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8 월 3 일(금)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시편 52 편 8 절 - 9 절
제 목 : 늘 푸른 신앙
할렐루야! 이제 팔월입니다. 팔월에는 팔팔하게 살아야 합니다. 삼월이 되면 삼삼하게 살아야 합니다. 칠월이라고 해서 칠칠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구월이라고 해서 구구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시월이 올 때는 시시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열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팔팔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숨을 쉬고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저 움직이고 다니는 것만이 아닙니다. 생동력있게 춤을 추며 노래하며 하나님 주신 생을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어떻게 팔팔하게 살 수 있을까요? 비암을 잡아 묵으면 팔팔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아그라를 복용하면 팔팔하게 살게 되는 겁니까? 무엇이 우리 인생을 팔팔하게 생기있게 바람처럼 살게 할까요? 오늘 성경 시편이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음으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간절한 희망을 피력하였습니다.
먼저 이 시간 <푸른>이라는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푸른색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늘을 만드셨는데 하늘이 무슨 색입니까? 찬송가 75 장에 있습니다. “저 높고 푸른 하늘과 수없이 빛난 별들이” 하늘도 푸른 하늘입니다. 그러면 바다는 무슨 색입니까?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셨고 한 곳으로 모인 그 물을 바다라 칭하셨는데 바다는 무슨 색입니까? 찬송가 31 장 3 절에 보면 있습니다.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그득한 이 땅 다 주의 조화 그 힘찬 명령에 터 잡히나니 저 푸른 바다는 옷자락이라” 바다도 푸른색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셋째 날에 땅에 풀과 씨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셨는데 이것들은 무슨 색입니까? 푸른 풀입니다. 푸른 채소입니다. 푸른 나무요 푸른 숲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큰 붓을 들고 온통 푸른색으로 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푸른색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한번 봅시다. 창세기 1 장 30 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셔도 될 것을 “내가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고 “푸른” 색을 강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 장에 제일 먼저 나오는 색은 흑암이라는 검은색입니다만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어 그 흑암을 없애셨으니 하나님은 검정은 별로 좋아하신 색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는 노아 홍수직후인 창세기 9 장에 나타났습니다만 일곱 빛갈 무지개를 만드시기 전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늘과 바다와 산과 대지를 온통 푸른색으로 도배하시고 하나님께서 입으로 최초로 “푸른 풀을“ 하시면서 색깔 하나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푸른색을 선호하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아십니까? 이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시로서 일약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런 <청녹색>이란 시를 썼습니다. “하늘도 푸르고 / 바다도 푸르고 /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 하나님은 청녹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 청녹색은 / 사람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 이 유익한 빛깔을 / 우리는 아껴야 하리 / 이 세상을 유익한 빛깔로 / 채워야 하는데 /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천상병 시인이 읊었던 청녹색은 인간에게 유익한 색입니다. 시신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청록색이 사람의 눈을 가장 덜 피로하게 하는 색이고 마음에 안정을 주는 색이라고 합니다. 또 색채심리학이 있는데 청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는 화려함을 좋아하며 낙천적이며 쾌활한 성격이라 주위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많은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시편을 작시한 다윗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색 푸른색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였고 시편 23 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초장에가 아니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무슨 색이 있다면 성도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색 푸른색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무슨 빛깔이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푸른빛갈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색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도 색깔이 있습니다. 점점 노래가고 죽어가서 잿빛색 인생이 있고 점점 푸르러 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푸르다는 것은 팔팔하다는 것입니다. 푸르다는 것은 생기가 흘러 넘치다는 것입니다. 푸르다는 것은 인생 속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생이 육체적으로 젊고 발랄하고 피부가 탱탱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나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푸르다함은 고린도후서 4 장 16 절이 말씀하는 바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늘 푸르다함은 그의 영혼이 늘 생기있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늘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 장 5 절에서 6 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면 인생이 예수님을 떠나면 가지처럼 버리워 말라지지만 인생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 가지가 푸르를 뿐 아니라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감람나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했는데 이제는 감람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봅시다. 이스라엘에는 감람나무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세 가지 과실나무를 특별히 칭찬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감람나무는 한번도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아 예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포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9 장 20 절과 21 절에 보겠습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그런데 유독 감람나무만은 성경 그 어느 군데에서도 부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가 아직 방주 안에 있을 때 비둘기가 물고 온 잎이 바로 감람나무 잎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도 감람나무는 희망을 상징하였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요담은 나무에 관한 비유를 말하면서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는 추천을 받게 됩니다만 거절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사기 9 장 8 절에서 9 절을 보겠습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무엇입니까? 감람나무는 자기 자리를 지키며 그 어떤 세속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왕의 지위까지 거절할 만큼 절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감람나무는 비록 성장이 더디어 열매를 맺으려면 10 년 이상 자라야 합니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도 잎이 푸르고 무성하여 길가는 나그네가 그 시원한 그늘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열매를 맺으면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그 열매는 요리에 사용되고 상처를 바르는 약으로 사용되고 등잔을 밝히는 기름으로 사용되고 목제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어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이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힘과 축복, 번영을 상징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감람나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감람나무를 좋아하시어 복음서에 보면 쉬시러 가실 때는 정해진 장소가 있었는데 감람나무가 가득히 자랐던 푸른 감람산으로 가셔서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성경에서 감람나무는 단지 감람나무가 아닙니다. 감람나무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은 감람나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생을 감람나무에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시편 128 편 3 절 후반절은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이때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는 축복입니다. 자식을 최대한도로 축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냥 나무에 비긴다면 백가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한다는 백향목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만일 과실나무에 비긴다면 푸른 감람나무 같기를 바랍니다. 푸른 감람나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고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여 좋고 사람들에게 그 열매로는 기름을 제공하여 모든 면에 유용하게 해 주어 좋습니다. 그 어떤 면에서도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만을 줍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넘버원으로 좋은 나무인 감람나무가 그것도 잎 전체가 푸른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야 말로 그야말로 환상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있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은 이 땅에서의 하늘나라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있다함은 하늘의 은총 가까이 있음이요, 성전에 있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있음으로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을 어찌하던지 성전 안에 놓여지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마음이 시편 84 편 10 절에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어느 집이나 문지기가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만 다윗은 자신의 신분이 비록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문지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아뢴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을 때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인데 그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기를 그토록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무엇이 없겠습니까? 은총이 풍부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나리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저 나무여도 좋은데 푸른 나무이고 그저 푸른나무여도 좋은데 푸른 감람나무이고 그저 푸른 감람나무이기만 해도 좋은데 하나님의 집에 있는 감람나무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겠습니까? 첫째는 8 절에 있습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푸른 감람나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의지하고 이 세상의 철학을 중요시하며 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칠량에 살았는데 거기서 탱자를 딸려고 탱자나무에 가까이 갔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탱자가 겉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가까이 갔는데 그만 그 가시에 찔려서 살갗에 긁혀서 피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따야겠다는 생각에 기어이 땄습니다. 고생고생해서 딴 탱자를 까서 먹었는데 무슨 씨앗이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맛은 어떻게 그렇게 신지 한번 경험한 이후로 다시는 탱자를 딸려고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탱자와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주를 해대고 한정없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이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고 그 사람에게 피가 나게 하고 그 과실은 먹을 것도 없고 한없이 시기만 하는 그런 신물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자기 몸에 가시를 지니고 있어서 그 누구도 다가오게 하지도 않고 그 누구도 믿지 않은 인생은 바로 탱자가시나무와 같은 인생입니다. 주변에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에 하나님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의지하는 그런 인생은 탱자가시나무와 같은 인생으로 그 나무는 나중에 불쏘시개로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생을 하나님의 손에 놓는 인생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프랑스 국민들이 약 6000 만명 정도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6000 만명이 다 왕이다. 그 6000 만명의 왕을 한 사람의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가 프랑스다.” 그런데 이 왕과 같은 프랑스 사람들이 존경하는 하나같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라는 수도자입니다. 그는 신부 서품을 받은 후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사람들이 산다는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라는 곳에서 순교한 사람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그의 신앙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자신의 가지에 대해 전혀 염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찮은 나무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자신에 물었습니다. 그는 그 깨달음 뒤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절대 영영 의지하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저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제게 행하시옵소서. 어떻게 하시든 저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수용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제 안에서 아버지의 모든 피조세계에서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저를 드리며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손에 저를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나의 아버지시기에. 아멘."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겠습니까? 둘째는 9 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때 푸른 감람나무가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2 학년으로 기억합니다만 반 친구가 저 나무가 오돌나무야! 너 저기 저 나무에 가까이 가면 옻이 올른다! 막 가렵게 된다!”고 하자 “정말! 하면서 나무에 올라갔는데 옻이 안 오르잖냐? 그러자 친구는 친절하게도 그 나뭇잎을 따서 팔에다 문질러봐 그럼 효과가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제가 그 때 실험정신이 강했습니다. 나뭇잎을 따서 팔목에다 정말로 부벼 보았는데 얼마 지나자 정말 가렵기 시작하여 옻이 올라서 막 부어오르고 온 몸으로 옮겨서 참기름도 발라보고 진흙으로 떡칠을 해보고 별짓을 다해도 낫지 않아 한 철 내내 고생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오돌나무 곁에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생 탱자나무와 오돌나무와 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생이 되어야 쓰겄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낼름낼름 받아만 먹고 감사할 일 같은 것은 감쪽같이 잊어버리는 이는 바로 오돌나무와 같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아닙니다. 로마서 1 장 21 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여 주신 일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인생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뇌성마비 시인인 송명희 씨는 너무도 많은 감동적인 신앙시를 써서 누구든지 그 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해 계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녀는 시 한편을 쓰기 위해서는 몇 일간을 온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순간 고통 중에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 나의 몸을 이렇게 불구로 만들 것이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지 왜 생명을 주시어 이처럼 고통을 당하게 하시나이까?” 그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의 다정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명희야! 네 몸이 온전했다면 네가 나를 알겠느냐?” 바로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감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수도 없이 감사의 시편을 쏟아내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감사와 감사와 또 감사로 인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이 되어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그의 감사인생을 통해 오히려 쉴만한 그늘을 얻게 되었고 그 체험적인 신앙으로 인해 그를 읽는 사람마다 푸르름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만 여러분도 그런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일컬어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1 장 16 절 전반절에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여호와께서 한 인생을 보시고 좋은 행실을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과거형입니다. “하였었으나“는 무엇입니까? 왕년에 과거에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왕년에 내가 한 때 내가 그랬다는 푸르른 신앙이 아닙니다. 현재 나의 믿음이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함이 중요합니다. 만일 예레미야 11 장 16 절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 여호와가 너를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나니!“ 저는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영히 여호와만 의지하는 여러분을 보시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감사하는 여러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러분을 현재형으로 ”나 여호와가 너를 일컬어 내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라 하노라!“ 축복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 인생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 인생이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같은 인생, 독버섯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게 하옵시고 저희 인생 오늘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인생 푸른색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인생이 되게 해 주옵시고 저희 인생 감람나무와 같이 때로는 과실을 주고 때로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는 인생이 되게 해 주옵소서! 저희 인생 영영 주께 감사하는 인생, 저희 인생 영영 주께 의지하는 인생이 되도록 은총 베풀어 주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