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년 1 월 25 일 (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빌립보서 2 장 12 절 - 14 절
제 목 :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강이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함께 신학을 했던 분 중에 여목사님이 되신 분이 계신데 그 분 아들과 딸의 이름이 하나는 아들 이름은 “이루리”이고 딸 이름은 “이루다!”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걱정을 털어놓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기가 센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름을 “이루리”, “이루다!”로 지었으니 뭔가 이루려고 지금 예행연습하고 있는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약간 염려가 될 것입니다. 아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인데 구원을 이루다!라는 말이 말이 되느냐? 그런데 이 말씀이 제가 정한 제목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이 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속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특별히 2 장 12 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한 부분 한 부분씩 살펴보겠습니다. 12 절 첫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유럽지역에는 최초로 개척한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얼마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 장 8 절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 사랑이 심장 한 가운데서 사랑이 되어 흘러나온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사랑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무척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제 12 절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나 없을 때에도 더욱“. 사도 바울은 당부합니다. 한때 사도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한 때 두 번씩이나 같이 있었지만 이제는 로마 감옥과 빌립보 두 지역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떨어지게 되었지만 사도 바울은 간절한 심정으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탁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12 절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신 부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편으로 의문이 들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총의 선물인데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셨을까? 이 시간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심이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로서 부활과 하늘나라 안에서 영생, 영원한 삶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저 한 오백년 더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무궁토록 존재의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삶입니다. 고통스럽고 어둡고 미래가 없는 가운데 그렇게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삶이 종지부가 찍어지면 그 시점에 끝나서 한 오백년 지나면 뼈도 없어져서 흙으로 분해가 되고 그리고 색즉시공으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은총으로 입혀주시는 새 영적 몸을 입고 다시는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는 나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언제나 놀고먹는 따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셨는데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일이 있어 사명을 가지고 보람차게 기쁨으로 일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값어치가 얼마나 될까요? 바로 이 구원과 함께 얻어지는 영생의 값어치가 얼마일까요? 라면 한 개에 6-700 원합니다. 파 한 단이 얼마입니까? 1000 원입니다. 읽을만한 책 한 권에는 10,000 원 정도합니다. 괜찮은 골프회원권이 수천만원대에 홋가합니다. 명문대학에 돈을 내놓고 들어가는 기여입학하려면 수억대의 돈을 내놓아야 합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소재 타워 팰리스 아파트에 입주해서 살려면 74 평형이 약 15 억 정도 갑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는 구원의 값어치를 따진다면 얼마정도 할까요? 만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정책을 바꾸셔서 이전까진ㄴ 믿음으로 가게 하신 천국을 세상의 돈을 가져와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선포한다면 하늘나라의 입장료가 수백억이라도 싸들고 들어가려는 이로 줄을 설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장권을 사기 위해서 천하를 다 판다고 해도 그것이 아까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천하와도 바꾸지 않는다 하셨는데 생명을 넘어선 영생의 가치는 천하를 한 30 개 준다고 해도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원과 영생의 값어치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는 거 같지 않습니다. “아! 구원 누구나 받지! 예수 믿고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하면서 마치 구원을 자기 밥상에 차려진 자기 밥 옆에 따로 차려져 있는 국 정도로 생각하여 당연히 내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구원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제 59 회 로또 복권에다가 여러분이 6, 29, 36, 39, 41, 45 번호를 적어 세금을 떼고 41 억 2158 만 7300 원을 수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만일 구원과 로또복권 당첨 둘 중에 하나를 택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구원은 귀중하더라도 나는 로또복권을 택하겠다! 손 한번 들어 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구원을 택하겠다! 하신 분은 손들어 주십시오! 에이 도저히 결정을 할 수 없다고 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로또 당첨!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가슴과 심장은 터질 듯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되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선언을 들을 때 가슴이 터질 듯 설레입디까? 민태원이란 수필가가 이렇게 썼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구원! 이는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날 구원해 주심을 생각하면 너무도 좋아서 심장이 물방아같이 고동을 칠까?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이라고 해도 별로 감동을 하거나 감격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최고도의 가치평가를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왜구원을 하향적으로 가치평가할까요? 그들은 사실상 구원을 믿지 않거나 너무 먼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영생보다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려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더 바랍니다. 구원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고 현재 내가 맛볼 수 있는 복의 열매를 따 담기를 원합니다. 나와 내 가정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 내와 내 자식이 승진하는 것, 사업을 하면 돈다발이 넘치게 들어오는 것, 자식이 학교에서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시험에 붙는 것, 집안이 화목한 것, 로또 복권이 당첨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훨씬 더 구원보다 더 값어치있게 여겨집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소중하고 소중합니다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에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 대략 19 만 팔천개와 구원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만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만 하향적으로 가치평가하지만 그러나 구원은 이 세상 그 무엇을 다 합한다고 해도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지만 구원을 받는 일에 대해서도 너무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구원받는 것!! 예수 믿으면 되지 뭐!“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 하면서 구원은 예수 믿으면 된다! 나는 예수 믿으니까 구원받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구원의 문제는 잊고 삽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구원을 얻는다함인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렇듯 간단한 것입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내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사람들에게 난 교회에 다니네! 하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함은 단지 머리 속의 차원이나 입술의 차원이 아닙니다. 가슴과 행동의 차원이요 삶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함은 예수님을 따른다함입니다. 믿는다함은 순종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사도 바울이 무어라 하였습니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구원이란 믿음으로 얻는데 믿음은 순종이라 그 말입니다. 믿음이 그저 믿음이란 껍데기 믿음, 거짓 믿음이 있는데 이 믿음은 순종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이고, 믿음이 믿음인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라 그 말입니다. 성경에서 믿음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저 머리로 아는 믿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로 끝나는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자식을 바치라 하였을 때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 하였을 때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습니다. 내 놓아라 하였을 때 주실 때는 언제고 왜 또 빼앗으시냐 하고 한마디 항변을 하지 아니하고 그저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였습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 장 21 절을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저 주여! 주여!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함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 땅에 개신교 900 만 카톨릭 300 만 해서 1200 만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서 1200 만명이 구원을 다 받는다함이 아니라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까? 마태복음 7 장 22 절에 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절입니다. ”그때에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여 주여 부르는 자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입은 자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하셨는데 이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달리 말하면 무슨 40 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요, 무슨 기도하여 기적을 행하였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열심히 행하였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구원은 인간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들어간다 그 말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는다함은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들어가게 된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의 신앙이 천하를 진동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면 구원은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며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거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송두리째 부인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박국이나 로마서이건 간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는 사람이 받는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원이 무엇일까? 성경은 의롭다 인정을 받을 때 구원받는다 하였습니다.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 함이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보시고 “너는 됐어!” “음! 너는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래적으로 알고 있기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생각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7 장 22 절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금 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께 찾아온 많은 사람은 자신은 구원받을 것으로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은 자신이 행한 많은 일로 인하여 분명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만 미안하게도 예수님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을 보시고 계실 것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인생을 통찰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도 들으시고 우리가 하는 행위도 아시고 우리가 하는 생각도 아시고 우리 인생 전반을 한 눈에 통찰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샅샅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수성도 아실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자신을 위한 자신의 종교적인 열정인지 아니면 주님을 향한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인지 아실 것입니다. 구원은 한 마디로 뭐냐?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보시고 한마디로 “음 됐어!!”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인생을 조목조목 보시지 않겠습니까? - 그 인생을 보시면서 - 음! 고개를 끄덕이시는 인생이 구원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살 텐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교회생활을 수십년 했다 하더라도 그가 성경을 백독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엄청나게 많이 했더라도 금식을 수도 없이 하고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보시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에 들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한마디로 구원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 그 말입니다. 믿음이 있다해도 그 믿음의 진실성을 보시는 이는 하나님께 있다 그 말씀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황인갑이라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보다도 1 년 밑이었지만 저는 그 후배를 존경했습니다. 그 후배는 기도생활도 열심이고 유신정권 때는 데모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 보면 참으로 순수했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신학교 생활관에 머무를 때 방에 침대가 있었는데 원래는 선배가 아래층을 쓰고 후배가 이층을 쓰게 되어 있는데 제가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후배에게 아래층을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후배이지만 말을 높였습니다. 그의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겸손함과 거룩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지난 번 완도에 갔을 때 배를 타고 가면서 목회와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거의 25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때 느꼈던 그 분의 영적인 훈훈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같은 목사이지만 황 목사님 같은 분은 누구도 존경할 것 같았습니다. 배 위에서 목사님은 무슨 얘기를 하면서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왔다 하였습니다. 속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성지순례를 같이 한다 하였을 때 친구 목사와 가고 싶다면 황 목사님과 같이 가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비록 짧은 목회를 하고 있지만 어느 성도를 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그 분을 볼 때마다 든든해지고 뿌듯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하나님도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늘나라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하늘나라의 공간을 축소시켜 봅시다. 옛날에는 하늘나라를 천국이 아니라 천당이라 하였습니다. 하늘나라가 아닌 하늘의 집이었습니다. 하늘의 집이 무척 넓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가정이나 두 가정이 함께 살 수 있는 가정집 정도로 축소시켜 놓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주인이 누구와 함께 살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주인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늘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데리고 와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언제나 자기 믿음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믿음은 깔아뭉개고 믿음은 자기뿐이 없는 것처럼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얘기를 언제나 하고 언제나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자기를 들어내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이 얘기를 하면 겸손하게 듣고 무슨 부탁을 하면 최선을 다하여 하고 자기 일보다도 하늘의 주인의 일을 먼저 하려고 하고 항상 미소를 짓고 모든 것을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매사에 아멘으로 순종하고 그런 사람과 천당의 주인이 함께 있고 싶어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이름이 김막동이라면 하늘의 주인이 오! 김막동 집사는 언제든지 웰컴이야! 하면 그야말로 그것이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선호도가 있으십니다.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구원은 물론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냐 아니면 다만 종교적인 열심이냐가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기준에서 보아 열심인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보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구원은 믿음으로 가능한데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인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흐뭇해하는 믿음인지 아니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믿음인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제일 처음 은을 광산에서 채굴하였을 때 그 은은 여러 잡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불로 단련하는 가운데 은 속에 있는 잡것들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은은 순은이 되는 것입니다. 금도 그렇습니다. 금을 채굴하였을 때 금은 여러 불순물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제련을 하는 가운데 정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는 의가 되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는 사람 앞에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이 되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는 믿음이 되도록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이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그런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이 저희의 의를 나타내지 않게 해주옵시고 주님 저희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케 해 주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며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어 하늘나라 영생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오늘 주의 전에 나와 성경말씀 그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려 다시금 결단하는 가나안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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