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9 월 24 일(수) 오후 7 시 반 광주가나안교회 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 장 43 절 - 47 절
제 목 : 떡을 떼며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기사와 이적입니다. 43 절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초대교회에서는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무엇입니까? 기사란 기이한 일을 말합니다. 기사란 이적과 같은 말로서 이 땅에서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100 세에 아들을 낳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기사입니다. 표적도 역시 같은 뜻인데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사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치기도 하였고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병든 자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낫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마다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여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이 마치 상식과 같이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44 절과 45 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 말을 보통 유무상통했다는 표현을 씁니다만 재산이 있던지 없던지 서로 다 내어 놓고 공동으로 함께 물건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생활필수품을 사서 서로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셋째는 항상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46 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그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싸우나에 간다든지 등산을 간다든지 다른 일에 힘쓴 것이 아니라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성전으로 갈 때 가장 기뻐하였고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였습니다. 넷째,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이상합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든지 재산을 서로 나누었다든지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집에서 떡을 떼어 먹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왜 그런 일들을 초대교회의 활동으로 적었을까요? 우리야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떡을 떼는 일은 밥 먹는 일과 같은 일일 텐데 왜 떡을 떼는 일을 말하였을까요? 그런데 떡을 떼는 일이 딱 한번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전인 사도행전 2 장 42 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에만 해도 떡을 뗀다는 말은 네 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은 단순히 밥 먹는 것이 아닙니다. 떡을 떼는 것과 떡을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떡을 먹는 것은 설령 떡을 떼더라도 자기가 먹는 것이지만 떡을 뗀다함은 떡을 떼서 나누어 준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떡을 떼며”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사도의 가르침과 기도하는 것 사이에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사도가 무엇으로 가르쳤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지요! 다시 말하면 사도들은 설교를 한 것입니다. 떡은 뗀 이후에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설교와 기도 중간에 떡을 떼었습니다. 그렇다면 떡을 뗀 것은 단순히 밥 먹은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20 장 7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 후 첫날이란 주님의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날에 기념하여 모여서 사도 바울은 설교를 하였는데 그 날 모인 목적을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라 하였습니다. 성경 사도행전에 그저 아침 점심 저녁 매번 하루 삼시 세때 밥을 먹는 것을 특별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것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 “떡을 떼기 위해 모였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밥 먹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는 것은 단지 밥을 먹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특별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설교와 기도 사이에 들어가고 주일날 설교하는 일 앞에 들어가는 그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면서 하시는 일을 먼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 장 26 절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단지 제자들과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자신의 살로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하시고 나중에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2 장 19 절입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떡을 떼어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먹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의식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거의 대부분이 다 예수님을 만나 보았던 이들이 대부분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들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다 기억하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셨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담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도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여 떡을 뗄 때마다 예수님이 주신 피와 살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며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떡으로 받아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주신 사랑으로 받아들고 눈물 흘렸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 하실 때 동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쏟으시고 죽어 가시는 모습을 함께 떠올리면서 최후의 만찬시의 말씀과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것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들은 떡을 떼면서도 그냥 떼지 못하고 눈물로 그 떡을 적셨을 것입니다. 떡을 뗄 때에도 떡을 떼서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서로가 떡을 떼어 서로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떡을 먹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일 때마다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애찬을 “아가페 밀”이라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내에 애찬을 하는 전통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애찬을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지만 어떤 이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은 없고 떡을 먹는 일에만 치중하는 그런 모임도 있었습니다. 애찬을 나눌 때 부자들이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는 탐욕스럽게 먹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때도 떡을 떼어 서로에게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자기 음식을 자기들이 먹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대교회 아가페 밀의 전통에 이물질이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식사를 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시작하였는데 그 틈바구니에 그저 일반사람들이 게걸스럽게 탐욕스럽게 먹는 일들이 끼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떡을 뗄 때 아직 안온 사람이 있으면 기다려 주어 함께 떡을 떼었는데 우선 배고프다고 그냥 음식 있는 것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온 사람들은 떡을 나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이것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고 정리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냥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떡을 떼는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를 기념하라는 것과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도들은 그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아가페 밀과 주님의 거룩한 만찬을 분리하기에 이릅니다. 즉 아가페 밀을 먼저 하고 나중에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여 어떤 분명한 구분을 하였는데 최초로 사도 바울이 이 일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랑의 공동식사와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라는 성찬예식을 분명히 구분해 냅니다. 제일 처음에는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함께 떡을 떼었던 일들과 성찬식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일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랑으로 떡을 떼는 일을 하였지만 그것이 단지 사랑의 공동식사인지 성찬예식인지가 구분되지 않았던 것을 사도 바울이 이를 분명하게 제정하여 주후 50 년경에는 이미 성찬예식이 실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예식을 실시하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떡을 나누었던 아가페 밀을 없애지 아니하고 아가페 밀은 아가페 밀대로 실시하고 그 직후에 성찬예식을 실시하여 나중에 공적 예배에서는 반드시 성찬예식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떼는 일은 나중에 아가페 밀과 성찬예식으로 발전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초대교회에서 널리 행해졌던 “떡을 떼는 일”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애찬은 초대교회에서 생긴 새로운 전통이지만 전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키두쉬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키두쉬는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습관입니다. 유대인들이 함께 모였을 때는 먼저 주빈자가 떡을 들고 떡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고 나서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키두쉬의 전통을 몰랐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키두쉬와 초대교회의 떡을 떼는 것과의 차이는 키두쉬는 남자들끼리만 모여 떡을 떼는 것에 비해 초대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무론하여 함께 모였고 키두쉬는 그저 떡을 미리 나누어 놓고 자기의 떡을 떼어 먹는 것에 비해 초대교회에서 떡을 뗄 때는 서로에게 떡을 떼어 상대방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키두쉬는 떡을 떼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바쳤습니다만 초대교회에서는 떡을 뗀 후에 기도하였고 찬양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떡을 뗄 때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었고 사랑을 서로 나누면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전통 즉 아가페 밀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에서 떡을 뗄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있는 사람이 자기의 떡을 가지고 와서 그 떡을 서로 유무상통하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의 떡을 자기가 먹지 아니하고 자기의 떡을 이웃에게 서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떡을 떼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먹여주었던 것입니다. 천국에도 잔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 장 2 절에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렇습니다. 천국에는 아무 일도 없고 그저 맹숭맹숭한 데가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잔치를 베풀어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는 서로가 사나누어 주고 권하는 사랑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월 한번씩 하는 공동식사에는 이런 천국의 기쁨이 예비적으로 맛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찬식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예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갖는 뜨거운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초대교회에서 떡을 뗄 때에 만일 떡을 함께 떼기로 한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는 기다려 주었습니다. 시간이 되었다고 바로 떡을 떼고 나중에 오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그들을 위하여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온 자도 이미 와 있는 자도 공평하게 떡을 나누는 일에 참예할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참아주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셋째, 초대교회에서 떡을 뗄 때에는 단지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떡을 나눌 때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었으니 사실상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 것을 믿고 서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었고 떡을 떼는 순간은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떡을 떼는 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떡을 뗀다함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물질을 나눈다함입니다. 단지 물질을 나눔만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 물질을 나눌 때 그들은 마음을 함께 나눈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나눈다하였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헬무트 골비쳐라는 신학자는 “내 자신의 빵은 단지 물질적인 문제이지만 나의 이웃의 빵은 영적인 문제이다”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떡은 그냥 배고픔과 허기를 면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떡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떡이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떡을 가져와 배고픈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영적인 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먹을 것을 내가 먹는 것은 그것은 유체적인 것입니다만 내 떡을 이웃과 나눌 때는 영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떡을 떼는 일을 잘 하여야 합니다. 떡은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옷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떡은 따뜻한 말이 될 수도 있고 떡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해방이후에 북쪽에는 공산주의가 남쪽에는 자본주의가 들어왔습니다. 미국에서 들어온 자본주의는 해방이후 꾸준히 발전하여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이윤획득을 위해 있습니다. 자본이 주가 됩니다. 여기서는 바른 인간성이나 철학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이 말하고 소유가 제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왔고 자본주의가 이제 발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땀을 흘려 돈을 열심히 모으려 하고 돈이 많은 것이 제일입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이공계열 학생들이 다른 대학 의학이나 한의학 계열의 학교로 옮겨가기 위해 자퇴를 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거의 10 %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공계열을 졸업해야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고 의학계열로 가기만 하면 의사가 되어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이 안 되면 과감히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오늘날 선호하는 신랑감 부동의 제 1 위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여자나 남자도 살 수 있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돈으로 재판의 결과도 바꿀 수 있습니다. 돈으로 병역을 빠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으로 부정으로 시험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돈을 벌기에 눈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는 것도 내세에 구원받기 위한 것이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롭게 정의롭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받기 위한 동기가 많습니다. 하늘의 축복은 30 배 60 배 100 배이기 때문에 또한 일천배이기 때문에 교회로 몰리는 주요한 이유가 거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이 먼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실상은 나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옮깁니다만은 신령한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령한 목사는 축복을 하면 실로 쏟아지는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옮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로또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노력을 하지 않고도 돈이 우수수 쏟아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돈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피같은 돈을 나눈다거나 남을 도와준다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떡을 떼어 남을 준다는 일은 점점 드물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모으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점점 더 더 누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자신의 떡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보다는 오늘날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손아귀에 쥐기 위하여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의 돈을 먹고 해외로 도피하여 평온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리 해외에 가서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놓고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크게 한탕하고 난 다음에 위조여권을 만들어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잠적해 버리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경찰은 어떤 사람이 범죄한 것을 알게 되면 미리 출국정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이 가지고 있는 떡을 빼앗아 먹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떡을 빼앗아 먹으려고 혹은 떡을 자기 혼자만 먹으려고 하는 이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떡을 떼어 나누어 주는 일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떡을 떼어 나누어 주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떼어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참으로 영적인 일이며 주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듣기를 잘하고 기도하기를 잘합니다만 떡을 떼어 나누어 주는 일을 잘 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여기서 떡이란 꼭 떡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밥이 될 수도 있고 의복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눈물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삶 속에 있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지만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서로 유무상통하였습니다. 소유를 다 내어 놓고 필요한 대로 서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나눔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여러분 이 노래를 아십니까?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나리어 주셨던 성령의 권능을 주옵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옵소서! 주님 주시는 넘치는 힘으로 저희에게 주어진 떡을 떼어 기꺼이 나누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나기만 하면 떡을 떼어 나누었듯이 저희 역시 초대교회 성도들을 본받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로 나눔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나눔이 때로는 십자가를 짐과 같을지라도 바로 그 십자가의 은총을 나리어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아낌없이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던 것처럼 저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떡을 떼어 나누듯 아낌없이 나누는 나눔의 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에의 부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집에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저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말씀을 주어질 때 그 말씀이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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