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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과 함께 작성한 공동선언문의 덫에 빠진 에큐메니칼권이 비통하고 치욕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17일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회는 "사전 논의도 합의도 없었던 공동선언문은 효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논의 가치가 없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단, 반 에큐메니칼적 내용이 담긴 공동선언에 교회협 총무의 이름으로 서명된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한 마디로 어쩌다 국내 에큐메니칼이 이런 수치스러운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인지 개탄하며 곳곳에서 눈물로 회개했다.
공동선언문 문제에 대해서는 김근상 교회협 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교회협 총무 이름으로 발표된 문서로 인해 고통받거나 상처받은 분들에게 회장으로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며 총무에게 사과의 기회를 마련했다.
마이크 앞에 선 김영주 총무는 “잘 해보자는 마음이 앞서 절차와 과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생각과 용기가 부족해 그 경계선을 바로 설정하지 못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임을 통감하며 필요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실행위원들 앞에서 사과 인사를 전한 김 총무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이어 기장의 배태진 총무가 “김삼환 목사가 100일 만에 복귀할 때 부탁드린 것은 단 하나였다. 에큐메니칼의 절차를 지켜서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상임위원장이 전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진대회에서 공동선언문이 발표될 때까지 우리는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 선언 내용이 교회협의 정체성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사전 협의 없이 발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며 비통한 심정을 전했다.
배 총무는 또 선언문 중 가장 핵심적인 논란을 불러온 ‘개종전도 금지 반대’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교회협은 개신교가 조계종에서 땅밟기 기도회를 할 때 반대 성명을 낸 곳이다. 한기총 입장에서 개종전도는 가톨릭도, 정교회도 포함되는 것이다. WCC의 1/3을 차지하는 최대 교파가 정교회인데 이제 어떻게 총회에 참여할 수 있겠나. 이런 선언이 발표된 것에 대해 김삼환 목사와 김영주 총무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반문하며 “모든 것이 정상화 될 때까지 나는 WCC 준비위원회와 관련된 모든 위원직을 사임하고 NCC실행위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지난 13일 명성교회에서 발표된 공동선언문은 상임위원회 내부에서도 정확한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근상 주교는 “전진대회 전 상임위원회에서 김삼환 목사가 복음주의 쪽과 이야기가 잘 돼서 이제는 WCC가 용공이니 반대 기도회니 이런 것을 하지 않고 기쁨 중에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뿐이었다”고 설명했다. 후에 문서를 보고서야 WCC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문구를 발견한 것.
복음주의권의 반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WCC에 대한 무례이자 에큐메니칼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왜 한기총을 복음주의단체로 보고 합의를 한 것인지에 대한 의혹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교회협과 한기총은 13일 직전까지 만나 합의내용을 조율했다. 초안에는 동성연애반대와 개종전도 금지 반대는 빠져 있었다. 내용도 WCC를 자극하지 않는 원만한 문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한기총의 요구로 다시 내용이 추가됐고, 13일 합의 자리에는 한기총이 만든 전혀 새로운 문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전진대회가 끝난 후 김영주 총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며 김삼환, 길자연, 홍재철 목사 등 3대 1로 싸우는 꼴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로 상당한 압박 속에서 합의문에 서명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최종 합의문 작성 전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상임위원들의 반대도 있었다. 상임위원들은 “한국 교회 안에서 누가 보수고 진보냐,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보수다. WCC에 대해 비난하는데 알고 비난하는 것이냐. 왜 우리가 한기총이랑 합의문을 작성해야 하느냐”는 반발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합의문 내용을 모르는 상임위원들은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선언문을 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이미 선언문은 발표됐고, 선언문 발표와 동시에 한기총에서는 이를 빌미로 벌써부터 에큐메니칼을 압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4일 열린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 홍재철 목사는 “사실상 교회협이 우리에게 항복한 것이다. 이 선언문을 번역해 제네바 본부로 보내겠다. WCC에서 이 문서를 받으면 10월 총회에서 내가 이 선언문을 낭독할 것이다. 만일 WCC가 이 문서를 받지 않을 경우 한국에서 총회 못 열게 할 것”이라며 공동선언 합의 내용 하나하나가 압박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에큐메니칼로서는 WCC정체성을 부정한 문서를 고스란히 상납한 꼴이 됐다.
김근상 주교는 “한기총은 이미 추인했고, 우리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책임을 이제 우리에게 넘길 것이다. WCC와 WEA 모두 그림 좋게 하려고 했는데 에큐메니칼이 결국 신학적 차이를 드러냈다고 뒤집어씌울 상황이 됐다”고 우려했다.
갑론을박이 오고간 실행위원회에서는 정식 상정조차 되지 않은 문서를 두고 “받네, 안 받네”를 논의하는 것조차 치욕스럽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폐기나 보류라는 말도 쓰지 않기로 했다. 절차를 중요시하는 교회협에서는 통상 사전 논의되지 않은 문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번 공동선언문 역시 교회협 내부에서 단 한 차례 논의도 없었다는 점에서 아예 실체조차 없는 문서로 치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협 총무의 서명이 담긴 문서가 발표됐다는 점에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과정을 조사하고 책임을 묻기로 했다.
그러나 깊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 교회협의 논의구조를 거치지 않은 문서로 치부하기엔 이미 문서 내용을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점. 한국정교회 조성암 주교는 “신학적 오류가 상당한 문서다. 러시아 정교회뿐 아니라 WCC회원교회 모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빨리 대처해달라”고 주문했다. 이미 세계총대주교가 이 소식을 접하고 상당히 부끄럽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 조성암 주교는 “그냥 여기서 없는 문서로 거부하고 간다면 교회협은 교회협의 길로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실행위원은 “이 문제는 정교회를 선택할 것인지, 한기총을 선택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1시간 30분 동안 공동선언문 문제를 논의한 교회협 실행위는 대책위 구성과 함께 이 사태를 수습할 의장성명 발표에 동의하고 폐회됐다.
공동선언문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김영주 총무의 중대한 실책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왜곡된 한국 교회 에큐메니칼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WCC 총회 유치과정에서부터 교회협의 질서가 깨졌고, 물량주의적 방법이 동원됐다. 복음주의권을 영입한다는 이유로 WCC 총회 준비위원회는 3년간 교단 갈등이 심화됐고, 이 과정에서 예장 통합 몇몇 인사들이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준비위원장 김삼환 목사는 100일 넘게 거취를 밝히지 않은 채 혼란을 초래했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맡길 원했다”며 100일의 공백을 설명했지만, 이 시간 김삼환 목사는 한기총과 친분을 두텁게 했다.
지난 4일 예장 백석 실행위원회에 참석해 WCC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참여를 독려한 사무총장 조성기 목사는 “WCC 준비위가 진보적인 한 쪽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안타까워 상임위원장 김삼환 목사께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며 김삼환 목사의 공백에 교회협 등 에큐메니칼권의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임위원장과 에큐메니칼권 그룹의 온도 차이는 컸다. 그러나 누구도 그 과정에서 대화와 합의로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상임위원회의 폐쇄적인 구조도 문제였지만 WCC에 가입된 4개 회원교단들은 끝내 “힘들고 배고프더라도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켜나가자”는 패기도 드러내지 못했다. 에큐메니칼을 돈과 힘으로 인식한 결과는 이처럼 참담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망각한 에큐메니칼 정신을 되새기고, 초심으로 돌아가 더욱 막중한 책임감으로 WCC 총회를 마무리하자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힘을 얻고 있다.
감리교 신복현 목사는 “에큐메니칼 정체성에 위기가 닥친 순간이지만, 다시 보듬어 안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길 바란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