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10 월 12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히브리서 11 장 1 절 - 7 절
제 목 : 믿음은 바라보는 관점이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기 모여 있는 모두에게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소리가 큰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크게 임할 것이고 아멘 소리가 적은 사람은 은총과 평화가 큰 사람 보다는 약간 적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없는 사람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은총과 항구적인 평화가 성도 여러분들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사가 성경이 주신 권위로 “은혜와 평화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 때 그렇게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서 힘차게 아멘!!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여러분의 인생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서두에 축복을 하면 아하! 저것은 목사가 설교할 때 의례 시작하는 인사말에 불과한거지!! 그렇게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거나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에게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을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이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린 바로 그 신앙이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비록 예수님은 여기 계시고 자신의 하인은 거기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예수님의 능력이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줄 믿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라는 것이 하인이 나음으로 실상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꿈을 현실과 합체시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엿장수가 엿을 바꾸어주시듯 꿈꾸었던 미래를 그 꿈이 이미 실현된 현실과 바꾸어 주십니다. 너무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던 것들을 주님이 실상으로 바꾸어주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경 히브리서 11 장 2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도 이미 얻은 증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오늘은 히브리서 11 장 1 절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딱 한마디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였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은 알지 못하는 것인데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저는 <요조숙녀>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별을 공부하는 천문학도입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밤하늘 창공에 별이 빛나지 않으냐? 낮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창공에 별이 없는 것이 아니 잖느냐? 때론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나 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항상 있다!”. 이 말 한마디로 요조숙녀를 사로잡습니다.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란 독특한 앵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독특한 앵글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고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 장 3 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보니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움으로 봅니다. 돌들에 핀 민들레 꽃 한 송이에서도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같지 못하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수년 전의 일입니다만 한 일본 여성의 누드사진이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을 모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산타페에서”였는데 산타페에서 찍은 일본의 미야자와 리에 누드 사진집입니다. 사람들마다 그걸 보고 “외설이다!”, “음란이다!!” 아니다 “예술이다!” 논란이 가열될 때 로마의 교황이 그 사진집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한 것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똑같은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외설로 보고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으로 보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그 인생을 성공하게도 하기도 하고 행복하게 하기도 합니다. 크게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배후에 뭔가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에겐 우선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성공할 사람인지 아닌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A4 용지에 점을 하나 찍어 보여 준다). 자 여기에 무엇이 보입니까? 누구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은 점이 보인다고 얘기합니다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 장의 종이에서 점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점 주변에 있는 훨씬 넓은 면적의 여백을 보는 사람입니다. 점에 비해서 여백이 만배도 더 되게 넓습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정주영 아들 정몽헌 회장은 어떻게 다릅니까? 정주영이 어느 날 헬기를 타고 한국의 도로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수많은 현대차가 도로에 달리고 있었습니다만 정주영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도로에 차가 있는 곳보다도 차가 없는 곳이 많으니 훨씬 더 많은 차를 팔아먹을 수 있겠다! 자기가 만든 현대차로 도로가 가득 메어질 것을 상상하면서 웃음지었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점을 보았습니까? 여백을 보았습니까? 도로에 아직 현대차가 없는 여백을 먼저 보고 그 여백을 자신이 만든 차로 채울 가능성으로 보았습니다. 그에 비해 아들 정몽헌 씨는 한 장의 종이에서 있는 지극히 적은 점만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비자금과 그로 인한 문제점만 보았고 결국 그것에 얽매여 있다가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비자금 문제가 지극히 적은 점이라면 현대가 지닌 경제적 역량과 잠재적 가능은 일만배나 되는 여백과 같이 많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너른 그라운드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같은 조건하에서 같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가 결정됩니다. 객관적 현실은 똑같은데 바라보는 시각 여하에 따라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도 하고 불행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집 사람은 저에게 여러 가지 말과 소리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왜 허구하게 양말이 많은 데 빵꾸난 양말을 골라 신고 나가느냐?”, “새벽기도 시간에 깨웠는데 왜 나가지 않느냐?”, “넥타이는 왜 그렇게 삐투로 매느냐?”, “잘 때 양말을 벗고 자야지!!”, “설교할 때 오늘은 말이 그렇게 빠르냐?”, “우산을 가지고 갔으면 올 때 가지고 와야지 어디다 두고 오느냐?”, 아내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성경 잠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가지를 긁는 아내와 살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낮다!!”. 그런데 아내가 왜 저에게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건망증이 많은 편인데 최근에도 그 건망증이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지난주 계림교회 임직식에 갔습니다. 축하선물로 케익을 받았습니다만 계림교회 윤세관 목사님이 수고했다고 케익을 하나 더 주었습니다. 부목사님도 저에게 케익을 또 하나 주었습니다. 도합 세 개의 케익을 두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걸어가는데 계림교회 어떤 한 집사님이 - 그 분은 한 때 가나안교회 새벽기도에 나오셨던 분인데 - 걸어가는 저를 보고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그 집사님은 “사모님은 안녕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내가 교회차를 계림교회 앞에 세워두고 가니 그 차를 타고 오라고 하는 말이 그제서야 생각나 집사님께 미안하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 즉시 차에서 내려 다시 계림교회쪽으로 가서 교회차를 타고 왔습니다. 집에 오고 보니 성경책을 담은 가방이 없어졌습니다. 어디에다 가방을 놓아두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았는데도 까마득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윤세관 목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가방을 당회실에 두고 왔으니 찾아가라고!!” 받은 케익 세 개에 홀려서 목사가 생명의 빵인 성경을 놓아두고 오다니!!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금 성경책과 가방을 찾아 “내가 왜 이렇게 한심할까?” 반성을 하고 돌아오면서 아내가 나에게 왜 신신당부를 하거나 자주 두 번세번 상기시키면서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내가 하는 잔소리에 대해 묵상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아내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그저 하는 것이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나를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 지치지 않고 그런 고마운 말을 지치지 않고 해주는구나!!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니라 부족한 남편, 엉망진창인 남편이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해주는 말을 그저 잔소리로만 여겼구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엉망진창이고 천방지축인 나같은 이를 위해서 차분하고 섬세하고 샤프하고 지칠 줄 모르고 틀린 점을 조언해주는 아내를 살 중의 살로 뼈중의 뼈로 주셨구나! 고백하게 되고 아내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건망증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많습니다. 약속을 해놓고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언제 내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되묻습니다. 한참 나중에서야 아하! 내가 그런 말을 했고 그런 약속을 했지!! 하면서 미안해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들이 하도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성도 여러분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따뜻함을 느낍니다. 오해할만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오해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이해의 시각에서 보는 교인들의 관점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내가 목회하는 교인들도 참으로 착하고 기특한 이들로만 채워주셨구나 하고 하나님 은혜에 열심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건망증이 심해지어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면 언젠가 저도 <재신임 투표>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생겼다함은 바라보는 시각이 생겼다함이요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함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것, 믿음이 크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라보는 관점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信卽觀이라!!“ 보통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에게 사람들은 “눈깔이 삐었다”, “눈깔이 확 뒤집어 졌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그이에게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이고 약점은 보이지 않고 강점만 보이고 허점과 결점은 보이지 않고 좋은 점만 보게 됩니다. 신앙을 갖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용서하십시오. 강하게 기억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 <눈깔역전>, 바라보는 시각이 확 바뀌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라보는 시각이 바라보는 관점이 바라보는 눈이 확 역전되는 것, 전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독특하여 그저 상식의 눈으로 보지 않고 바로 육안이 보는 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해와 올해 가장 많이 찾아다닌 곳이 바로 병원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찾아가면 병상에 누워있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할 때 대체로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 부류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이야 누구든 아프는 것이지! 병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찾아와 주는 것만을 감사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둘째 부류는 그저 짜증과 불평입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교인이면서도 날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날 왜 병들게 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누워있게 하는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이도 있었습니다. 셋째 부류는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정신 없이 살다가 마음과 육신이 너무도 피곤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가 있는 이곳으로 병상으로 인도하여 나에게 평강도 주시고 나를 쉬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곳 병상으로 인도하시고 머물게 하셔서 나의 지나온 생활을 돌아보게 하시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되돌아보게 하셨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병상에서 찬송을 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병과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입원하였을 때도 그렇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든지 하나님이 날 지키시지 않아서 그렇다든지 그렇게 말할 법도 한데 그 사람은 하나님이 그때 그 순간 날 지켜 주셨다면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그 때 그 순간 결정적인 순간 지켜 주셔서 이만 만큼 가볍게 다쳤다고 고백합니다. 시편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19 편 71 절을 보겠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인은 고통과 시련을 엄청나게 당하면서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그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유익을 먼저 봅니다. 사도 바울도 <눈깔이 역전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나 다음 바울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유대교를 허물어뜨리는 악성 바이러스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는데 이제는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시각이 바뀌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남은 평생 다른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고 오직 주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찌르는 가시와 같은 통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눈에 비늘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고통을 느끼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나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으면서 나를 건강하게 해 주셔야지, 내가 안 아퍼야 복음도 힘있게 전하지 하면서 자신의 찌르는 통증을 놓고 예수님께 불평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통증을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고린도후서 12 장 7 절에 그 시각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비늘이 눈에서 떨어진 시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은혜로 찌르는 가시와 같이 내게 주시는 넘치는 은혜로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 때로 우리 옆에는 브닌나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브닌나가 누구입니까? 엘가나의 아내입니다.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와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가 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엘가나의 아내였습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끊임없이 구박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 장 6 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한나에게는 브닌나가 원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한나는 브닌나에게 직접 대응을 하지 않고 다만 여호와께 눈물로 기도함으로 자신의 고통을 아뢰었습니다. 10 절에 보겠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는 괴로울 때 브닌나에게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브닌나가 구박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한나에게 주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여호와께로부터 선물을 받고 기도를 그친 것이 아니라 감사의 기도를 계속하여 드립니다. 사무엘상 2 장에 보면 오히려 원수같은 브닌나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이 없었지만 아마도 한나는 여호와께서 브닌나를 자기 곁에 두시어 자신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나의 기도는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브닌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저 브닌나가 없었더라면 저 브닌나가 저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저는 억울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저는 자식을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사무엘과 같은 자식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브닌나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사옵고 브닌나로 인해 눈물로 기도하게 되었사오니 하나님 저 브닌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한나는 아담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돌렸지만 한나는 오히려 브닌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역시 기도하는 여자라 다릅니다. 브닌나를 주시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믿음의 사람 요셉도 같은 시각을 가졌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이 지나온 날들을 말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들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 같은 형들에게 무어라 말합니까? 창세기 50 장 20 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무엇입니까? 형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지만 구원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을 구원하게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형들의 자녀들까지 양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요셉의 눈이 전혀 여느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자기 형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일들을 그저 분노하지 않고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역사 가운데 일어난 일로 고백하면서 오히려 형들을 선대해 줍니다. 요셉에게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보는 시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11 장 6 절입니다.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우리에게 믿음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으면 그 인생 아무리 잘나가고 성공을 이루었다고 해도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 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서 11 장 5 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면 그 인생에게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됩니다. 그 인생을 맡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바라는 것을 꿈을 꾸고 상상하는모든 것을 실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역사하셔서 받은 증거가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주님께 찬송을 절로 올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 여러분이 큰 믿음, 강한 믿음, 굳센 믿음, 성숙한 믿음 갖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들마다 실상이 되고 보지 못하는 것들도 보게 되어 받은 증거가 쏟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눈이 먼저 바꾸어지고 바꾸어져야 합니다. 눈은 그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바꾸어집니다. 한나도 제일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고 원통했지만 기도하면서 그의 눈이 바꾸어져 갔습니다. 기도할 때 그의 눈은 모든 것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눈을 달라고 눈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로운 눈으로 하나님의 이루시는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바꾸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오른 손으로는 두 눈에 얹으시고 거기가 마음의 눈이라 생각하시고 왼 손으로는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주님 이 시간 저희가 두 손을 사용하여 저희의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에 손을 얹어 놓고 기도드립니다. 주님 이 시간 저희 각자에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눈에 주님 친히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눈을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저희의 눈이 세상에 있는 것만 보는 눈이 아니오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눈이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눈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눈이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금방 발견하는 은혜의 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눈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속에서 행하신 주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보는 분명한 시야를 열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로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는 믿음이 되게 하옵시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즐거워하는 믿음 되게 하옵소서!
참고 자료1>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강하게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지금도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을 어제도 사랑하시고 오늘도 사랑하고 계시며 내일도 여전히 사랑하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여러분이 푸른 초장에 있을 때나 험한 골짜기에 있을 때 동일하게 임마누엘 하셔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악을 변케 만들어 선을 이루어 줄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 시련 속에 은총이 담겨 있으며 여러분의 눈물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상생활에 관여하셔서 여러분에게 좋은 것으로 마련하시고 지금 바로 그 은총을 내려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께서 곧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여러분이 비록 죄 가운데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다 속죄하여 주시고 여러분을 지옥으로 가지 아니하고 천국에 다 이르도록 성령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이 땅에서도 젖과 꿀이 흐른 가나안으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믿음을 가지고 찬송가 344 장을 함께 부르고 이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2. 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3.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후렴) 걸어 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 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참고자료 2> 지난 주 어떤 학생이 외국으로 공부하러 나갔습니다. 그 학생은 모태신앙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이 낯 설은 땅에서 모든 일이 하는 일마다 잘 풀렸습니다. 학생은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형통하게 만사가 잘 풀리는 것은 나를 향한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습니다. 학생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어머니가 날 사랑하시고 날 사랑하시기 때문에 날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낯 설은 타향에서 눈으로 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믿습니까? 아닙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어머니가 날 사랑하시기에 기도하는 모습이 마음의 심상 속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뚜렸하게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명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3>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저 모든 일이 잘 되어도 운수가 대통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함께 해주시니까 그렇게 형통하게 되는거야! 그렇게 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 알고 믿습니다. 사물이 그 눈에 비추어 져서 시신경을 통해 그의 망막에 맺혀질 때만 그렇다 시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 20 장 24 절에서 27 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끼 때문에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그러므로 보지 못하면서도 보는 것처럼 믿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는 이를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7 절에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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