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년 2 월 17 일(주일) 오전 11시, 목포연동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이사야 53 장 4 절 - 6 절
제 목 : 고통과 인간, 네 유형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강이 목포연동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제직들과 당회 장로님들, 섬기시는 모든 교역자님들 그리고 오늘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임마누엘 성가대 위에와 순서를 맡으신 김현일 안수집사님, 임성률 집사님, 이은경 청년과 가슴으로 목회하시는 목사님과 사모님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기관목사로서 말씀을 은혜롭게 아주 영적으로 전하는 목사는 아닙니다. 아마도 김영봉 목사님께서 자신의 동기인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 한 번 불러서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저는 목포연동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김영봉 목사님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한 은혜는 여러분의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순절 첫째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고난당하심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박근원 교수님께서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말씀하시면서 들었던 비유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 넷이 주인 몰래 남의 밤나무 밭에서 밤을 따고 있었는데 한 아이는 나무에 올라가서 열심히 밤을 따고 있고 또 한 아이는 밤을 따는데 멀거니 지켜보고 있고 다른 아이는 떨어뜨려주는 밤을 열심히 까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아이는 밤이 떨어질 때 밤이 여기 있고 저기 있다고 가르쳐 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갑자기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이 때 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는 아이는 현장에서 체포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소양형 인간입니다. 주인이 나타났을 때 멀거니 지켜보고 서 있다가 잡혀 간 아이는 소음인입니다. 밤나무 밑에서 열심히 밤을 깠는데 주인이 나타났을 때 깐 밤도 챙기지 못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간 아이가 바로 태음형 인간입니다. 밤 까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막상 주인이 나타났을 때 깐 밤만 얼른 챙겨서 도망간 이가 태양형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이 시간 인간이 고통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네 유형으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나는 그 중 어디에 속할까를 헤아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유형 :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언젠가 고속버스를 탔는데 검은 정장에다가 검은 리본을 멘 두 사람이 맨 앞자리에 탔습니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그 인간, 내 형님뻘 되지만서두 아주 잘 가부렀써! 진작 가부러써야 되는디! 술로 다 말아 쳐 먹고 마누라와 새끼들한테 빚만 허벌나게 남겼제!!”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 형수님은 슬픈 표정 하나도 없데!!” 그러자 다시 말을 받습니다. “아 새끼들도 눈물 한빵울 안흘리잖어!” 뒷자리에서 대화를 들으면서 돌아가신 그 분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어떤 남자의 비석에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25 년을 살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요?” “이제 토마스의 세라” 토마스는 새 남편의 이름 같습니다.
우리 삶의 경험으로는 어찌 남에게 일방적으로 고통만 주는 인간이 어디 있으며 또 남에게 고통만 받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면서 남으로부터 고통도 받으면서 삽니다. 여기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의 유형이라 할 때 그 삶의 대체적인 경향성이 고통을 주는 인간 군상들을 말합니다. 개인 대 개인으로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개인이 집단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들을 많이 죽인 금메달감이 히틀러입니다만 여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울 사람이 바로 스탈린 동무입니다. 소련 인민 내무위원회 위원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을 383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는데 기록된 사형자 수만도 4500 만명이 넘었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중국의 측천무후나 블러드 메리라고 부른 영국 메리여왕이 제법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했지만 스탈린이나 히틀러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셈입니다. 어찌되었던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이런 형의 인간들을 “고통가격형”이라고 이름을 지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도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많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은돈 30 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고통가격형 인간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뭐 저 따위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희롱하는 이들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정치적으로 공모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창으로 옆구리를 푹 찌른 그 인간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주변으로 하여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꼭 고통가격형 인간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고통가격형의 문화와 가치관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주도적인 가치관은 “내 눈에 눈물이 나게 해! 그러면 네 눈에는 피눈물이다!”입니다. 911 테러에 대응하여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도 그런 류의 가치관 아래서 자행된 것입니다.
고통가격형 인간형은 꼭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산업혁명이후에 인간은 탐욕을 채우고자 자연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폭력과 강간, 즉 막개발과 난개발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침묵 속에 있었던 자연이 인간에게 가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대규모의 지진들과 쓰나미, 지구온난화로 인한 남극과 북극의 빙하의 녹아내림 등은 그 보복의 조그마한 실례들입니다. 혹 저와 여러분의 삶 중에는 고통가격형의 내면화된 가치관으로 남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내 삶의 편린들은 없습니까? 윤동주 시인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시귀가 있습니다. 내 안에 혹 남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그 고통가격형의 부끄러운 그 무엇이 있다면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유형 : 남이 고통당할 때 무심한 인간의 유형입니다. 남이 고통당할 때 나는 제 3 자로서 눈꼽만큼도 털끝만큼도 손톱만치도 아무런 고통을 당하거나 일말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척 점잖으신 인간들이 있습니다. 혹은 남이 피 흘리며 고통당할 때 “얼씨구나! 구경거리 생겼네!” 남의 고통을 강 건너 불 보듯이 보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 시인이 “계집과 도둑”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였네! / 계집은 독부요 사내는 도둑, / 사내가 도둑질 하고 있을 때 / 계집은 침대에 드러누워 웃고 있었지! / 사내가 잡혀서 끌려 갈 때에 / 계집은 창가에 서서 웃고 있었지! / 한번만 이내 찾아와 주오! 사내가 애원하였을 때 / 계집은 고개를 가로 젓고 웃고 있었지! / 사내가 새벽 여섯시에 목이 매달릴 때 / 계집은 붉은 술 마시면서 웃고 있었지” 뭡니까? “내가 니를 사랑하였을지라도 니가 현재 당하는 고통과 시방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바로 그것입니다. 고통무관형의 인간들이 요즈음 수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봐줄 수 있는데 남이 고통당할 때 그것을 나의 기회로 여기는 이들도 제법 많아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 학년 반장아이가 감기몸살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동전을 모아 과자를 사가지고 병문안가게 되었습니다. 부반장 아이에게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부반장 아이가 쏘아 부칩니다. “걔가 안 나오면 내가 반장될 텐데! 뭣 하러 내가 가니?” 이 아이에게 다른 애의 고통은 나에게 다시올 수 없는 기회인 셈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35 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는데.......”. 이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가 세워져서 양 손과 양 발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와 땅을 검붉게 적시고 있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의 꼭지점에 있었을 때 바로 먼 산의 진달래 구경하듯이 구경하는 족속들이 당시에 적지 않았습니다. 남의 고통을 보거나 즐기면서 하등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않은 인간들을 통칭하여 고통무관형의 인간이라 작명해 보겠습니다. 요즘 모텔에 가면 종이 같은 막대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카운터에서 “요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물어보았더니 “임신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아이 캔 테스트” 같은 것인데 막대에 오줌을 묻혀 보라색 선이 두개 나타나면 임신이요 보라색 선이 한 개 나타나면 임신이 아닌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한번 여러분이라는 존재 자신을 “I can test" 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보았을 때 얼른 나라는 존재의 막대를 그 고통의 상황에 묻혀 보고 내가 조금이라도 아파하는지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구경으로 느끼는지 별반 관심없어 하는지 테스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에 compassion을 가지고 나도 역시 쪼금은 아프다든지! 짠한 마음이 눈꼽만큼 생겨 눈물이 나올려고 한다든지! 한다면 여러분의 존재막대는 ”더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이요, 만일 상대방의 아픔을 보고 있을 때 너무도 아파서 눈물이 철철 흐르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쌓여 있을 때 나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인 것으로 표시됩니다. 만일 상대방의 고통을 보면서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한다든지, 내 마음이 정말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 없이 미동도 없다면 나는 ”덜 인간적인 더 짐승적인 인간“인 것입니다. 만일 상대방의 고통을 보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쾌감이 물컹물컹 솟아오른다면 여러분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psycho-therpy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유형 : 남이 고통당할 때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나누려 하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이 유형은 상대방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끼면서 그 고통을 나누려 하고 조금이라도 누그러 뜨려주려 하거나 나 역시 안타깝고 애끓는 마음이 되거나 짠한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인간형입니다. 이런 인간의 유형을 고통분담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 “우물”에 고통분담형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 누군가 목이 말라서 /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 슬프지 않은 것은 /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저 하늘의 별만큼 많고 고통무관형의 인간들은 저 바다의 고기수와 같이 많아지는 가운데 고통분담형의 인간은 먹구름 가운데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존재합니다. 오래 전 지율이라는 한 비구스님께서 오랫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금식으로 싸운 것이죠! 천성산에 살고 있는 도룡농들이 포크레인에 꽉 찍혀 죽을 것을 생각하니 그 어린 것들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과 몸의 통증으로 느껴져 이것 막아야 하겠다 하고 57 일간인가 목숨을 내던져가면서 금식을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피라미 한 마리 같은 도룡농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동일시하면서 compassion을 느낀 것은 부처의 대자대비 다정불심이면서 개독교라고 비판받는 오늘의 기독교가 참으로 벤치마킹해서 배워야 할 생명의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끔이라도 덜어드리려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 장 48 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중 한 사람이 누구인 줄 모릅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고통당하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를 부어서 막대기에 꽂아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면이란 바다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물을 많이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포도주는 당시 마취제와 같이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도 가슴 아파서 예수님의 저 아픔을 내가 조금이라도 줄여드릴 수 없을까?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 십자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긴 막가지를 준비하고 해면을 끝에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실로 묶어서 거기에다가 마취제인 신포도주를 철철 넘치게 부어서 십자가 밑으로 가서 막가지를 올리고 예수님 입에 가까이 대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물론 신포도주를 많이 마신다고 해도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많이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천분지 일이나마 만분지일이나마 줄여드리기 위하여 가슴 미어터지는 안타까운 맘으로 그 같이 한 것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로마군병의 눈에 잘못 비치면 잡혀서 채찍도 맞을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대어 그것이 신포도주임을 아시고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해 남김없이 고통을 당하시고자 마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그가 고통을 덜어드리려고 한 갸륵한 일을 가슴 속 깊이 뼈 속 깊이 담아 놓으셨을 것입니다.
넷째 유형 : 남이 당할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남이 고통을 당하려 할 때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고 대신 당하겠다고 나서는 인간입니다. 2001 년 일본 유학도중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스물여섯에 세상과 이별한 한국청년은 이수현 씨의 삶이 영화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죽여서 타인의 생명을 살린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고통전담형 인간이라 이름하겠습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눈을 씻고 보아도 거의 찾아 볼 수 없거나 다만 역사 속에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고통전담형의 모습을 봅니다. 이수현 씨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음을 당하였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성경 이사야 53 장 4 절에서 5 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독일 2 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죽은 본회퍼 목사님은 예수님의 삶을 단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Being for others! 타자를 위한 인간!!
이 자리에 계시는 목포연동교회 성도님들은 어떤 유형이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나는 대체적인 경향성으로 볼 때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고통가격형인지 고통무관형인지 고통전담형인지 고통분담형인지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네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만 그래프상으로는 20 세기와 21 세기 초반부에 고통가격형 인간들과 가치관들과 반생태문화들은 점점 꺾은선 그래프를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촌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제국주의나 시온니즘 혹은 이슬람이즘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은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가치관입니다. “내 눈에 눈물이면 네 눈에는 피눈물이다! 이 놈아!” 동해보복법을 넘어서 가중보복의 가치관은 오늘날 지구를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게하고 있고 인류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고통무관형 인간들도 무시못할 정도로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은 있기는 하지만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것과 같이 한찬 찾아야만 겨우 발견하거나 점점 적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가야 인류가 희망이 있고 그 역순이 되어야 세상이 살만한 가치 있는 터전이 되어 갈텐데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고통과 인간의 네 가지 유형과 상관하여 네 가지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결코 고통가격형의 인간이 안되도록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여러분 속에 있는 부정적으로 내면화된 가치관을 닦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당하였을 때 나에게 고통을 준 그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거나 아니면 내가 받은 고통을 따블로 아니면 따따블로 되돌려주는 보복형 인간형으로는 안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며느리 때 당한 고통을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 내가 며느리 때 당한 고통을 돌려준다든가 내가 쫄병 때 당한 고통을 내가 고참이 되어 내 쫄병이 된 이들에게 돌려준다던가 하는 삶은 보복적인 삶으로는 그런 삶에서는 결코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고통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남의 고통을 모두 다 전담하여 모든 십자가를 지는 고통전담형의 인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힘있는 사람이 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권력이나 금력을 가지게 될 때 그 가진 센 힘으로 남에게 눈물 흘리게 하거나 남에게 보복하거나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거나 그런 지도자가 되거나 파워엘리트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버물려진 세상 속에서 세상은 고통가격형의 인간을 우러러 볼지 모르고 그런 지도자를 바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동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그런 세상 속에서 그런 유형의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고통을 당했다면 내가 과거에 어떤 형태로든지 고통을 당했다면 내 고통의 경험을 붕대로 하여 상대방의 상처를 싸매어주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만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옥에 들어갔을 때 그 분이 담임을 했던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에서 잠시 봉사했습니다. 그 모임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도 그리고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참예하셨는데 당시 데모하다가 구속된 학생의 어머니가 그 모임에 나와 울면서 자식에 대하여 말하면 전태일의 어머니, 이한열의 어머니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꼭 그들을 안아줍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위로할 때 자식이 옥에 갇힌 이들의 어머니들이 한없는 위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통을 받고 고통을 주기도 하는 세상에서 내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지 아니하고 내가 고통을 받았을 때 그 고통의 무게를 상기하면서 상대방이 고통을 당할 때 내 고통으로서 그 고통을 싸매어주는 The wounded healer,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이 땅에 있는 고통의 총량이 어느 정도 무게인줄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이 땅의 고통의 총량 중에서 1mmg이라도 줄여지도록 애쓰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애쓰며 살지! 뭔가 애쓰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에릭 디킨슨의 시 한편을 묵상하겠습니다.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 I shall not live in vain; /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 Or cool one pain, / Or help one fainting robin / Unto his nest again, / I shall not live in vain.” 내가 만일 애 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거나, / 괴로움 하나 달래 줄 수 있다면, /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도와 /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뭔가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그것이 설령 작은 새의 미미한 고통일지라도 덜어주는 인생은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한 생명의 고통을 줄여주는 그것이 로빈새 한 마리를 둥지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가슴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먹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삶의 캣치 프레이즈 중의 하나가 1mm입니다. 1mm는 눈꼽의 두께보다도 더 적은 크기입니다. 손톱이 한 일이십일 정도 자라면 1mm 정도됩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말하기를 “그래 1mm 정도만큼이라도 나아지자!” 다짐합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이 지나갈수록 쪼끔이라도 나아지자! 그래 0.1 씨라도 좀 가슴의 온도가 좀 더 따뜻해져야지!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그게 잘 마음대로 안됩니다만 1mm가 아니면 0.5 mm라도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동시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신음하는 신음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그들의 아픈 가슴 속에 들어 가보려고 하고 그들의 아픔을 백분지 일이나마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 애잔한 마음, 짠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단지 인간만의 고통만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 때문에 찢겨지고 파헤쳐 지고 시멘트로 짓이겨져서 신음하는 땅과 자연과 그리고 4 대강과 천성산의 도룡농들과 기형으로 굽어진 물고기들이 “이제 제발 그만!” 아우성하는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도 듣는 귀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사랑으로 이웃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살 때 거기서 여러분은 사랑의 하나님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지만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원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의 고통을 나누려 할 때, 이웃의 고통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고 그 고통을 쬐끔이라도 줄여주려 할 때 우는 자와 함께 울 때 바로 그때는 사랑할 때이며 바로 그때 사랑의 하나님을 은총의 예수님을 만나 뵈옵게 됩니다. 이 시간 테제 음악 중 한 가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Ubi Caritas Desamore Ubi Caritas Deus ibi est”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은혜의 주님 거기 계시네”
이제 사순절입니다. 이 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피흘려 순교하신 최명길 목사님, 김창옥 장로님, 김계수 장로님의 피가 스며있는 교회입니다. 그 거룩한 전통을 이 교회 모든 성도들이 면면히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는데 연동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여러분 주변에 아파하는 이들, 눈물 흘리는 이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이들 헐벗은 이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의 아픔을 예수님 나누어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진실로 짠하게 여기면서 그들의 짐을 지는 은총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저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입니다. 저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세상 참으로 고통가격형의 인간들이 고통무관형의 인간들이 많은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연동교회 성도들은 조금이라도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며 저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며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가슴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옵소서! 저희로 주님의 십자가를 나눠지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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