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7 월 16 일(수) 오후 7시 반 광주가나안교회 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누가복음 2 장 41절 ~ 50절
제 목 :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성전에 나아온 모든 성도들 위에 은총과 평화를 넘치도록 나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40 절과 41 절은 분기점입니다. 40절은 예수님이 아기였던 시절의 성장과정을 말씀합니다. 41절에서 52절은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청소년기를 위기의 때라고 합니다. 청소년기는 이제 어른으로 가는 건널목이기 때문에 그만큼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변화의 시기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때이고 정신적으로 일탈을 하기 쉬운 위기의 때인 것입니다. 바로 이 청소년기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내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41절입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그 부모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부모님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매년 유월절 기간에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이란 유대민족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로는 PASSOVER이고 히브리어로는 “페사흐”인데 “넘어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무려 3500년이나 계속해서 지켜온 세계최고의 축제의 하나입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첫 태생은 죽이셨으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족들이 함께 나누는 축제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로 예수님 시대에도 대대적인 축제를 벌였습니다. 물론 지방에서도 축제가 있었지만 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사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도 해마다 유월절 행사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42절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가다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첫 아들이니 12살이 될 때까지는 아마도 두 사람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겠지만 아들이 12살이 되자 부모는 이제 함께 데리고 간 것입니다. 12살이면 우리 나이로는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곳이 갈릴리였으니 갈릴리에서 예수살렘까지는 약 120KM가 넘는 곳으로 300리 길인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예수님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쑥쑥자라 강하여졌기 때문에 충분히 300리길을 갈 수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43절입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여기서 그날들이란 유월절 축제기간을 말합니다. 축제는 7일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올라온 이들도 이제 축제를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아이도 당연히 갈 줄로 알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아들 예수도 자신을 따라갈 줄로 알고 무리에 섞여 북쪽 갈릴리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란 도시에 머무르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고 말하면 한 도시를 언급할 때보다도 예루살렘의 성전을 말합니다. 시편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는 찬양시가 있는데 이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저 머물러 계셨을까요? 조금 있다가 예수님이 뭐 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44절과 45절입니다. “동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예수님의 부모는 약간 착각을 했는 모양입니다. <동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란 예수님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오는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갈릴리에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올라왔고 올라올 때는 예수님 또래의 아이들도 함께 올라갔었는데 올 떄도 같이 오고 있겠지 하면서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부모님이라 해서 강심장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룻 길을 가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100리를 갔다고 하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여 갈 무렵인데 그래도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부모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애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올 때부터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말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애가 타도 시커멓게 탔을 것입니다. 언젠가 고속터미널 한가람문고라는 곳에서 책을 보고 있다가 아들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바짝바짝 속이 탔을 때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계단에서 아이를 안고 내려오기 까지 그야말로 속은 지옥이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찾으러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던 발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가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을때 부모의 심정은 숯검덩이와 같이 새카맣게 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당도하였을 때도 찾지 못하여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찾다 찾다 못하여 찾으러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을 찾게 해 달라고!! 저도 아이를 잃어 버렸을 때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도할 때 제가 잘못한 것이 쭈욱 떠올라 회개하면서 찾아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의 부모도 두 눈으로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으면서도 영혼 속에서는 분명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직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도 아들 예수가 율법을 가르친 회당에 자주 찾아간 것을 생각해 내곤 아이가 성전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성전으로 직행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46절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예수님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성전에서 선생들 즉 랍비들이 여럿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경말씀에 대해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시며 계셨습니다. 세상에 겨우 열두살짜리 아이가 랍비들 즉 율법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토론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미루어 짐작을 해 보건데 제일 처음에는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묻고 있을 때 묻는 폼이 열두살 아이의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질문을 하자 랍비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모여 함께 성경에 대해 질문과 대답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랍비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이런일이! 이 열두살 안팎의 아이가 묻는 질문이 자신들 사이에서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런 예리한 질문을 하다니!” 놀라고 있다가 여러 랍비들이 감탄하면서 그 자리에 모였을 것입니다. 47절에 보겠습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도무지 열 두 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아마도 율법학자 중의 율법학자라고 해도 아니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그런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과 대답을 열두살 박이 아이가 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모도 아이를 발견하고 바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목을 잡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같으면 분명 “야, 이놈아 하면서 다리 몸둥이 부러지기 전에 빨리 안와! 하면서 눈을 부릅떴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역시 예수님의 부모인지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부모님도 랍비들의 좌중에 둘러쌓여서 예수님의 하는 얘기를 듣고 ”아니 저 아이가 정말 내 아이인가!“ 할 정도로 예수님의 부모도 놀라워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일어났던 일이 회상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도 놀랐따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48절입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모는 참으로 온유한 부모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부모들 같으면 애 때문에 사흘길이나 다시 되돌아왔던 것을 놓고 분기탱천하고 노기충만하였을 것입니다만 예수님의 부모는 부드럽게 온유하게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아이를 한 인격으로 대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많은 경우 부모에 있어서 자식은 자신들의 소유물인데 예수님의 부모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한 인격으로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모님의 걱정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어머니가 근심어리게 말한것에 대해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반문은 도무지 12살 된 청소년의 대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통 메시아적 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과 관련시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자신이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며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함을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을 깊이 되새겼습니다. 5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절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무슨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매주 수요일 우리는 교회론 특별히 성전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오늘은 특히 성전이라는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님 요셉과 마리아의 성전에 대한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갈릴리에 사셨는데 매년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을 자주 갔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사는 고향이 갈릴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난지 팔 일이 되자 할례와 축복을 받게 하려고 그 어린 것을 데리고 300 리길을 갑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모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4절에 보면 “너느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하였고 17절에는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예루살렘 성전을 매년 세 차례 이상 갔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 길이 멀더라도라도 오고가고 600리 길이라 하더라도 성전에 출입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천에서도 외곽지역에 사는데 서울 순복음중앙교회를 계속 다녔습니다. 그러자 아니 왜 그렇게 3시간씩이나 허비해 가면서 서울에까지 교회를 다녀야 하느냐고 묻자 그 사람이 다시금 묻기를 니 아들이 서울대학교 다니는데 서울대학이 멀다고 인천에 있는 가까운 전문학교 다니겠느냐?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뭐 특별한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닌 그저 평신도였을뿐인데도 성전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시편 84편 1절에서 2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런지요 내 영혼의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성전을 사모하며 성전에 출입하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누구입니까? 다윗의 후손 아닙니까? 성전을 사모하는 열정이 요셉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성전을 사모하시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성전을 연모하고 성전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생의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버지의 자녀들은 성전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성전을 뭐라 부르겠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49절을 다시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것을 당연하게 생각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내 집인 것입니다. 고딕 시대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성전에서 발견된 예수님”이란 그림이 지금 영국 리버풀에 있는 워커 미술관에 있는데 거기에 보면 마리아는 성전에서 잃었던 예수를 찾은 후 조용히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팔짱을 낀 채 의아한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셉은 의견대립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한손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면서 “그래도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말씀하셨을 때 누가 그 말을 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듣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집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살렘에 없었습니다.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이란 하늘 아버지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며 받드시더라” 순종하며 양친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아버지 내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순종하며 받드셨지만 훨씬 더 하늘 아버지를 더 받들고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자신이 머물러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언제나 하늘 아버지의 집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전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만 있을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시간 우리가 공부했지요! 여호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전에 있습니다. 역대하 7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이곳에서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눈과 귀와 모든 관심이 기울여 있는 이 전에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병원이고 재판관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재판정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성전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2절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전후 문맥과 떼어놓고 보면 안됩니다. 2장 40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여기 깊은 뜻이 있습니다. 2장 40절 이전에 보면 예수님이 어디 있었습니까? 바로 직전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2장 21절과 39절까지를 보면 성전에 있었던 예수님을 말합니다. 성전에서 할례를 받으시고 성전에서 안나 선지자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있은 직후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영아시절 성전에 다녀온 후에 40절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 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소년시절 성전에 다녀온 직후에 예수님을 묘사하기를 52절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자! 이제 40절과 52절에 있는 축복들을 다 합해 봅시다. 40절에는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52절에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입니다. 여기서 보면 인간이 자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골고루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아기가 키가 자랍니다. 몸도 자랍니다. 이는 BQ라고 합니다. 신체 충실지수라 합니다. 지혜가 충족하며 이는 IQ를 말합니다. 지능지수를 말합니다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EQ를 말합니다. 감성지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갔습니다. 성전에 나아올 때마다 모든 면이 전인적인 면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고 그 눈과 귀가 계시고 그 마음과 관심이 온통 쏠려 있기 때문에 성전에 나아오는 이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 사람의 몸을 잘 자라게 하시고 그 사람의 지혜를 잘 자라게 하시고 그 사람을 다른 이로부터 사랑받게 하시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를 자신에게 찾아오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그 사랑의 정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자신의 집에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 지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지로 아시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에 나아오는 이를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그를 성장시키시고 그를 진보하게 하시고 그를 강건케 하시고 그를 지혜롭게 하시고 그를 모든 면에서 잘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늘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늘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 자녀들이 아버지의 집을 중심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나안 성도들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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