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년 2 월 17 일(주일) 오후 1 시 30 분 / 목포연동교회 제직수련회
성경본문 : 창세기 16 장 1 절 - 11 절
제 목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족한 2 %
할렐루야! 오늘 제가 제직수련회를 인도하는데 저는 수련회의 좋은 강사는 아닙니다. 우선 인사를 하나 해 봅시다. 인사 말씀을 나누기 전에 우선 한 번 따라서 해 봅시다. “헤예 베레카!” 이게 히브리어인데요! “헤예”란 “너여!”, “당신이여!” 그런 뜻이고 “베레카”는 복이란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너 복의 사람아!” 그런 직접적인 뜻이 있고 “너 축복의 통로여!” 혹은 “너 축복의 물줄기여!” 그런 속뜻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늘로부터 상시적으로 복을 받아 아무리 맘껏 나누어 주어도 하늘이 다시 refill 해 주어 다시금 그윽이 고여서 또 나눠주게 되는 축복의 사람이다” 그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은 하늘의 복을 맘껏 나눠주시고 신나게 춤추며 노래하며 사는 이 시대의 ”헤예 베레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전후좌우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뜻에서 그저 눈빛을 교환하던지, 악수를 하든지, 하이 파이브를 하던지, 아니면 꼭 껴안아주든지 ”헤예 베레카“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헤예베레카
오늘 제가 목포연동교회 여러분들에게 제직훈련을 할 때 딱 한가지만 강조하려고 합니다. 이것들과 저것들을 얘기하겠지만 기살 제기 말씀드리려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 하나를 잘 캐취하여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면 제직수련회는 잘 된 것이라 믿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cbs에서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나와서 정확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런 요지의 강연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이 먼저 들어왔고 개신교는 한참 이후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개신교가 카톨릭을 훨씬 앞서 갔다! 왜일까? 개신교는 제일 처음 민중들에 의해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다. 개신교 초기는 무척 민족과 민중과 그 시대의 사회를 향하여 무언가를 주었다! 삼일운동 나라빚갚기운동 물산장려운동 독립운동 그런 운동을 전개하여 당시 시대에 봉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개신교는 점정 융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20 세기 후반 들어 개신교는 점점 쇠퇴해가는 데 비해 카톨릭은 융성해 간다! 왜 그럴까? 기독교는 100 주년을 맞이하고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100 주년 기념사업이다 100 주년 기념관이다 해서 건물부터 때려짓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카톨릭은 무엇을 시작했냐 하면 시각장애인 눈떠주기 운동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가는 일을 시작했다 지난 10 년동안에 카톨릭 교회는 점점 회중들이 늘어났지만 개신교는 실제로는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기독교가 그 사회에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요즘 카톨릭 교회는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에 대거 등록하여 새신자등록 양식을 찍어내는데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어디서부터 갔을까? 대부분은 개신교 신자들이 카톨릭으로 갔다고 합니다. 카톨릭교회신자는 약 100 만명이 더 늘어나는데 비해 개신교 신자들은 100 만명쯤 줄어든 것입니다. 왜 그런 수평이동이 일어났을까? 바로 이 물음을 가지고 오늘 성경본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창세기 한 말씀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이 창세기 16 장입니다만 그보다도 한 장 뒤에 나오는 창세기 17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갑자기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17 장 1 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가만히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엄하게 야단을 치시는 어조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감정의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 최근에 그런 드라마가 있잖아요 “엄마가 뿔났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뿔나신 것입니다. 뿔나서 아브라함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뿔이 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핀잔을 하신 것일까?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 하였을까요? 사실 모든 인간들 중에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생활을 잘 한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떠나라 하면 떠나지! 가라 하면 가지! 바치라 하면 아들까지도 바치지! 그저 시키면 순종밖에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야단을 치실 것까지는 없는데 창세기 17 장은 하나님께서 정색하면서 아브라함을 훈계하십니다.
창세기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나무라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주변 인간들과의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뿔나셨는가는 바로 그 직전에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보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 성경본문 창세기 16 장에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하여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지 10 년이 지났지만 아내 사라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약속해 주신 자식을 잉태한 기미는 없고 나이는 점점 90을 향해가자 사라는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였던 사람이 성 어거스틴입니다. 옛적에 그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을 위해 10 년을 기도하였습니다. 자식이 방탕한 생활, 잘못된 종교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10 년을 애타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나쁜 행실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자식을 위해 10 년씩 인내하면서 기도했는데 아들은 기도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가는 것을 보고 어느 날 모니카는 교구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찾아가 10 년간 자식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영영 버리시나 봅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나 봅니다.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이때 암부로시우스 감독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기도하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모니카는 꿇어 앉아 눈물로 기도하여 마루바닥이 패인 그 자리에서 다시금 3 년을 기도하여 결국 기도의 응답을 얻어내어 어거스틴이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어거스틴을 변화시켰고 성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우는 역사상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래는 10 년 동안 기다렸는데 모니카와 같이 기도하면서 기다렸는지 아니면 그저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사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지 10 년째가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쓰려 하고 있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에게 “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자신의 여종 애굽인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낳으라!” 하였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가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기 보다는 인간적인 허전함을 채우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사라의 제의가 나왔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대하였습니까? 만일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신실했다면 사라에게 정색하고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아니 당신 여보! 무슨 믿음 없는 그 따위 말을 하는 거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다 약속하시지 않았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10 년이 지났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니 실패하지 않으시고 실수하지 않으신 분이니 그 분이 꼭 이루실 것이요 당신 그런 믿음을 지녔기 때문에 아직 우리가 자식이 없는 것이요!” 먼저 야단치고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사족을 붙여서 “나는 당신 외에 다른 여자들은 흥미도 없고 거들떠보지도 않소!! 당신만을 사랑하오!!”했더라면 사라도 야단은 맞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남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말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창세기 16 장 2 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16 장 2 절 끄트머리는 이렇게 바꾸어야 제 맛이 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그 말이 나오자마자 그 즉시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하나님의 약속이고 나발이고 뭐가 없었습니다. 사라의 제의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 예! 아멘 할렐루야!”하고 받아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즉시 사래의 여종 하갈과 동침을 했고 하갈은 임신을 했습니다. 바로 이때가 아브라함이 연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6 장 16 절에 보면 나이가 나옵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였더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팔십 오세 때 하갈과 관계를 하였을 텐데 그때도 생산능력이 있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놀라운 근력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믿음의 조상에게 주신 특별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었을 것입니다. 목포연동교회 성도님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건강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자 교만해져서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무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래서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조금만 지위를 얻고 힘을 얻었다고 하면 금방 마음이 돌변해 지금까지 모시던 주인을 깔보고 “저 애기도 못 낳는 것”하면서 자신의 임신한 나온 배를 더 내밀고 다녔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그런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습니까? 왕비가 아이가 없는데 어쩌다 무수리가 왕의 아이를 임신하면 왕비를 평하여 “저 아이도 못낳는 것!” 하면서 우습게보고 깔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 아이도 비명에 죽음을 당하고 무수리는 숙빈까지 갔다가 궁밖으로 쫓겨나는 일이 역사 속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만일 하갈이 좀 더 지혜로웠고 또 자신의 태내의 아이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하였다면 오히려 더 사래에게 더 잘하면서 “주인마님! 주인마님! 하면서 더 따르고 더 순종적이 되고 예전보다도 더 사래를 잘 모셨었다면 사래는 아마도 분명 하갈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을 것이고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도 옆에서 산후조리도 해주었을 것이고 미역가닥도 끊어서 미역국으로 뜨근뜨근한 밥도 해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상당부분의 재산이 누구에게 갑니까? 자신의 아들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에게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역학관계를 모르고 하갈은 오히려 자기를 들어내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는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도 해가 되고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불행이 되는 일인데 그걸 모르고 ”나는야 주인의 아이를 밴 여자!“ 하고 콧대를 내세우고 깔 본 것입니다.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핍박을 받아 쫓겨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조금 기분을 좋게 하려고 깔 본 것이 나중에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아이의 미래를 가로 막게 하는 미련한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섣부른 이기주의는 자신을 망치지만 철저한 이기주의는 자신을 보호합니다. 철저한 이기주의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하여 철저히 남을 위해주는 것입니다.
하갈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태내의 자식을 위하려 하였다면 훨씬 사래에게 더 잘하였을 것입니다. 인생들은 미련하여 우선 자기 기분만 보고 우선 자기 유익만 피력하다가 결국 더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유익을 3 이나 4 를 취하려 하다가 1000 을 잃고 10000 을 잃은 어리석은 인생들이 참 많습니다.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어떻게 조치합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서 따지기 시작합니다.“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사래에게 이브의 속성이 나타납니다. 이브가 아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듯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인간의 책임전가 속에 죄의 근원성이 있습니다. 사래는 불교식으로 “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내 업보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래는 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적으로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최초로 따먹었을 때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듯이 사래는 실은 자신이 시작한 일인데도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전가하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일그러진 자화상은 없는지 한번 우리 자신을 살펴 볼 일입니다.
성경은 무척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사래는 독이 올라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당신 어떻게 처신했길 래 저 썅년이 날 그렇게 멸시하는거요?”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삿대질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당신의 여종을 다스릴 권한은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하자 그때부터 사라는 하갈을 본격적으로 학대하고 구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저 웬만하게 하갈을 학대를 하였다면 하갈이 태내에 아이도 있으니 좀 참았겠지만 오뉴월의 서릿발도 그런 찬바람이 없는지라 하두 모질게 학대하고 못살게 구니 하갈은 견딜 수 없어 가출해 버린 것입니다.
사라가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부부사이 아닙니까?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였습니다. 아니 그저 성도였다기 보다는 오늘날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장로쯤 되고 사라는 권사쯤 되었을 것입니다. 부부장로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해 하갈은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믿었다고 해도 주인이 시켜서 믿는 것이니 명목상 교인(Nominal Christian) 이었지 실제로는 깊이 믿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난 번 프랑스 개혁교회에 갔더니 안내하는 목사님이 카톨릭을 믿는 사람들은 전 인구의 85 %이지만 실제적으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그 10 %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명목상 교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믿는 장로권사 부부가 함께 사는 믿지 않은 비신자를 한 가정 안에서 억압하고 타박한 것입니다. 하갈을 견디지 못하게 학대한 것입니다. 이때 하갈이 무슨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사라를 볼 때 그저 여자로만 보았겠습니까? 저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구니 저것이 믿는 하나님도 억압자의 하나님이겠구나! 저것이 믿는 하나님도 뭐 그렇고 그런 별 볼 일 없는 神 중에 하나이겠구나! 그렇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믿는 시어머니가 안 믿는 며느리를 타박하자며느리는 복수할 생각으로 자신은 안나가던 일요예불에 나가고 아들과 딸은 여름불경학교에 보내고 남편 생일에는 묘법연화경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그것을 시비하자 “어머니는 천당에나 가세요! 저는 극락왕생할 터이니 왜 헌법상 주어진 종교의 자유의 권리를 침해하려 하세요” 따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악하게 굴거나 자신의 이익만 차릴 때 결국 그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게 됩니다. 내가 어느 신들도 믿을 수 있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은 죽어도 안 믿겠다! 너하고 만일 천국에 함께 간다면 네가 있는 그 천국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옥이 될테니까 네가 믿는 하나님 안 믿고 네가 가는 천국에는 죽어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교인이면서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서 전도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만 볼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만 볼 때 놓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눌린 자의 입장에서도 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 입장에서 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은 이방인인데 사래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랑으로 대접하여 주고 선대해 주면 자신의 주인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드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게 쉬었을 것입니다. 사래는 그렇다치고 장로님일 수 있는 아브라함이 이때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의 처사가 온당합니까? 자신이 아닌 사래 때문에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갈이 누구입니까? 태내 자신의 아이를 가진 그 아이의 어머니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사래가 쫓아낸다고 하였을 때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하면서 그저 수수방관만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하갈 사이에 서서 중재하면서 두 사람 관계를 회복시켰어야 옳습니다. 애초에 하갈을 들이기로 한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이 사라 몰래 연애를 하여 시작된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갈을 들여 아이를 갖자고 한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였으므로 하갈이 어려서 뭣도 모르고 조끔 교만을 부린다 하여도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충분히 용납해 줄 수 없는 사안은 아닌 것입니다. 귀엽게 보면 귀여울 수도 있습니다. 어린 것이 잘못을 하면 야단칠 것은 야단도 치고 더 이상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수습하고 조치했어야 했습니다. 설령 아내가 하갈을 쫓아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얼른 뒤쫓아 가서 하갈을 위로하고 다시 데리고 들어와서 사래와 화해를 시켜 주면서 살게 하든지 했어야 옳습니다. 설득을 했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면 후속조치를 취해야 옳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이니까 자식을 낳아 살 수 있도록 집 한 칸 마련할 돈과 어린이 양육비와 생활비를 주었어야 옳았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위자료라도 주어서 먹고 살 길을 마련해 주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떡하였습니까? 하갈을 찾아가지 않았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갈 안에 든 어린 생명에 대하여 알 바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밴 여자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집을 나가면 죽을텐데!! 하면서 티끌만큼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믿지 않은 이방인인 하갈을 그것도 아이를 밴 산모를 무정하게 내쫓아 버리고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라는 오뉴월에 서리가 끼는 독한 여자였고 아브라함은 유행가 가사 그대로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가느냐 아 얄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중세의 기독교는 그랬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카톨릭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화형시켜 죽이고 단두대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쳐서 죽이고 마녀라고 해서 죽이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사라의 독성 유전자가 중세기독교에 유전되고 오늘 21 세기 기독교에 유전된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6 장 11 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이 가출하였어도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형편과 고통을 들으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사자를 보내어 하갈을 데려다가 다시금 아브라함 가정에다가 데려다 놓지 않습니까? 찬송가에 그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성경의 멧세지를 찾는다면 여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도에서도 우리는 反面敎師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돌아왔을 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갈을 집으로 데려다 놓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다시 돌아온 하갈을 보고 자신이 차가웠던 가슴을 용서해달라고 회개하고 단 한마디라도 사과를 합니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라가 돌아온 하갈에게 “그때는 미안했었다 맘씨 좁은 날 용서해다오!” 한마디라도 합니까? 부부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라 부르고 사라를 열국의 어미라 부릅니다. 열국의 아비라 부른다면 열국의 백성들을 품에 안을 수 있어야 열국의 아비입니다. 열국의 어미 역시도 열국의 백성들을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한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어미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이 열국의 어미 사라가 열국의 어버이로서 지녀야할 그 너른 가슴이 없었습니다. 하갈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어긋맞아 포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너무도 매정하였고 그 가슴이 차가웠고 사라는 그 차가운 냉기가 훨씬 더했습니다.
그 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갈에게 다시금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21 장 8 절에서 13 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차가운 가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점점 자라서 젖을 떼던 날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으로서는 장남인데 장남이 태어났을 때와 젖을 뗐을 때는 소규모의 잔치상이라도 차려줬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안 차려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삭이 젖을 뗐을 때는 잔치상을 크게 차렸습니다. 바로 이때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놀립니다. 놀릴 만도 하지요! 내가 그럴 때는 미역국 한 그릇도 없었는데 동생한테는 소 잡는다 양 잡는다 하고 소란을 피우고 법석대니 맘이 상할 만하지요! 그래서 분한 맘에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는 발끈하여 아브라함에게 가서 말합니다. 21 장 10 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사라는 자기 집의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즉각 자기 아들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당한 것을 알리고 쫓아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놀리기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 어른인 사라가 개입하여 마침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완전히 텃세를 부린 것입니다. 애가 애를 놀리는 것이 그 스트레스의 비중으로 보았을 때 1 - 2 라면 가족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이 1000 이나 2000 일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을 때 사라가 하갈에게 주의를 주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도리를 하고 그쳤다면 그래서 지난 번 창세기 16 장을 교훈삼아 서로 화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오순도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만일 이 때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 가족으로 사랑하며 살았더라면 그동안 수십 세기를 거친 역사 속에 강물보다도 더 많이 흘린 피와 이스라엘과 아랍족속 사이에 테러와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지구상의 전쟁과 테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고 들어가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고 결국은 아브라함의 자식들 이삭과 이스마엘 족속간의 전쟁이요 테러 아닙니까? 학자들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합니다만 또한 외피상은 미국과 이라크 미국과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입니다만 실제로는 이는 아랍 자손들과 아브라함 자손들과의 전쟁이요 더 깊게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자녀인 이삭의 후손들과 역시 아브라함의 또 하나의 소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 간의 전쟁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의 배려로 인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사이좋게 살게 하였다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하나님이나 이슬람교의 하나님이 똑 같은 “엘” 하나님이 아닙니까? 알라나 “임마누엘”할 때 엘이 하나님인데 알라나 엘이 발음만 다르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하나님이 아닙니까?
사라가 설령 그렇게 쫓아내려 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따뜻한 마음으로 적당한 선에서 야단을 치고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버렸다면 이삭과 이스마엘은 좋은 형제로서 나중에 서로 하나의 민족을 이루며 오순도순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쎄쎄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슴은 무척 차가웠습니다. 이 냉냉한 가슴으로 인해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민족이 얼마나 서로 대결하고 서로 죽고 죽이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수천년 전의 싸움이 바로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9,11 테러를 일으킨 집단은 바로 이스마엘 후손이고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하여 전쟁을 한 이들은 이스라엘 후손들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큼 믿음도 짱짱하게 좋았고 순종하는 믿음이었고 예배도 끝내주게 잘 드렸고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성경에 그 삶이 기록될 만큼 하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2 %가 있었습니다. 가장 따뜻해야 할 때 그의 가슴은 무척 냉냉하였고 얼음장 같이 차가웠습니다. 가끔 성경을 볼 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 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바치긴 바치지만 바치기 전에 아브라함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거두시는 자도 여호와이시니“ 하며 “눈물을 흘리며 바쳤더라!”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는데 있습니다. 창세기 22 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물론 믿음이 좋아서 그러하였겠습니다만 그래도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할 때” 눈물이 앞을 가리웠더라!”가 있었으면 하는데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인간적인 떨림과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습니다. 부창부수라고 사라도 아브라함 이상으로 그 가슴에 인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얼마전 저는 마더라는 영화를 시청하였습니다. 문제작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봉준호 감독은 수준있는 감독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만 영상에 나오는 그 어머니의 캐릭터에는 유감이 많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자기 자식뿐입니다. 자기 자식이 살인을 했다는 것을 알아도 자기 자식을 야단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식의 범죄를 알고 있는 아저씨를 무참히 죽입니다. 다른 자식이 자식 대신에 누명을 쓰고 살인범으로 몰렸어도 자기 자식이 그랬다고 말 안합니다. 그리고 그 엄마는 사람을 죽여 놓고 들판에 가서 춤을 추고 버스 안에서 춤을 추면서 끝납니다. 그게 우리나라 전통의 자식새끼를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입니까? 어머니가 아니라 살벌한 여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힘이 있는 권세있는 하나님께만 잘하고 복종하였지 힘없는 이에게는 무자비하였습니다. 믿음도 좋았고 순종도 잘하였고 예배도 잘 드렸고 기도생활도 잘하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바로 그 가슴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감싸 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마음, 용서해주고 덮어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 2 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황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특별히 한국의 장로교와 장로교 신자들은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한국장로교도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는 두 번째 가면 서러워합니다.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 삼일밤예배, 구역예배, 돌예배, 칠순감사예배, 예배의 각종 명목을 붙이면서 예배를 잘 드립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기도생활을 잘하였습니다. 한국장로교도 그렇습니다. 새벽기도회, 사순절 특별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등등 기도를 잘합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순종을 잘하였습니다. 떠나라 하면 떠나고 가라하면 가고 바치라 하면 바쳤습니다. 한국장로교도 그렇습니다. 성수주일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봉헌생활도 잘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아브라함을 노래하고 칭송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럽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이요 본 받아야 할 사람이요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가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목포연동교회 제직분들은 특별히 사라와 아브라함의 가슴으로부터 배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로 배울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하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잘하였던 예배생활, 아브라함의 순종생활, 기도생활, 예배생활로부터 배워서 더욱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잘 드리고 믿음생활도 잘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하지 못하였던 가슴이 차가운 것으로부터도 배워야 합니다. 이를 反面敎師라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학대하면 나는 그 고통을 느끼면서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는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면교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서 배우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은 좋았지만 가슴은 뜨겁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분명 블랙홀이 있습니다. 뭔가 큰 구멍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불과 1 - 2 % 정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시대를 주도하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이 25 %가 되는데도 개독교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장로여서 더 욕을 얻어 먹고 있습니다. 오늘날 장로 대통령에 대해서 많은 염려를 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광주에 있는 한 순복음교회 목사는 성도 여러분 절대로 금번 선거에서는 장로를 대통령으로 뽑지 마십시오! 우리 역사상 장로가 대통령해서 한 번이라도 재미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승만 김영삼 그게 뭡니까? 그렇게 말한 inside story를 들어야 합니다. 만일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잘하고 소외된 사람을 잘 껴안고 사회적 약자들을 잘 돌보고 사회의 양극화를 없애고 북쪽에 있는 동포들까지 포용하면서 칠천만겨레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예수 믿어라 교회 다녀라 하지 않아도 이명박 장로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아 한국장로교나 한국 개신교 교인들의 숫자는 많이 허벌나게 늘어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단지 대통령만이 아니라 장로인 것을 다 아니까 장로가 정치를 할 때 참으로 예수님 정신으로 정치를 한다면 기독교선교도 분명한 전진을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도 가슴 차가운 정치를 하고 있어서 기독교선교에 절망이 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유가족들의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근로자들이 생존권의 투쟁을 하면 정부는 수수방관을 한 채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려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는 대란 사태가 오게 됩니다. 이 땅에 못사는 사람들은 이 땅의 경제적 약자들은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별로 이들을 중시하는 정책을 하지 않습니다. 고작 하고 있는 일들은 떡볶이 가게에서 떡볶기를 사먹으면서 나는 서민 대통령이다를 강조하려 합니다. 골목상권이 망해간다고 호소하는데 대통령은 왜 인터넷으로 고객을 모으지 않느냐 이상한 듯이 말합니다. 미디어법은 국회에서 강제로 통과시키는데 그 법이란 것이 재벌과 중요언론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를 하는데 예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천민자본주의 정신으로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있게 하고 없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니 앞으로 기독교선교는 이명박 대통령의 아브라함의 가슴과 같이 차가움으로 인해 기독교 선교는 퇴조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인사를 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예외없이 비리를 저지른 사람, 부동산투기를 한 사람, 거짓 전입신고를 한 사람, 세금을 탈세한 사람들인데 또 면면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다닌다는 소망교회 사람, 장로들이 많습니다. 국민들이 보고 아이고 저런 사람이 장로이니 기독교의 알멩이는 알만 하겠다 하여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고 기왕의 기독교인들도 카톨릭이나 다른 데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썰물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를 못하면 못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되고 기독교선교는 가로막혀지게 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정신과 예수님의 가슴으로 국민들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했었습니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이 본을 보이지 못하고 그 이전의 장로 대통령들, 한 사람은 부정선거로 쫓겨나고 또 한 사람은 imf를 초래한 대통령으로 장로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판에 이번 마저도 실패한다면 앞으로 기독교선교는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체와 장애를 받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지금 자체 내에 싸우고 있습니다. 순복음교단은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감리교단은 감독회장이 누가 할 것인가로 사회법정에서 지금껏 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단들 중에 지금 자체 내 헤게모니를 쟁탈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교단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저는 한 판사를 만났습니다. 그 판사는 교회에서 너무도 많은 소송을 해온 통에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사회법정에 까지 와서 싸우는데 그것을 가지고 대법원까지 가서 교회들의 싸움에 대한 판레집이 두껍게 마련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눈물 흘리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이 많은데 교회와 교단들은 지금 열심히 자신들의 이권과 헤게모니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도 아브라함이나 사라와 같이 그 가슴의 온도는 냉냉하고 그 수은주는 영하에서 영상으로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새 교우가 왔는데 적지 않은 수가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물질적이고 경제지상주의를 신봉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자본을 더 믿고 경제를 더 중시합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를 살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면서 향기를 풍겨내면서 빛을 비추이면서 살아간다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아지고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가 되고 전도가 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방인인 하갈에게 참으로 선대해 주고 잘 대접해 주었다면 하갈에게 냉정하지도 않고 이스마엘을 친자식과 같이 키웠다면 하갈은 그렇게 따뜻하게 해 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는 그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굳이 열심히 예배를 드려라 사라가 꼭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 말하지 않아도 삶을 통한 전도가 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판사판 사바세계에 살면서 비록 예수 믿어라! 우리 교회 나와라! 그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먼저 희생하고 먼저 손해보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자신을 저주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주고 산다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이 믿는 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신앙은 좋다고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득에는 더욱 아득바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슴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가슴과 같이 냉냉하고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나누는데 인색하면서 독을 품어내면서 산다면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나는 너같이 될까봐 예수 같은 거 믿지 않겠다! 니가 믿는 예수도 그렇게 독한 사람일까봐 나는 예수 같은 것 죽어도 믿지 않겠다! 하고 결국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먼저 오래 믿는 교우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아니면 카톨릭 교회로 가버립니다.
우리나라 인구통계청이 인구조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1995 년부터 2005 년까지 불교도 조금 늘었고 카톨릭교회는 무려 75.6 % 성장을 했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2.9 %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대체 왜 개신교가 고구마전도다 이슬비전도다 전도를 많이 하는데 교인수는 줄었을까 리서치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중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응답이 나왔습니다. 개신교에 갔더니 시댁분위기와 같았는데 카톨릭에 갔더니 친정분위기더라! 교인들이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징하고 더 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취를 맡는 것이 아닌 냄새를 맡아 역겨워서 얼른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만큼 손해보려 하지 않고 손톱만치도 희생하려 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도 천국에 들어가는 막고 서 있는 셈이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는 예수 믿고 싶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의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무섭게 이기주의적이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점점 하향길로 치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시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기독교가 세계 사람들에게 오히려 악마로 인식되고 기독교는 전쟁의 종교로 싸움의 종교로 인식되어가고 있음은 심히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들이 우리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들이 우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참으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진정 보아야 할 때입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서 어떻게 바라봅니까? 아담과 이브를 보면서 바보 같은 것 선악과 하나 참았으면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을텐데 하면서 바보 같은 것 하지 않습니까? 카인을 보면서 동생을 죽이다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분노하지 않습니까? 자살한 유다를 보면서 어째서 3 년동안 고락을 같이 한 선생님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살을 하다니 살아서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어야지! 하면서 손가락질 하면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면서 그런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과 그런 눈초리로 해서는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죄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손가락질하고 사라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담이 저희 자신이었고 이브가 저희의 분신이었습니다. 카인의 미움과 동생을 죽인 죄악성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아니 가룟 유다보다도 더한 잘못이 저희에게 있습니다 고백할 때만이 죄인에게 임하시는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실존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냉냉한 가슴을 통해서 우리 가슴을 진단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의 왜곡되고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성경 창세기 16 장을 거울삼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는 이 삶의 자리에 기독교 현상은 있되 예수 정신은 없어져 갑니다. 무화과는 무성하되 열매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기독교는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목포연동교회 제직들은 아브라함의 냉냉한 가슴이 아닌 예수님의 따뜻한 가슴을 지니도록 더욱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34 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슴의 온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느냐 하면 십자가를 매달아 못을 박아 피가 철철 떨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못 박던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위해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심장의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부족한 2 %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할 때도 그리스도의 온기가 넘치고 나의 발걸음 손짓 하나로만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목초연동교회 성도들의 가슴이 따뜻하면 여러분의 가슴이 온기로 가득 차 있으면 교회가 따뜻해지고 교회가 따뜻해지면 세상이 지금보다도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며 주님나라는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예배생활과 신앙생활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오늘 여기 모인 저희들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녔던 냉냉한 가슴을 지니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저희의 가슴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덥혀 주시사 저희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빛이 되고 그리스도의 따뜻한 열을 발산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저희로 따뜻함을 발산시켜 세상 사람들이 저희의 온기를 느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목포연동교회 제직들은 참으로 긍휼하신 자비의 하나님을 본받아 이 땅에 소외된 약자들을 감싸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일하는 제직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직들이 일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는듯하게 하옵시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는 것 같이 하옵시고 그리스도의 환한 빛을 보게 하셔서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6:2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