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9 월 3 일(수)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에베소서 1 장 15 절 - 23 절
제 목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1 장 22 절과 23 절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나옵니다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22 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 그 말입니다. 23 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 말입니다. 22 절과 23 절을 합해 보자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였을 때 이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런데 바울 사도는 단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골로새서 1 장 18 절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2 장 4 절에서 5 절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을까?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당시 엘리트 중에서 엘리트였습니다. 유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최고 석학 중에 석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 율법에 대해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헬라철학에 대해서도 빠삭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헬라세계를 다니면서 두루 복음을 전했는데 헬라 세계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던 세계에서 공용어로 쓰고 있었던 헬라어를 사용하지 못하였다면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 헬라세계를 지배하였던 철학들을 알지 못하였다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지역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회심시켜 바울로 만들어 바울의 열정과 바울의 성경지식과 바울의 외국어 능력 등을 이용하여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철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를 오히려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을 때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몸에는 여러 기관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살과 피와 뼈가 있습니다. 안에는 오장육부가 있고 밖에는 얼굴을 이루는 입과 눈과 코와 귀가 있습니다. 가슴이 있고 허리가 있으며 무릎과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같지 아니합니다. 역할도 다양합니다만 이것들은 여럿이 아닙니다. 머리와 몸통 부분이 있지만 이것들은 서로 하나인 것입니다. 즉 몸의 각 지체는 다양하지만 이것들은 하나인 몸 안에 있습니다. 즉 몸에는 다양성이 있고 일치성이 있습니다. 다양하지만 서로 떼어져 있지 아니하고 하나로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의 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비유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사람에 비유한 것은 당시 유행하는 헬라철학에서 빌려온 개념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말씀을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언어라든지 사상은 당시의 언어와 사상을 빌려 썼을지 모르지만 그 언어와 사상 속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과 정신이 내용을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 장 4 절과 5 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무가 몸이라면 가지는 지체입니다. 나무와 가지는 서로 다르지만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드심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과 같이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을 때 여기에 담겨 있는 뜻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일치성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사랑 가운데 하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은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복음성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우리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과 같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단지 우리 지금 가나안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교회는
23 절입니다.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22 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 하였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교회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하기를 교회는 일정한 장소에 서 있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 건축물을 교회로 생각합니다. 유럽에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교회의 규모는 엄청나게 큰데 비해 신자들은 몇 명이 못되어 엄청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교회 건물을 부동산임대업이나 맥주집이나 옷가게로 팔아버립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건물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가 걸려 있지만 성도들은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한 그 건물을 교회라 부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파이프 오르간도 있고 유리창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각종 성화들이 걸려 있다하더라도 그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건축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교회가 웅장한 건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라는 간판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그러면 초대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입니다. 왜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한 2-3 년 지나자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밀피타스에 한 가정집에 가서 예배인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니 한 가정집에서 11 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지난 주 까지는 함께 기도를 드리고 곽선희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약 두 달동안 매주 설교를 계속하다가 보니 그 공동체가 자라고 자라서 1 년 반이 지난 시점에는 120 여명이 훨씬 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실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만 그 이전에는 한 가정집에서 그 이후에는 교회의 교육관 한 귀퉁이에 있는 방 한 개를 임대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비록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을지라도 비록 교회교육관 조그마한 방 하나를 빌렸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였고 교회였습니다. 그것을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건물이 번듯하게 있어서 교회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무리들의 모임이 있을 때 바로 거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연락이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 왔습니다.
자료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고전 12: 12-30
2000. 1. 30. 설교자 :홍근수 목사
사도 바울로는 지난주에 우리가 읽은 고린도 전서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계속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중대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27절)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성원은 몸의 지체들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몸의 비유(analogy)로 말하는데, 이는 당시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몸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울로는 다른 곳에서 우리 교우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다."(롬 12: 5) 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양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불가분리적이고 통일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고린도 전서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는 이 몸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말의 근거가 여기 고린도 전서의 말씀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것은 바울로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는 여러 다양한 지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도 우리 인간의 몸에는 팔, 다리 등 여러 가지 지체들이 있고 또 눈, 코, 귀, 입 등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중요한 자기 기능과 구실을 하고 있어서 만약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몸이 제대로 기능을 다할 수 없습니다. 이 다양한 지체들과 기관들은 서로 가지고 있는 기능과 일이 다르고 책임은 다르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서로 비교우위를 말할 수 없이 모두가 독특한존재들로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몸에 속해 있는 지체들은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은 다리와 다르지만, 다리가 필요하고 다리는 팔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눈, 코, 귀, 입 등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가 서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이 모든 것들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길어서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15절 말씀에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하거나 21절에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태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그런 배타적인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 할 때 그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다 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교회가 우리가 보통 편의상 부르고 있는 데로 아무개 목사의 교회, 아무개 장로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또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들을 보면 대체로 어느 목사나 영향력 있는 장로가 있으면 어느 목사의 교회, 또는 어느 장로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의 모든 교인들이 그와 같이 되고 그와 같은 사상, 같은 신앙 노선, 같은 정치적 노선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목사나 장로 같은 지도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상, 같은 신앙 노선, 같은 정치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사나 장로는 인간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며 또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 등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같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 설령 같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지 인간의 것은 아닙니다. 교회 분쟁이 많은 까닭도 바로 이 엄연한 사실을 혼동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말은 교회 내에 서로 기능과 역할 등이 모두 다른 요소들이 있지만, 그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과 지체와의 관계는 일치와 하나의 관계입니다. 가령 요리하다가 손가락을 칼에 베었다고 할 때 피가 나고 아픕니다. 그때 우리는 아프다는 것을 손가락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프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이론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여도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서로 다른 지체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매개체는 같은 한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3절) 그러니까 같은 성령이 다양한 우리를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효율적이고 제 기능을 다하려면 교회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 몸 안에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많은 지체들, 많은 부서들과 기관들이 있습니다. 개인이 무시되지 않으면서 또한,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라는 구호처럼 우리 교인들 각자와 교회와의 관계,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양성의 원리가 존중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에 21세기는 다양성의 세기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교회는 몸이다 라고 하는 말은 교회는 일체성과 다양성이 동시에 구현되어야 하는 곳이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씁니다만, 다양성 속에서 일체성, 일체성 속에서 다양성,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라는 성서적 주장의 실천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말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육신 사건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인격, 그의 생, 그의 가르침과 설교, 활동 등을 보고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 자신도 직접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9) 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격, 가르침, 생애에 대한 기록, 그가 하신 말씀 등을 담은 성서를 우리가 맡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육체적으로는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사건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던 선교활동을 교회가 계승하여 그 일을 계속적으로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비록 희랍 말을 하지 못해도 적어도 교회는 세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케리그마입니다. 이 말들은 섬김, 친교, 복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구성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실천되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세 가지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속, 또 그가 하던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연속성"이 없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주장은 빈말이 될 것입니다. 무릇 교회란 적어도 위의 세 가지 일들이 계속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무슨 향우회나 동우회나 같은 단체 정도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단순한 친교 모임 이상이라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선교를 계승하여 그것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입니다.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자신의 선교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선교의 과제, 곧 하느님의 선교입니다만, 그것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선교라고 하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선교가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말이나 주장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할 일을 마땅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가 이 세상에서 하시던 것, 또 지금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제일 우선적인 선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 같이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없어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오늘의 세계가 위기를 만났다면 그 원인은 정치나 경제, 법이나 물질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없고 정의가 없어 위기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고 제대로 실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선포가 아닙니다. 인기 있는 설교, 재미있는 설교, 위로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그런 설교가 잘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이 시대와 이 민족을 위해서 내리시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 바르고 제대로 된 설교이고 소위 예언자적인 설교입니다. 영의 양식은 우리 입에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양식을 의미합니다.
오늘 기독교의 위기는 기독교 교회의 크기가 작아지고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른 하느님의 말씀, 옳은 설교가 외쳐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는 디아코니아입니다. 곧 섬김의 선교입니다. 기독교는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가 말 많은 곳으로만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대표하는 우리들은 그가 하던 섬김의 일을 계속 수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을 원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거나 선생님을 찾아 일을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서 가르치는 목회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픈 사람을 돌보기를 원하실 것이라고 판단할 때에는 의사가 되거나 그러한 병자를 돌 볼 의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므로 치유의 목회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그가 이 세상에 계셔서 하실 일들을 할 손, 발 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가 섬길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손발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의 손발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섬기기를 원한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적절히 표현했습니다:
"그(하느님)는 오늘 그의 일을 할 손은
우리 손 외에 다른 손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발은
우리 발 외에 다른 발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할 목소리는
우리 목소리 외에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그의 옆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도움이라고는
우리 도움 말고는 다른 도움을 갖고 있지 않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라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이 계속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 섬김은 여러 형태가 있는데 특히 치유의 행위는 그 중의 한가지입니다. 육체적인 병은 요즘 병원에서 잘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기도원이 치유활동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합니다만, 교회가 어떤 불치의 병을 고치는 곳으로 특징 지워 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영적인 정신적인 병은 고침을 받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는 교회는 코이노니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친교가 교회입니다.
친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이 제대로 실천되는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그 몸에 속해 있는 지체들인 교인들이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교회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제대로 증언되고 있습니까? "예수 천당, 예수 불신 지옥"이란 노상 전도자 또는 전철내의 전도자들의 말이 옳은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예수를 욕하게 하는 것이고 모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려는 사람들을 멀리 쫓아버리는 결과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를 초상화나 동상으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스도, 그의 임재를보여줄 수 있는 교회공동체가 이 지상에 몇 개나 있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주장은 교회에 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희망하기는 그의 교회에 현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볼 수 없으므로 그를 만나려면 교회를 가 봐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라면 사람들이 거기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면 적어도 예수의 생과 그의 인격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그의 인격, 정신, 사상, 교훈 등을 나타내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인 바클레이는 우리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것은 크리스챤의 최고 영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고 또 그것이 바클레이가 여기듯이 이 지상에서 최고로 영광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영광이라기 보다도 매우 크고 무거운 짐이고 과제라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기기 전까지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