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천국에 가지고 가지도 못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애쓴 것은 무슨 기록에도 남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을 열심히 구할 때 얻어지는 행복느낌지수가 10 이나 20 이나 30 정도라고 해 봅시다. 그러나 그런 지수는 언제까지나 누적되어 남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만족시켜 드릴 때 하나님께서 感이 動하시고 感이 激하셔서 이 땅에서 내게 돌려주실 행복의 강도는 1000 도 되고 10000 도 되고 100000 도 됩니다. 그것 역시 또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하늘곳간에 그 포인트가 누적되어집니다.  

행복에 대한 여러분의 정책을 한번 바꾸어보시지 않겠습니까? 행복을 누리려는 여러분의 사고의 패러다임을 한번 전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거나 남이 행복하였을 때 불행감을 느끼는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을 우리 삶의 곳간에서 치워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저 나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는 일만에서 벗어나 이웃의 행복을 위해 일함을 나의 행복으로 느끼는 고감도행복철학을 가져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그저 이 복을 달라고 저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방향을 바꾸어 주님의 행복을 구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고 주님의 존귀히 여김으로 그것으로 나의 행복으로 삼고 주님의 기쁨을 구함으로 그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는 신앙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킬 생각은 없으십니까? 우리는 물론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삶을 다 바쳐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조그마한 것 하나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바울 사도에게 배웁시다. 빌립보서 1 장 3 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란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이 감사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짜증과 불평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놓고 우리는 100 가지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생각해 보면 동일한 사물을 놓고도 그것이 하나님 주신 은혜로 믿어 감사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가 쓴 <찐빵주의자의 삶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버마 아웅산에서 폭발사건이 있었을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살았지만 데리고 간 휘하 막강한 비서진들은 거의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언론사 기자 한 사람이 슬픔에 잠긴 유족들 중의 하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하얗게 소복을 입은 앳된 여학생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모른채 철없이 학교에나 다니던 그 어린 나이에 하루 아침에 아빠 없는 결손가정의 반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랴. 그렇게 소녀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소곳이 고개 숙인 채 슬픔을 삼키고 있었던 소녀의 입에 흘러나온 한 마디는 내게 그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좋은 아빠를 제게 16 년이나 내려 보내 주신 천주님께 감사드려요>. 아빠가 아무 잘못도 없이 비명으로 갔지만 그저 한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지만 바로 그 가운데서도 소녀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로 하나님께 행복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렇게 굉장한 큰 일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말 한마디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큰 기쁨과 행복을 안겨드릴 수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쓴 시 한 편을 발견하였습니다. 제목이 기쁨 찾는 기쁨입니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생활 / 권태나 우울에 빠져들다가도 / 재빨리 기쁜 쪽으로 /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슬기를 / 구하고 싶다. / 매일 보물찾기라고 하듯이 / 기뻐할 거리를 찾는다면 / 불평의 습성도 차츰 달아나고 말테지 / 기쁨을 찾는 기쁨만으로도 / 나의 삶은 /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 안에서 만드는 기쁨은 / 늘 힘이 있다>.  

가나안 성도 여러분! 이제로부터 서서히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찾아 그것들을 실행하는 기쁨 찾는 기쁨이 여러분 가운데 쏠쏠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로부터 서서히 여러분의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차츰차츰 주님의 행복을 구하는데서 내 행복을 찾는 삶으로 삶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오병이어와 같이 적은 주님의 기쁨을 안겨드린다면 주님은 그것을 5 천명이 먹어도 남을 큰 기쁨으로 돌려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겨자씨만큼이라도 조그마한 기쁨을 주님의 마음에 심겨 드리면 언젠가 주님은 여러분의 삶을 새들도 깃들일 수 있는 겨자나무의 큰 기쁨으로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드리는 적은 일을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기쁨 주시고 기쁨 주시고 기쁨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께 행복을 드리는 일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노래부르게 되기를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되 주님께서 기뻐하심을 저희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기쁨을 찾는 기쁨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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