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년 12 월 28 일(주일) 오후 7 시 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빌립보서 2 장 1 절 - 11 절
제 목 : 낮춤과 비움의 영성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영혼과 생활 속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오신 이 계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이는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내가 지치고 힘들었을 때 나에게 생수잔을 건네시며 지친 몸에 생기를 주시는 분”이라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시는 분!”이라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과 어둠의 세상에 오시어 생명의 춤을 추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은 “내 삶에 의미를 주시는 분!”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내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케 해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 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 있었을 때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보통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들은 평상시 집에서 보내온 편지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감옥 안에서 유폐되어 있을 때 사람은 일반적으로 활동은 축소되고 생각이 많이 발달하게 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실까? 부활하셔서 나에게 나타나시고 나를 사도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누구실까? 그 분은 단지 한 분의 뛰어난 인간일까? 아니면 선지자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앙고백을 정리한 것이 바로 빌립보서 2 장에 나와 있습니다. 6 절에서 8 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자기를 비우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장 6 절에서 7 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오실 때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성경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 장 1 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자 여기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14 절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이 하나님이신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은 그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들어 오셨다함을 말합니다. 성경말씀 중에서 가장 쇼킹한 구절의 말씀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4 장 8 절에서 9 절입니다. 8 절을 보겠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제자인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할 때 “아버지”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만드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빌립의 질문도 참으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생떼를 쓰는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걸려 있는 별을 따다가 내 손안에 가져다 달라는 황당한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인 빌립보다도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 9 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마 이 때 빌립은 놀라고 놀랐을 것입니다. 세상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데 예수님이 바로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너는 그것도 몰랐느냐?“ 하고 대답하신 것 아닙니까? 세상에 지금 빌립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생명과 사망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자신과 똑같은 눈코귀가 있고 입이 있어 말씀하시는 바로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을까?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아니 인간이 되시어 인간과 똑같이 밥을 드시고 생선도 드시고 인간과 똑같이 피곤하여 잠도 주무시고 인간과 똑같이 말도 하시는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상의 평가와 제자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인간과 똑같이 쉬시기도 하실까?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되 마법의 지팡이를 한번 탁 때리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의 땀과 인간의 눈물을 알며 인간이 지닌 희로애락을 알며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알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셨습니다. 어떤 대제국의 황태자가 한 고을 시골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 황태자는 명령을 내려 그 시골처녀를 데리고 오너라 내가 아내로 삼아야 겠다 그렇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그 황태자는 진정으로 그녀의 사랑을 얻고 싶었습니다. 만일 권력으로 그녀를 독점하면 그녀의 몸을 차지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평민으로 가장하여 그 고을에 이사를 갔습니다. 가서 그 처녀가 물을 깃는 것도 도와주고 그 처녀에게 해꼬지하려는 불한당들로부터도 지켜주고 온갖 관심과 정성을 다 쏟아 처녀로부터 차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혼약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말하고 대궐에서 혼인을 하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얻고자 왕세자가 모든 권력을 비우고 평민으로 낮추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시어 인간을 섬기시고 사랑하시기에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인간과의 눈높이로 낮추시고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빌립보서 2 장 5 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하였습니다. 품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비우고 낮추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아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비우셨듯이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정계를 떠나지만 다시금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계로 돌아옵니다. 보통 사람들은 채우는 일에 너무 관심이 있습니다. 요즘 이상한 유행이 돌고 있습니다. “3 년 안에 5 억 만들기” 그런 유의 재테크가 유행입니다. 뭔가를 가득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항아리에 무엇인가 부단히 채우는 일에 땀을 흘려야 삶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기항아리와 쌀항아리를 놓고 오늘은 고기항아리에 고기를 채워놓고 내일은 쌀항아리에 쌀을 채워 놓고 하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이 다 되었을 때에야 자신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에 몰두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저금통장에 차곡차곡 돈이 쌓여갈 때 인생의 보람과 삶의 가치를 느낍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을 더욱 증식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곳간에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득 채워나가는 일에 열심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더 채우기를 원합니다. 이것으로 채우고 저것으로 채우고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채워달라고 기도하고 땅에 기름진 것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도 주옵시고 저것도 주옵시고 요것도 주옵시고 달라고 하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것은 비울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삶의 보자기를 비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속에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기에다가 이것저것을 더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우리가 두 손에 무엇인가 가득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을 달라고 할 때는 먼저 우리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에게 전자편지보관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관함에는 일정한 용량이 있는데 편지가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편지가 오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도 내 편지 보관함이 가득 차 있으면 오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옵니다. 우리 속에 이런 저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거기에다가 이것을 채우려고 하고 저것을 채우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삶의 보자기 혹은 삶의 곳간에 있는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저는 법정 스님의 글을 읽습니다. 그 분은 “맑고 향기롭게” 살기 위하여 부단한 실천을 합니다. 특별히 그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무소유의 소유 철학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철학입니다. 그 분은 책을 읽고서도 그 책을 간직하지 아니하고 읽은 책을 기증하거나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주어 버립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지만 그 의 마음은 넘치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스님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비움이 주는 자유로움과 비움이 주는 풍부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번민과 고통이 어디서 오느냐 소유하려는 데서 집착하려는 데서 옵니다. 집착의 고리를 끊으면 그토록 자유롭고 풍부한데 더 소유하려는 탐욕의 고리를 끊으면 그만큼 더 풍부해지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소유하려고 하고 더 누리려고 하고 더 채워두려고 합니다. 소유와 집착이라는 끈에 묶여 실상은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채움만 있고 비움이 없으면 그 삶에 싱싱함은 달아납니다. 채우려 하는 일은 쉽습니다. 누구나 본성 속에 채우려는 의지가 있기에 그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비우려 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 세상의 욕심으로부터 비우고 영적인 욕심에서 조차도 비울 때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채우려 할 때 그 욕심과 집착 속에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는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는 관심이 있지만 정작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비움의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 속에 세상의 생각이나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백팔번뇌로 가득 차 있을 때 또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 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오시어 좌정하시기 힘듭니다. 우리 속에 우리 삶에다가 이것으로 채우고 저것으로 채우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을 비워놓는 일입니다. 채움이란 욕심과 연결되지만 비움은 영성입니다. 자신을 비울 때 바로 그 가난한 바로 그 자리에 가장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번 주일이 마지막 주일입니다만 이제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2004 년에 받을 새 은총을 위해 먼저 내 삶의 곳간을 정갈하게 비우는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의 속은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 난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분 자신을 내적으로 응시하시기 바랍니다. 속에 있는 것들을 깨끗이 헹구어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울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주님은 주님 자신으로 우리 속을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같이 낮추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군림하는 독재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낮아지셨고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올라갈려고만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개신교 최대의 신학자는 인간의 죄성을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려 하는데 인간은 계속 높아지려는 교만에 그 죄성의 뿌리가 있다 하였습니다. 인간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계속 높아지려고 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자기를 높은 곳으로만 인도하신다고 믿고 하나님이 자신을 높은데 올리지 않으면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무기력하게 느끼거나 필요없다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낮은 데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고 낮은 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계속 올라가려고 하지 낮은 데로 처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새 생활 윤리를 말합니다만 강조하시기를 항상 낮은데 처하라 하십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 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롬 12 : 14∼16). 우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푸른색 리트머스 시험지를 산성이 담긴 물에 넣으면 붉은색으로 바꾸어지고 붉은색 리트머스 시험지에 산성이 담긴 물에 넣으면 붉은색 그대로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겸손이란 리트머스 시험지에 담궈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면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른다면 그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 집이 잘 지어진 집인지 그렇지 않은 집인지 알려면 시련의 광풍이 몰아칠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가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로 평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빠져들기 쉬운 것이 바로 공로주의와 업적주의입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자랑합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은 내가 했으면서도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께서 힘을 주시어 주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어 그렇게 되었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성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의 제일 가는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거스틴은 바로 겸손이라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그러면 두 번째로 큰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시 겸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세 번째로 기독교의 가장 큰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도 겸손이라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나도 겸손이요 둘도 겸손이며 셋도 겸손입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교수에게 한 학생이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뜻 깊은 발견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심프슨 교수는 환자들에게 고통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마취제 클로로프롬을 발견, 세계 의학계에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칭송받는 의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심프슨 교수가 당연히 그 마취제의 발견을 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심프슨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며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죄인으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허물이 많은 사람으로, 죄인이라는 고백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채워 주십니다. 야고보서 4 장 6 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5 장 5 절에서 6 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자기의 것으로 자기의 공적으로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자기가 자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자신을 비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우신 것처럼 주님 저희 비우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저희의 욕심을 비우고 저희의 집착을 비우고 저희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비우는 인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로 그리스도를 통해 배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낮추셨듯이 저희를 낮추어 복종하는 심령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의 발을 씻기신 그 섬김의 도를 저희도 실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추신 것처럼 저희 역시 주님의 철저한 순종을 본받게 해 주옵소서! 주님 저희 속에 저희가 있음이 아니오라 저희 안에 주님이 계셔 주시옵시고 주님 저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 주시어 저희로 주님을 본받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도>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비움과 낮춤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비울 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나려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오늘도 거룩한 영으로 역사하시어 우리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로 낮춤과 비움의 삶을 살도록 깨우침과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이 오늘 주의 전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저희 자신을 비우고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가나안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예배의 부름> 주님 이 시간 저희 존재를 주님의 말씀 앞으로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주님 저희의 존재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많이 떨어졌다면 주님 저희 존재를 주님께로 더 끌여 당겨 주시옵시고 저희의 존재가 마침내 주님의 은총의 품 안에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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