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11 월 5 일(수) 오후 7 시 광주가나안교회 수요일밤 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0 장 33 절 - 35 절
제 목 :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느니“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주의 전에 나아온 성도들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 장 35 절 첫 부분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여기서 “너희”란 누구를 말할까요? 20 장 17 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7 절에서 시작된 말씀이 35 절에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여기서 “너희“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밀레도에 있으면서 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였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에서 에베소에 교회가 있고 장로들이 있으니 상당히 연륜이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에베소는 아시아에 있는 로마제국의 큰 항구도시로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3 차 전도여행때 이 에베소에 방문하여 2 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유대인의 회당과 두란노서원에서 주의 말씀과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전도 요충지로 삼아 아시아를 복음화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에베소를 떠날 때에는 디모데를 남겨두어 복음전도 사역을 계속하게 했는데 사도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은 점점 자라서 교회가 형성되었고 에베소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장로들도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3 차 전도여행중 밀레도라는 곳에서 머물며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에게 전갈을 보내 밀레도로 오게 한 것입니다. 왜 밀레도로 오게 하였을까? 바울 사도는 3 차 전도여행을 통해 무척 육체가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1 차, 2 차, 3 차를 걸쳐 거의 수만 km를 도보로 다니면서 전도하였으니 아마도 바울 사도의 발은 말할 수 없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보다는 지중해가 있는 쪽에서 더 아래에 있는 휴양도시로서 바울 사도는 제 3 차 전도여행중에 피곤한 육신을 좀 쉬려고 거기서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에게로 즉각 왔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누구였을까?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 세운 디모데와, 아굴라 브리스길라 두기고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무척 반가와 바로 밀레도로 내려갔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사도 바울이 3 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결실로 교회가 성장하였는지라 - 즉 에베소 교회로서는 바울 사도가 어머니 같았는지라 -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 사도의 헌신적 수고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바로 밀레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고별하는 말씀을 하였는데 사도행전 20 장 18 절에서 35 절에 있는 말씀은 장로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제일 처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왔을 때 서로 인사하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안에서 바울이 설교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설교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18 절에 보면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서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행한 일들을 추억한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시작하다가 35 절에사도 바울은 “내가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 년간 에베소에서 사역하였을 때 그저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였을 때 사도 바울은 생활 속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본을 보였습니다. 잘 안다고 자신이 키운 사람이라고 하여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 하나가 내 행동 하나가 어떻게 비추어질까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나 뭇 성도들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을 보였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는 사도행전 20 장 17 절에서 35 절에 있는 내용을 자세히 살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5 절 첫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연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 년 동안 있으면서 여러 형태로 연약한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병들어 약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슬픔에 쌓여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여러 가지 형태로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도와주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도와주었습니다. 슬픔에 쌓여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위로를 전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쳐 가거나 못본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약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왔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까지도 배려해 주라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고기를 먹으면 안되는데 생각하는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어 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신앙생활에 하등 상관이 없다고 믿고 있다 하더라도 연약한 사람을 위해 고기를 그 앞에서 먹지 않으며 그 연약한 믿음이 깨지지 않게 배려해 주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또 무엇으로 모본을 보였을까요? 35 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연후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일에 모본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 보면 받는 삶보다도 주는 삶의 일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더 주는 것을 적게 하고 내가 받는 것이 많게 하는 이익된 삶을 살려 합니다. 내가 받는 것이 적으면서 내가 많이 준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손해보는 바보같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더 소유하려 하며 더 챙기려 하고 더 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주께로 받은 것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복음을 전하면서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일생 동안 자기 집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저축통장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자신의 안락한 가정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것으로 무엇인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일생 동안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모아두거나 무엇을 쌓아두지 아니하였습니다. 받는 복보다도 주는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한평생 치유,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나누어 주는 일에 치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에 모본을 보였습니까? 33 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사도 바울이 만일 부귀영화를 구하였더면 무척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치유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만일 죽어가는 자나 병든 자를 고치고 그들에게 돈을 받기로 맘을 먹었다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만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무당들과 사이비 종교인들이 복채를 챙기고 무엇인가 뒷돈을 챙겼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과 같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복음에 대한 댓가를 받으려 했다면 사도 바울은 밀레도라는 휴양도시에 정원이 딸린 널찍한 집을 두어채를 구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하는 곳마다 기적을 행하여 맘만 먹었다면 부동산을 매입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금은보화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주었고 치유를 하였을 때도 그 어떤 댓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능력있는 부흥사나 교역자는 항상 타락하기 쉬운 자리에 있습니다. 맘만 먹으면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질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주고 세속적인 것을 챙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4 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한 한 사람을 고쳐 주었을 때 사람들이 신이라고 경배를 드리자 바울은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아마도 찢어진 옷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꿰메서 입고 다녔을 것입니다. 바울은 의복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옷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 장 9 절에서 1 절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아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성경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옷을 구입하였다거나 여벌의 옷을 가졌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 1 차, 제 2 차, 제 3 차 전도여행을 옷 한 벌로만 여행함으로 청빈의 삶의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중세 교회에 베네딕트 수도회가 있었는데 이 수도회에 들어가려면 세가지 서약, 즉 청빈, 정결, 순명의 서약을 해야 합니다. 청빈의 서약은 각 사람이 자신의 사적 재산을 조금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하는 서약이고 정결서약은 성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서약이며 순명 서약은 수도원 공동체의 지도자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서약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저 예수님 말씀 하신대로 옷 한 벌 입고 다니면서 청빈한 삶의 모본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에 모본을 보였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24 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이리 뭉치고 저리 뭉뚱거려 가지고 전부를 주 예수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한 사업에 몽땅 바쳤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올인(all-in)하였습니다. all-in 이란 카지노에서 게임을 할 때 어느 시점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칩을 모두를 다 그 게임에 거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올인하였습니다. 영원을 향해 다 all-in 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시는 주님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은 자신의 생활의 지극히 일부분만 내어 놓습니다. 시간도 지극히 적은 일부만을 물질도 지극히 적은 일부만을 내어 놓습니다만 바울 사도는 자신의 존재 생명 전체를 다 내어놓는 모본을 보인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하고 말한 뜻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자기를 드러내려 하였을까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자신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칭송을 받으려 하려 하였을까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자신의 송덕비쯤을 세워주기를 바라는 맘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며 누군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여 자신의 일대기를 펴내 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이 모본을 보였다함 속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난 다음에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3 장 12 절에서 15 절을 보겠습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도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되거라! 너희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거라! 모본을 통해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럽에서 최초로 세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빌립보 3 장 17 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과 빌립보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영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누구에게 전도를 한다고 합시다. 우리 교회 나갑시다!. 예수 믿고 사십시오! 전도하였을 때 전도를 당한 사람은 먼저 전도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전도하는 사람의 전도의 말을 듣고 최초로 그의 삶을 생각합니다. 그의 삶이 진실한지 다른 사람의 모본이 되는지 그 사람의 삶이 친절하고 내가 따를만한지 아니면 형편없는 삶을 살면서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을 살면서 그렇게 말하면 그가 전한 복음이나 그가 소개한 예수도 역시 형편없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면서 그 역시 알았어요! 하면서 말만 하고 실제적으로는 따르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흠모할만한 삶, 모범적인 삶,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삶을 살 때 그가 믿는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언젠가 저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셋집에 살고 있었는데 주인집의 아줌마가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집 아줌마는 교회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너무도 맘씨도 좋고 자신이 불편하게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이 돋보였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를 들어도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집 아줌마는 언제나 교회를 나가는데 도무지 자기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번 교회를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너무도 좋아 따라 나섰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 그가 믿고 있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본을 보이지 않으면 결코 따라와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진실하게 살면 그가 예수님을 전하지 않아도 그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당신이 믿는 예수 나도 한번 믿어보자! 하고 따라나서게 됩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대단한 웅변술과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고 그 생활이 그 복음을 뒷받침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능력있게 전파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뒷돈을 받고 여러 곳에다가 호화주택을 매입하고 가는 곳마다 현지처를 두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기 보다는 강자에 붙어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사례비를 받고 주기보다는 받는 것을 신경을 쓰고 항상 좋은 음식, 좋은 옷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말을 했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능력을 상당히 그 전파의 효율성이 삭감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은 능력있는 곳이 못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더 이상 퍼져 나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울의 그리스도적인 삶으로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복음의 진실성을 믿게 되었고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 더욱 사람들은 받은 복음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모본을 보일 때 더욱 능력있게 전해집니다. 바울 사도가 행한 고별설교를 유심히 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니 아마도 그 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빼째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 부부는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모본이 되는 삶을 살아 성경에 그 부부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열심히 전도하며 바울 사도를 도왔습니다. 성경에서 부부의 이름이 함께 나온 경우에 아름다운 관계가 아닌 것이 대부분입니다. 아담과 이브,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있습니다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두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제가 당시 바울 사도가 고별설교를 할 때 바울이 밀레도로 오라고 한 장로들이 누구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에베소에서 바울 사도를 도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그 자리에 와서 바울의 고별설교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바울을 사랑한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고린도에서와 에베소에서 동행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한 모범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두 부부는 바울과 같이 천막을 제조하는 일로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소득을 바울 사도의 선교를 도왔습니다. 또한 자신의 것을 교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놓는 헌신적인 삶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 장 19 절에 보겠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그렇습니다. 두 부부는 아낌없이 자신의 집을 교회의 사용처로 내어 놓았습니다. 두 부부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해 노벨상을 탄 지미 카터 대통령은 참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정사를 돌보느라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은 난잡한 생활로 욕을 얻어 먹었지만 지미 카터는 참으로 신실하고 성결한 삶으로 다른 정치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고 그것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신실한 생활 때문에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지미를 서로 호칭할 때 집사님이란 말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대통령들은 <코드 원>이라고 부르는데 지미 카터 대통령은 집사님으로 서로 통칭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을 그만 둔 후 더욱 더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을 방문하면서 집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계적인 연대를 형성하여 북한에 식량을 보내주는 일에도 앞장 서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로서 또한 교회학교 교사로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렇게 신실한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카터 대통령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정신이 그의 몸에 박혀있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7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두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친자식과 같이 양육하였다는 것입니다. 처녀시절에는 종군간호원으로 지원하여 간호원으로 봉사하였고 결혼 후에는 마을 흑인 절반의 병간호를 책임지고 도맡아 하였는데 백인들의 반대에도 결코 좌우됨이 없이 진심으로 흑인들을 위하여 봉사하였습니다.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의 측근인 앤드류 영이 의원으로 출마하자 인종을 초월하여 수표를 보내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카터의 어머니는 59 세에 남편이 소천하자 훈련소 기숙사에 들어가 7 년간을 봉사합니다. 다시 2 년간을 요양소에서 근무하고 68 세에서 79 세까지는 평화봉사단에 가입하여 인도로 가서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간호하였습니다. 카터는 이러한 어머니를 보며 깊은 영적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신으로 살면 그 자녀들에게 모본이 되고 결국 그 자녀도 역시 그같은 그리스도인의 모본이 되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크게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론 교회생활, 신앙생활도 잘하여야 하겠지만 사회에서 하는 생활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 장 13 절에서 16 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이 많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 빛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결국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 일입니다. 둘째는 착한 행실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게 되면 이는 자연히 전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따라가려 합니다. 바로 그 때 내가 예수를 믿어라고 전도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생활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되고 자연히 그 도를 따르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가나안 성도 여러분들도 바울 사도와 같이, 지미 카터 집사님과 그 어머니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모본을 보이는 착한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모본이 되는 삶을 살았듯이 저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비치우며 모본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 모두가 말과 행실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해 주옵소서! 저희가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의 겸손하심을 본받게 해 주옵시고 주님 말씀하셨듯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그대로 서로 사랑하며 착한 행실을 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가나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생활의 현장에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활을 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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