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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관리자 2010-12-20 (월) 10:49 15년전 1805  

2004 년 4 월 18 일(주일) 오전 4 시 반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008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요한복음 21 장 15 절 - 17 절

제 목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렐루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숨바꼭질 해보신 적 있습니까? 아빠와 어린 아이가 숨바꼭질을 한다고 해 봅시다. 애 아빠가 맘먹고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버린다면 아이는 결코 아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가 아이가 아빠를 찾아내면 “아이쿠 우리 딸이 아빨 찾아넸네!” 하면서 아이를 꼬옥 안아주면서 좋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이 숨바꼭질을 한다고 해 봅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꼭꼭 숨어버린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이 도무지 다다를 수 없도록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자신을 감추이신다면 하나님을 찾아낼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며 누가 나를 보냈냐고 물으면 내가 무어라 하리이까 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는 나다!”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천국에 하나님을 홍보하는 홍보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감추고 자신을 숨기기보다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자신을 알려주시어 자신을 홍보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격까지도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출애급기 20 장 5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보다 명백하게 소개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신데 자신이 질투가 있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감추지 않으십니다. 출애급기 34 장 14 절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질투의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계십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하나님임이니라”.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절대 중용지도를 걸으며 어떠한 상황이 와도 요동치 않으실 분 같은데 그저 젊은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질투를 하시는 분이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이 좀 우습지 않습니까?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질투 같은 것을 하실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질투를 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 같은 것을 하지 않으시고 창조한 피조물들을 그저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팔짱을 끼고 냉철하게 지켜만 보셨다면 아마도 질투 같은 것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라만상 피조물을 만드시고 특별히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순간, 즉 하나님이 사랑에 빠지시고 말았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사랑에 빠지시기 시작하셨을까요? 창세기 1 장 31 절에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제가 서울 송암교회에서 신학생으로 봉사하였을 때 준목님으로 계신 강석찬 목사님이 어느 날 자기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경험을 말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석찬 준목이 전도사였을 때 청년회를 담당하였는데 어느 날 말씀 도중에 자신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경험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서울 성남교회에서 어린이교회학교 설교를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순간 어린이들 틈에 앉아 있는 한 교사를 보게 되었는데 보기에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아니, 보는 순간 어떤 운명적인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설교를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바로 그 선생님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고백하였는데 바로 그 분이 현재의 초동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셨습니다. 보는 순간 1 초도 안되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셨습니다.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 놓고 그를 보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혹시 여러분도 어찌할 수 없이 빠져버린 그런 사랑의 추억 한 두개쯤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사랑함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점점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는 그 사람을 살립니다. 자신이란 존재는 점점 잊어버리거나 생각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있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치입니다. 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제로이기 때문에 오직 사랑하는 그만이 내게 있기 때문에 제로 플러스 하나이기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빠지시자 어떻게 하시기 시작합니까? 첫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성경 창세기 1 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난 직후에 무엇을 하십니까?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어떤 의무나 규칙을 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1 장 28 절에 보면 인간을 만든 직후부터 복부터 주시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빠지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실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최선의 것을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안겨 주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점점 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져갈 때 인간이 그에 응대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뜨거워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해지자 하나님의 가슴에는 아픔이 생기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눈물의 예언자라 합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침상을 적셨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눈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께서 흘린 눈물이 아닙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인 자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외면하고 점점 떠나게 되었습니다. MY WAY를 부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애지중지하면서 사랑했는데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점점 자기 곁에서 떠나게 되자 때로는 눈물을 지으시고 하고 때로는 분노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질투의 불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보통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의 불꽃이 일어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을 다 주는데도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의 품에 안겨버리거나 다른 이를 사랑하면 견딜 수 없이 힘들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 끝까지 분노가 치솟기도 하고 병에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그 형상으로부터 사랑을 얻지 못해 병이 나셨습니다. 얼마큼 사랑하실까? 성경 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연인의 사랑에 비유한 것입니다. 아가서 5 장 8 절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우리나라 탤런트 중에 “질투”의 캐릭터를 가장 잘 소화하는 배우가 바로 고두심입니다. 한 때 “잘났어 정말“이란 말을 유행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고두심이란 배우는 극중에서 자신의 남편이 자기만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마치 정신병이 발작하는 것 같은 불타는 질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그런 캐릭터를 가진 고두심이라는 탤런트를 사랑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질투로 말하자면 결코 고두심 못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질투도 하시고 화도 내시고 때로는 변덕도 자주 부리시고 하나님이 울기도 하시고 ”내가 병이 났다!“고 하실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고 지나가면 어떤 분명한 것, 하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시기하실만큼 당신의 형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보다 인정에 목말라 하고 정 때문에 굶주리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워하시고 그 그리움으로 그 마음의 바다는 언제나 출렁이고 계십니다. 우리 영혼을 시기할 만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온 피조물이, 온 우주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딱 한가지 우리 하나님께도 부족한 것이 있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결핍된 것이 하나 있으십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받는 사랑에는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몰이 갈한 것같이 언제나 목이 말라 하시고 배고파 하십니다. 하나님도 외로움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처럼 사랑받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만 하시고 사랑받는 일에는 초연하신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너무도 사랑받기를 갈구하고 갈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하고 놓쳐서는 안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마침내 인간이 되십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빠지자 하나님은 어떻게 되십니까? 세 번째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십니다. 중세에 안셈이란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안셈이 쓴 책 “Cur Deus Homo?"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하는 책은 아직도 신학의 고전 중에 하나입니다. 안셈은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속죄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만 속죄하려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 속죄가 본질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오신 것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죄를 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사랑하는 이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구약에 나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가 많으신 분이시지만 신약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질투가 없으신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참으로 질투 덩어리이십니다. 어디를 볼까요? 마태복음 10 장 37 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도 허벌나게 질투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들과 딸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무척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짧은 삶의 경험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저에게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무척 좋아한 것들은 저에게서 없어지게 되거나 빼앗기는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했었을 분은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은 난지 20 일만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과일은 복숭아였습니다만 한번에 다섯 개도 마다하지 않고 먹었습니다만 중학교 때 그것을 먹게 되면 알레르기가 생겨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말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때 우표를 수집하여 거의 600 장을 모았습니다. 차비를 아끼고 용돈을 아껴 샀는데 어느 날 제가 두어 둔 곳에서 발이 달렸는지 안개와 같이 사라졌습니다. 눈물이 주루루 흘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은 만화가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외삼촌이 감탄하여 동네방네 그 그림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 조카가 그린 것이라고 자랑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만화가의 길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애착을 둘만한 것들이 있으면 다 내 곁을 떠나버립니다. 뭔가 저에게 소중하게 아끼려 하고 집착을 하여 거기에 마음을 두면 그것들은 어김없이 이상하게도 제 곁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학교 때 너무도 좋아하게 되는 후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후배와 광주를 내려갈 때에도 4 시간 동안 포카를 하여 돈 따먹기를 하고 딴 돈을 다 돌려주고 그 돈에다 더 얹어주면서 무척 사랑하였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는 5.18 때 광주시민군으로 나가서 총맞아 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마음을 두고 사랑하게 되고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제 곁에 없게 됩니다. 그래 제가 가장 조심하는 것이 제 딸입니다. 딸을 낳고 나서 너무도 좋았습니다. 세상에 나에게 딸이 있다니! 감격했습니다만 저에게 반복되는 경험이 어떤 순간 저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습니다. 딸을 사랑하되 너무 사랑하는 마음을 지웠습니다. 여느 사람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달라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100 세에 얻은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보다도 이삭을 사랑하니까 질투의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하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질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그냥 "사랑하느냐?"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시점이 언제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도망 간 제자들에게 꾸중을 하시면서 내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너희는 도대체 무엇을 하였느냐? 나를 팔아넘기지 않았느냐? 나를 버려두고 도망가지 않았느냐? 말이 났으니 그렇지 3 년 동안 날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배운 내 제자라고 하는 것들이 도무지 그럴 수 있는거냐? 질책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도 제자들을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며칠 전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였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회고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자 못박힌 손을 보여주시기는 하였지만 결코 자신의 당하신 고통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는데 예수님이 낙원에 다녀온 신비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하신 말씀이라면 엄청나게 중요한 말씀일 텐데 그 말씀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한마디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베드로가 어부로서 그물질 하는 것보다도, 베드로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던진 질문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것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비단 베드로에게만 주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이방원이와 정몽주가 술한잔 하면서 나누었던 시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방원이는 정몽주를 체제 속으로 끌어당기려 그 뜻을 담은 마음을 시로 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서 천년만년 누리리라” 그러자 곧바로 정몽주가 답을 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얼마나 사무치는 사랑의 절정입니까? 여기서 정몽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삶과 죽음을 뛰어 넘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정몽주가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면 분명 예수님은 정몽주를 제자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몽주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주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사랑고백을 했을 것이고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자신이 대신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생떼를 썼을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오른편에 달려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 얼마나 아프십니까? 아버지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말씀드렸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셨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래도 정몽주식에 가까운 분도 있을 것이고 이방원식에 가까운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방원같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예배에 좀 빠진들 어떠하며 기도안하고 살면 좀 어떠하리 감사안하고 살면 어떠하며 헌신인들 안하면 어떠하리 하는 아리까리한 신앙생활도 있겠습니다만 이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 죽는다 해도 주님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줄 있으랴 단심가로 찬양하며 사는 그런 멋있는 신앙생활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의 주변을 돌아보시고 내가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좋아하고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것 다섯 가지를 한번 손으로 꼽아보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좋습니다. 그 좋아하는 것 중에서 먹는 것이 포함되어 짜장면 곱빼기도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것중에 내가 일하는 사업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돈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다섯 가지를 꼽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그 다섯 중에서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합시다. 무엇을 버리겠습니까? 이제 세 가지가 남았습니다.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택하고 이 시간 마음 속으로 둘을 과감하게 버리기를 바랍니다. 자! 여러분에게 이제 딱 한가지가 남았습니다. 그 딱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들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 이 시간 조용한 침묵 가운데 주님이 물으시는 이 질문에 조용히 대답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주님 저희의 한평생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는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설령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해도 저희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십자가만 걸머진다 해도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마음을 주장하시사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병이 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오늘도 우리 영혼을 질투할 만큼 사랑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 주의 전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고자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는 강진읍 교회 성도들 모두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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