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9 월 21 일(주일) 오후 7 시 반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히브리서 9 장 27 절
제 목 : 죽음과 심판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딱 한절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9 장 27 절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이미 죽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고 살아서 죽지 않은 것을 증언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람이 죽는다는 법칙을 사람에게 정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하여 놓으신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정해 놓으셨을까요? 창세기 3 장 19 절과 22 절입니다. 먼저 19 절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2 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가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최초의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한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질서로 죽음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인생이 산다함은 죽음 앞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조금씩 걸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문명이 발달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하여 생명의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고 장수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은 무두셀라입니다. 몇 년 살았지요! 창세기 5 장 27 절입니다.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1 년만 더 사셨다면 네 자리수인 1000 년을 사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거의 4 자리 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후 세 자리수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6 장 3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의 수명은 120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120 년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최고 의학자들이 한데 모여서 인간의 수명을 연구하여 연구하여 내놓은 결론은 인간이 가진 심장의 박동, 피의 순환구조, 뼈의 내구성 등을 종합연구한 결과 인간은 120 년까지 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세계 인류가 거의 61 억을 넘어섰지만 수명은 120을 넘어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지난 세기인 20 세기와 21 세기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1997 년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쟌 깔멩 할머니인데 122 년 6 개월을 살았습니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대수명을 2 년 6 개월을 넘어 산 것입니다. 인간이 노아시대 이전과 같이 1000 년 가까이 살던지 아니면 노아시대 이후와 같이 120 년 어간까지 살 수 있던지 인간은 조금 오래 살고 조금 적게 살고의 차이일 뿐 인간은 다 죽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죽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여러 가지 연유로 죽습니다. 병으로 죽습니다. 병도 수만 가지가 있어 다양한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암이나 에이즈와 같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는 이도 있고 등에 조그만 종기가 나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는 이도 있습니다. 누가 하는 욕 한마디를 듣고 격분하여 뇌일혈로 쓰러져 죽는 이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날 사망의 원인 중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 먹을 것을 먹거나 먹을 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현대병으로 죽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담배를 피어 폐암으로 사망하거나 술을 마셔 간암으로 사망한 숫자가 그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충주서남교회 고종명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 연락이 왔습니다. 그 분은 평소에 건강하신 분인데 세상의 연세대로라면 한 15 년은 충분히 더 사실 수 있는 분이고 이름도 고종명 아닙니까? “고종명”이란 수(壽)와 복(福), 강녕(康寧), 유호덕(유호덕)과 함께 오복 중의 하나입니다. 천수를 다 누리고 제 명대로 살다간 사람의 복을 말합니다. 고종명 목사님도 고종명의 복을 다 누리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우리 생명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려고 애쓰는 것과 반비례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자살하는 이가 많습니다. 지난 번 멕시코 칸쿤에서 wto를 반대하며 자살한 이경해 씨와 같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살한 이가 있는가 하면 삶의 희망을 잃고 자살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영국에서는 <자살의 다리>라 불리우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자살을 막을까 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모종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색체심리전문가가 우중충한 다리의 색깔을 밝은 하늘색으로 칠해 놓게 하였더니 거기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자살을 거꾸러 하면 “살자”입니다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더욱 희망을 가지고 생명의 불꽃을 더 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한 번 뿐인 생명을 더 늘려 보고자 초인적인 노력을 합니다. 몸에 좋다는 온갖 약을 먹고 장생불로초를 먹으며 별별 운동을 다합니다. 숨쉬기운동, 물마시기 운동, 금식 등 여러 가지를 통해서 생명을 더욱 연장시켜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 생명의 수한을 늘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죽음은 그런 사람들을 비켜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저렇게 힘을 써도 인생은 한번 뿐이고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죽음의 허무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89 편 47 절과 48 절입니다.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편을 쓴 다윗은 자신의 때가 무척 단촉함을 짧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한 것은 다들 죽는다 그 말입니다. 신학교 때 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청주에 가서 그 분의 죽음 이후에 장례를 치르는 전 과정을 보았습니다. 무덤에 안장해 놓고 장례꾼들은 그 땅을 발로 밟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 돌구에!!”, 북망산천 가신 님은 어허 돌구에! 언제 다시 돌아오나! 어허 돌구에“ 그 노래 속에는 이제 다시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함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죽으면 그러면 끝납니까? 이제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것인가? 생명이 끝나는 순간과 죽음이 시작하는 순간은 참으로 어디다 경계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찰나입니다. 죽음과 생명을 나누는 칸막이는 단 0.05 초도 안되어 설치됩니다. 죽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영영 이별입니다. 무당종교 샤만니즘에서는 죽은 자들이 원한이 있을 때에는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떠돈다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적어도 이 땅에서 생명은 끝납니다. 그러면 죽음은 허무하고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까? 존재가 흙으로 돌아가고 그저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9 장 27 절을 다시금 보겠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심판을 받는다면 죽어 있는 채로 존재가 없는 형태로 심판 받겠습니까? 죽어 있는 상태로 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이미 땅에서 사멸된 존재를 이 땅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존재케 하시어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 전반을 놓고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뒤에 존재하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어떤 영의 형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 육신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다시 서게 될까요? 아니면 지금의 형태와는 전혀 새로운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될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존재의 형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분명히 어떤 새로운 존재의 형태를 죽음 뒤에 지어주셔서 그 형태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이미 끝장난 무의 형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 일생을 마치고 떠난 사람에게 새로운 존재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전혀 땅에서 했던 일들을 기억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형태로가 아니라 자신이 일생을 살았던 그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존재의 형태로 존재하게 하시어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죽음 뒤에는 무존재가 되거나 비존재가 되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시어 새로운 존재의 형태를 지어주셔서 그로 심판받게 하신다 그 말입니다.
죽음 뒤에는 바로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의 보좌로 심판 받으로 갑니다. 어디 그런가 안그런가 성경을 찾아 봅시다. 요한 계시록 20 장 11 절에서 15 절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곳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오늘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본 계시의 환상을 담은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론대소하고 이 땅에서 대통령을 하였건 아니면 교단 총회장을 하였건 예수님을 믿었건 안 믿었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건 간에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심판대는 흰색입니다. 보통 이를 백보좌라 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이기에 눈부신 빛부신 흰색일 것입니다. 바로 이 백보좌에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놓여진 책들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심판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집니까?
심판은 하나님의 보좌에 놓여 있는 책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 번 재판정에 가 보았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 앞에 자료와 서류들이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사건에는 자료의 두께가 대단합니다. 판사는 그 자료를 가지고 죄인들을 심판합니다만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심판하실 때 자료를 즉 책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보좌에는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계시록 20 장 12 절에 보면 그저 하나의 책이라 하지 않고 여러 책들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해봅시다. “책들에 기록된대로“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지금 이 순간도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시켜서 하시는지 우리 인생을 태어나는 순간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낱낱이 기록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종합기록부가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저는 화정2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초본을 뗀 적이 있습니다. 그 초본에는 지금까지 제가 어디로 집을 계속 옮겼는지가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책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들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실 때 자료가 지금 이 순간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책들이 있다하였는데 12 절에 다른 책들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 다른 책이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져 있는 성경책이 있을 것입니다. 또 구원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 어린양 생명책도 있을 것입니다. 또 여호와의 기념책도 있습니다. 이 기념책은 여호와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금면류관이나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념책에는 있고 생명책에 없는 명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는 있지만 기념책에는 그 명단이 없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 중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죽은 자들의 명단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지옥연명부 정도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즉 지옥으로 보낼 이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각 책들에는 그가 왜 생명책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지 그가 왜 기념책에 명부가 기록되어 있는지 그가 왜 지옥연명부에 기록되어 있는지 그 행위가 소상하게 적혀 있을 줄로 사료됩니다. 각 책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정보와 자료가 낱낱이 수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파견된 천사들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일을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일점일획도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 책들에는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들이 소상하게 마치 캠코더로 찍은 듯 모든 것이 다 녹화되어 있고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느냐도 여실히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느냐 아니면 죽어 있는 믿음이었느냐도 수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어떻게 했느냐? 그저 간신히 주일날 한번 출석했느냐 아니면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출석했느냐가 수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살면서 지꺼만 챙기고 이기적으로 살았느냐 아니면 할 수 있으면 자기의 껏을 나누어 주고 살았느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행한 선행과 악행이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책들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봉사한 시간도 쓰여 있을 것이고 그 책에는 그가 술 마시고 세상의 일락을 위해 쓴 시간도 다 계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책들에는 그가 몰래 한 각종 죄악들도 여실히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책들에 그가 행한 죄악 중에는 이미 회개한 죄악들은 아마도 그 앞에 가위표가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 책들 중에는 그가 한 말들이 분류되어 유익한 말, 해로운 말, 그저 그런 말들이 다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기록이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놓여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흰 보좌 앞에 앉아서 그 책을 근거로 하고 불꽃같은 눈을 통해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 전반에 대한 종합평가를 내리실 것입니다. 내 인생 종합생활기록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판단을 내리시고 지옥행과 천국행을 결정하시고 천국행일 때 기념책을 보시고 그의 면류관과 상급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판과 하나님의 심판은 다릅니다. 세상의 심판은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것을 판단합니다. 재판을 하면서 그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상급까지 주시는 우리 인생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성격도 있지만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단지 천국과 지옥행으로 가는 것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지옥행은 누구나 똑같은 끌려가지만 천국으로 갈 사람들의 상급과 면류관이 정해지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여호와의 기념책에 의하여 다시금 상급과 면류관이 정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천국행으로 가느냐와 지옥행으로 가느냐가 결정지어집니다. 천국행은 백보좌 심판 오른쪽으로 가게 되며 지옥행은 백보좌 왼편으로 가게 됩니다. 왼쪽으로 가는 길은 불못 즉 음부, 지옥으로 끌려 가는 길이요 오른쪽은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희비의 쌍곡선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노영심이 부른 “별걸 기억하는 남자“의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같이 걷던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6개인지 7개인지 그때 우리를 조용히 따르던 하늘의 달이 초생달인지 보름달인지 - 커피는 설탕 2스푼에 프림 한 스푼인지 설탕하나에 프림 둘인지 - 고기집에서 내가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는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르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 나를 처음 우리집까지 바래다 주던날 어느 정류장에서 들리던 노래가 목포의 눈물인지 빈대떡 신사인지 혹시 기억할 수 있을까 나를 처음 만난 날 내가 구두를 신었는지 아니면 운동화를 신었는지 그때 화장을 했었는지 안했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기억까지도 다 기억하는 남자는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소한 것은 시시콜콜하게 기억하고 진정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을 쓸데없는 것을 너무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기억해야 할 사실 중 중요하고도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결국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죽음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 보좌에서 우리 인생을 종합평가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심판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삶의 신발끈을 다시 매어야 합니다. 전도서 11 장 9 절을 보겠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오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2 장 14 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인생을 종합평가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 한 5 년 후에 그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 20 년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보좌 앞에 선 인생에게 분명 한마디 쯤 물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대답할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금번 교단 총회장이 되신 전주중앙교회 김옥남 목사님은 자신의 신장 한 개를 이름없는 어떤 분에게 기증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총회장님이 이 세상 이별할 때 백보좌에서 심판을 받으실 때 보좌 앞에 있는 책에는 이 사실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내 종아 너는 귀한 것을 나에게 봉헌하였구나!“ 하시면서 한번 가슴으로 안아주시지 않으실까요? 만일 여러분이 백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은총으로 허락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실 때 이 시간 무어라 대답하려 하십니까?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마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인생종합평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시다. 바로 그때 여러분은 무슨 말을 주께 하실랍니까? 이 시간 조용한 음악과 함께 내가 주님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죽음 이후의 심판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희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허락하신 삶을 보람되게 살게 해 주옵시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도록 저희의 삶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이 땅의 삶이 결코 지옥으로 가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않게 하옵시고 할렐루야 찬송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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