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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관리자 2010-12-14 (화) 13:16 15년전 3262  

2003 년 7 월 27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요한복음 8 장 31 절 - 32 절

제 목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오늘 성도 여러분들 위에 가득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32 절에 있는 말씀에만 범위를 좁혀 말씀하겠습니다. 32 절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2 절 전반부는 “진리를 알지니“입니다. 비록 글자수로는 다섯 자이지만 우주 이상의 무게를 지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아라! 하셨는데 진리가 무엇일까요? 진리가 어떻게 생겼을까요? 둥근 모양일까요 아니면 정사각형일까요? 아니면 지맘대로 생겼을까요? 진리의 무게는 가벼울까요? 무거울까요? 그저 손으로 들 수 있는 책가방 무게일까요? 아니면 우주를 합해 놓은 것보다 더 무거울까요?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하셨으니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십시다. 진리는 성경에 나온 헬라어로 <알레세이아> “알레세이아”입니다. 이것을 번역할 때 우리말로는 <진리>라고 하고 영어에서는 truth라고 하고 중국어에서는 道라고 합니다. 어떤 가게에 세상에 가장 귀한 것들만 모아서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 가게 한 가운데 “진리를 팝니다”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물었습니다. “진리가 얼맙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게주인은 “당신의 생명을 주시면 기꺼이 드립니다” 말하였습니다. 청년은 아쉽지만 진리로부터 돌아섰습니다. 허나 진리를 생명과 바꾸겠다는 사람이 역사상에 있었습니다. 공자의 論語 <里仁篇>에 ”朝聞夕可死矣”란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였다는데 그는 일평생 도 즉 참 길, 참 진리를 추구하였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도를 향한 열정이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아쉽게도 참 도에는 이르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불교의 경전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법구경에서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의 백년은 진리를 깨닫고 사는 이의 하루보다 못하다”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술은 강하다. 국왕은 더욱 강하다. 여자는 한층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 하였습니다.  

생명보다 더 비싸고 도대체 여자보다 더 강한 진리가 무엇일까요? 시대시대마다 많은 철인들과 지혜자들은 진리를 찾고자 애를 썼고 “진리란 과연 이것이다”고 진리의 실체를 규명하려 했습니다. 1> 고대에는 사물의 본질과 질서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진리라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진리란 객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질 즉 이데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사과가 있다면 사과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2> 중세철학에서는 약간 바뀌어 집니다. 아무리 사과가 여기 있다고 해도 내가 사과를 사과로 인정해야 진리인 것입니다. 즉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중요했습니다. 3> 근세에 와서는 진리의 개념이 또 수정됩니다. 여기 사과가 있는 것과 내가 그것을 사과로 인정하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일치해야만 즉 객관적인 현실이 있는데 내가 사과로 인정하는 주관적 인식과 일치해야만 과학적인 사실과 이성적인 인식이 합치할 때에만 그것을 진리라고 불렀습니다. 4> 현대에 와서는 실용주의와 언어철학이 발달되었습니다. 언어철학에서는 "A는 B다" 하였을 때 A 즉 진리는 B 즉 이것 이것이다고 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수단인 언어가 현실을 표현해 내는데 한계가 있는 매체라 하여 진리를 언어로 표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현대 실용주의 철학에서는 진리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내게 실제적으로 실용되고 소용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하면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진리탐구노력을 살펴보았지만 하나 일관성이 있는 것은 진리의 개념이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제의 진리가 다르고 오늘의 진리가 다르고 내일의 진리가 또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확실합니다. 참 진리가 어떻게 시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리는 없는 것입니까? 오늘은 진리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통하여 진리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려고 합니다.  

첫째,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진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진리라 칭하지 않습니다. 땅 위에 있는 철학이나 땅에 있는 사상이나 땅에 존재하는 이념이나 땅에 서 있는 사람이나 땅에 서 있는 자연만물이나 하늘에 떠 있는 우주만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일컬어 그것중의 하나를 일컬어 진리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관하여 성경은 무어라 말씀합니까? 성경이 진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이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베풀어주셨다고 강조합니다. 사무엘하 2 장 6 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진리로 베푸신다 하나님이 진리를 가지고 계시다가 그 진리로 베푸신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진리는 “115 구절”에 걸쳐서 나옵니다만 그 어느 때에도 진리란 말은 단독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꼭 붙어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시편에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편 25 편 5 절입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57 편 10 절입니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진리는 주 여호와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와서 진리란 말은 처음으로 요한복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 장 14 절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십니다. 1 장 17 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그에게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성경 안에 있는 진리의 개념에 대해서 의문이 생깁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베푸신다 하였는데 신약에서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니 이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 장 8 절에서 9 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빌립에게 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내가 네가 본 바 하늘 아버지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다른데서 찾지 말라 내가 하나님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만 당시 빌립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분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의 운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니!!!”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나는 하나님께 진리를 받아가지고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려 왔다 이렇게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 장 6 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저 예언자나 대제사장은 이런 말씀을 도무지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자신이 “내가 곧 진리다“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계명이 진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오직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행세를 하는구나!” 하면서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였고 예수님을 증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스스럼이 없이 자신이 진리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하셨는데 <알지니>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거나 그저 머리를 끄덕이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알지니>는 상당히 깊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 장 31 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 말합니까? 1 장 34 절에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여기서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내를 알면 어떻게 됩니까? 배가 불러서 임신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마리아는 나는 남자와 깊은 관계가 없다 나는 남자와 성적 관계가 없다 말한 것입니다. “알다”란 여기서 그저 피상적으로 안다함이 아니요 남녀가 깊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할만큼 한 깊은 관계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말한 “알다”와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할 때 “야다”라고 하는 성경 히브리어 원어의 같은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했을 때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 인식해라!”, “진리를 머리의 기억세포에 각인시켜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의 뜻은 ”진리와 깊은 관계를 맺을지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진리인 나를 알아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인 나와 깊은 영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5 장 5 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 안에서 살고 주님이 내 안에 살면 주님과 나 사이에는 깊은 영적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유케 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진리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 우리 존재가 자유케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될 때 진리되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와 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역사하여 서로 그물을 형성하여 우리 인생을 죄악의 포로로 삼습니다. 포로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생 그늘지게 되고 염려케 되고 불안하게 되고 근심걱정하게 하며 결국 우리 인생을 비참과 불행 속으로 빠뜨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우리를 죄악의 모든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 그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모르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존재가 포로가 됩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은 모든 악의 쇠사슬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우리는 해방되고 자유케 됩니다. 진리되신 우리 주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걱정을 앞서게 하고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삶의 모든 무거운 짐에서도 자유케 해주십니다. 언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입니다. 이는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죄가 죄의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고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됩니다. 죄는 점점 더 커져서 그 인생 전반을 꽁꽁 묶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되면 꼬리에 꼬리는 무는 죄를 단절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상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자유케 됩니다. 자유 뒤에 계속 꼬리가 물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자유 뒤에는 기쁨이 뒤따릅니다. 진리 되신 우리 주님을 알게 되면 세상 평안과는 다른 평안을 주십니다. 진리되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인생 팔자가 바꾸어집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가난에서 부요로 죄짐에서 용서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꾸어집니다. 자유에서 기쁨으로 기쁨에서 더 큰 기쁨으로 그 기쁨 뒤에 평안과 행복이 계속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좋은 일의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진리를 힘써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관련하여 인생은 세 가지 양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양식은 진리무심형입니다. 애시당초 진리에 대하여 알려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를 등불 삼고 사시라고 하면 “뭐 진리! 송아지 껌씹는 소리 하네! 아! 진리가 나에게 밥 먹여줘? 아니면 진리가 내 통장에 돈을 입금시켜줘!! 진리에 대해 눈을 내리 깔고 무시합니다. 그저 진리 보다는 우선 나에게 떨어지는 이득에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사람에게는 진리란 돼지코에 금고리와 같은 것이며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짓밟고 삽니다. 둘째는 거짓추구형입니다. 이것이 뭐냐? 진리 아닌 것을 진리처럼 여기며 비진리를 진리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줄 알고 쫓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엄청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진리로 믿고 거기에다가 돈을 퍼붓고 몸을 퍼붓고 각종 에너지를 퍼붓고 인생을 퍼붓는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이 진정 가야할 목표점과 점점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더욱 열정을 가지는 것 안타깝고 불행한 이들입니다. 셋째 양식은 진리를 알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그저 진리의 길에 들어서 있지만 어떤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부류는 진리를 힘써 알려 하고 진리 가운데 행하기를 즐거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세아 6 장 3 절에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도 동일한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자 힘써 예수님을 알자! 그저 어느 은행이 더 이율이 높은지 어느 다이어트 방법이 확실히 살을 빼는지! 어느 마트가 더 값이 싼지를 알려고 힘쓰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진리를 알되 힘써 아는 일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단순히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헤엄을 칠 수 있기까지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면 알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또 하나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뭔가 하나가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예수님은 내가 알기 전에 나를 미리 아시고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계시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날 사랑하셨고 날 사랑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날 사랑하실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언젠가 어떤 복음성가를 딱 한번 듣고 나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어떤 영적 코드가 맞는 노래를 발견한 것입니다. 린다 산델이 작사하고 오스카 안펠트가 작곡한 복음성가입니다. 린다 산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린다 산델 마음 속에 주님은 그에게 자유함을 주었고 그에게 기쁨을 주었고 그에게 위로를 주셨고 그에게 평안함을 주셨습니다. 그가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호흡하고 살았을 때 주님은 그에게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항상 좋은 것을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진리되신 주님이 그에게 너무도 잘해주셨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움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주시네 위로함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 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사랑하는 가나안 성도 여러분 진리되신 주님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진리되신 주님을 늘 영접하며 주님과 대화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진리되신 주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되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진리되신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희망중 기다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진리되신 주님의 약속 새겨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닌리되신 주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오셔서 자비로운 손길로 살펴주시고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께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께서 모든 죄악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기쁨도 주실 것입니다. 평안도 주실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께서 항상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빛과 진리로 길과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 안에 거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로 진리를 알게 하시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로 항상 주님 안에 있게 하시고 주님 저희 안에 늘 내주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우시며 저희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진리를 행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결코 이 세상의 썩어질 비진리를 따라가지 않게 하옵시고 비진리의 세력들로부터 저희의 영혼과 생명을 지켜주옵소서! 날마다 숨쉬는 순간순간이 진리 안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저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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