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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

관리자 2010-12-14 (화) 17:10 15년전 1859  

2003 년 12 월 25 일(목) 오전 11 시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마태복음 4 장 12 절 - 16 절

제 목 :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기쁜 날입니다. 교회마다 성탄절인데 성찬식과 세례식을 베풉니다. 예수님 오신 기쁜 날에 세례식을 베푸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 오신 날에 성찬식을 베푸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 탄신하신 기쁜 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시기 직전에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피와 살과 나누는 예식을 거행할까? 이는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의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분리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흑암과 빛이라는 두 가지 대립개념을 통해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때립니다. 나를 때리면 아픕니다. 아프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픕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를 부드득 갑니다. 나를 때려! “내 눈에 눈물이면 네 눈에는 피눈물이다” 하면서 내가 아팠던 것보다도 더 아프게 때려 줍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아픔을 당한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까? 아닙니다. 맞을 때는 주먹으로 맞지만 복수할 때는 몽둥이로 때립니다. 몽둥이로 때리면 가만히 있습니까? 몽둥이보다도 더 센 칼과 창을 가지고 가서 피투성이로 만듭니다. 그러면 피투성이가 된 사람에 속한 가족들은 천추의 한을 품고 복수를 맹세합니다. 그리고 가서 온갖 살상무기를 준비합니다. 마침내 가족의 구성원을 죽인 사람의 집에 밤에 가서 집 전체에 불을 지릅니다. 불구덩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오는 사람들을 다시 화살촉에 독을 묻혀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그 독에 의해 죽게 만듭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완전히 죽여 버리려 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딱 한 사람이 살아남아서 이 사실을 자기 씨족에게 증언합니다. 그러면 씨족 전체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에 불러 화살로 쏘아 죽인 집에 속한 부족 전체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여 어린이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씨를 말려 죽여 버립니다. 이를 복수의 혈전이라고 부릅니다만 이런 싸움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한 중국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전쟁을 하여 원수를 갚는 가운데 이미 죽어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체를 다시 꺼내어 토막을 내어 살인합니다. 부관참시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때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더 힘있는 자가 덜 힘있는 자를 칼로 복종시켜 노예로 삼고 더 힘 있는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덜 힘있는 나라를 쳐 죽이고 나서 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다스리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힘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덜 힘있는 나라인 유대나라를 힘으로 복종시켰습니다. 유대의 젊은이들이 독립을 해보고자 일어났을 때 로마제국은 막대한 군사력으로 다 짓밟아 죽여 버리고 살아 생포한 자들은 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전혀 없었습니다. 힘이 정의요 힘이 제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살만한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힘있는 자가 덜 힘있는 자를 먹어치우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강익강 약익약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의 형상은 있으나 인간이 없다면 거기는 인간에게는 흑암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시대에 식민지인 유대나라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700 년 전에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16 절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함이 무엇일까요? 오늘 분문에 나오는 흑암이란 서로가 죽이고 죽고 서로 복수하고 더 크게 복수하여 피를 흘리던 당시 세계의 현실을 말한다면 빛이란 그 반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빛이라 하였을 때 예수님은 더 이상 죽고 죽이는 악순환을 자르신 것을 말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뛰어난 신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지은 책 <역사적 예수의 탐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눈덩이가 산밑으로 굴러 오더니 점점 커져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그 눈덩이를 정면으로 받아 피투성이가 되더니 비로소 눈덩이의 굴러감이 멈췄다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눈덩이와 같이 굴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바로 죽음과 보복의 악순환이라는 인류의 역사를 말하고 한 젊은이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역사적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인류 역사 속에 굴러 갔던 폭력의 악순환, 죽음과 죽임의 악순환을 자신의 생명과 피로 정지시켰음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먹으로 복수를 하면 당하는 사람이 칼로 복수를 하고 칼로 복수를 당한 사람이 독화살과 불화살로 복수하는 더 크게 복수하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옛 시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단절하고 하늘나라의 윤리를 제창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 장 38 절에서 44 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의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철저히 복수를 금하셨을 뿐 아니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으라 하셨습니다. 원수에게 피의 복수를 하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만 있으면 하늘의 열두 영이나 되는 천군을 땅으로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유대인들 율법학자와 서기관들, 제사장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단을 한꺼번에 쓸어버리실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잘못을 알지 못하나이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오히려 맞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십자가상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사랑을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구시대의 율법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보복법의 패러다임을 깬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폭력은 더욱 큰 폭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보복의 패러다임을 깬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이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만일 악을 더 큰 악으로 복수한다함이 흑암을 만드는 일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아주는 일은 흑암을 깨는 그야말로 불빛을 밝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이에게 더욱 큰 상처를 준다면 이것이야 말로 어둠입니다만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이를 생각할 때 자신이 아팠던 상처를 생각하며 그 상처를 다른 이에게 되돌려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근원으로 하여 상대방의 상처를 감싸주는 일이야 말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상처와 십자가의 피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 상처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여 주었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복수의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그 피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사야가 한 예언은 옳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 속에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빛을 보았습니다. 헨리 나우엔이라는 분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입은 치유자“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상처받은 생애였습니다. 같은 동족들에게 상처를 받앗습니다. 로마제국의 군병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상처를 받으시고 원망하지 않으시고 그 상처를 근원으로 해서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더 크게 주고 하는 어둠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재료로 삼았습니다. 바로 여기서 빛이 빛납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는데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빛이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경험하게 합니다만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상대방의 상처를 감싸주고 치유하는데 쓴다면 그 사람이 존재하는 자리에서는 호올로 빛이 비추어집니다. 예수님은 죄와 악이 악순환을 이루는 흑암 가운데 악의 악순환을 십자가로 끊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함이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빛이 되었듯이 우리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꼭 우리의 빛이 태양만 하게 빛나거나 꼭 횃불 만하게 빛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반딧불이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조그마한 빛으로도 이 어둔 세상에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셨듯이 여러분이 당한 상처가 남을 상처입게 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좋은 재료로 삼아 남의 상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상처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상처를 싸매주고 남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쓴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때 우리는 성탄하신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밝히는 빛을 비추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오늘 성탄절 주님 오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주님은 흑암 가운데 빛으로 오셨습니다. 보복과 죽음과 폭력의 악순환을 죽음으로 십자가로 저지시키고 평화를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오심의 뜻을 이루어 가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로 예수님과 같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상처를 근원으로 하여 이웃의 아픔을 감싸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그마한 빛이라도 밝히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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