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년 6 월 13 일(목) 오전 6 시 한신교회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 신학과 설교> 한신교회와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이 주최하는 제7회 신학심포지움
성경본문 : 시편 37 편 4 절
제 목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강이 한신교회와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이 주최하는 제 7 회 신학심포지움에 참예하신 모든 분 사역자님들 위에 이 심포지움을 주최하는 한신교회와 강용규 목사님,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과 맥도널드 총장님 위에 기도해 주신 내동감리교회 천성환 목사님과 은혜의 찬양을 해 주신 엄동식 목사님 위에 흘러 넘치시를 축원합니다.
■ 언젠가 한신교회에 갔을 때 강용규 목사님이 원고도 보지 않고 은혜로운 말씀을 폭포수같이 쏟아내 놓으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목회자는 못됩니다. 그저 써 놓은 원고를 곱게 읽으려 하니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 바로 성경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편 37 편 4 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시편 37 편 4 절이기에 <시삼칠사>라 하여 일평생 붙잡고 살아야 할 말씀으로 삼았습니다만 이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도 이 아침에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널리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4 절에서 시작하는 “또”란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계속해서” “자꾸자꾸” “거듭하여” “반복하여” “중복하여” 그런 뜻인데 말씀을 행하고 또 행하라! 영어로는 repeatedly "계속적으로" 그런 뜻입니다.
■ “또” 다음에 “여호와”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출애급기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나란 관계적이고 대자적인 개념입니다. 여호와는 그러므로 <존재케 하는 자> 혹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자>이고 그 대칭에 있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하였을 때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는 <존재케 된 자>를 말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가 여호와 <나는 나다>의 대칭에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할 때 여호와는 기쁘게 해 드릴 대상이요 기뻐해야할 주체는 존재자로 인해 존재된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 “기뻐하라!” 기쁨은 사람의 감정들 중에 하나입니다. <희노애락애오욕> -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심(欲)입니다. 창세기 1 장에 하나님의 최초의 감정이 나타납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는 바로 “희(喜)” 기쁨의 감정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나다!” 라고 하시는 분이 “너”를 만든 것은 -그것이 자연이건 동식물이건 인간이건 간에 - 그것의 중요 목적이 “희”, “기쁨” 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만들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였으니 “희”의 감정을 극대화하려고 자신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 4 절 전반절인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근원적인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37 편 4 절은 시삼칠사는 신구약성경 총 31,089 절 가운데 단지 하나의 절이 아닙니다. 존재케 된 자들이 반드시 가장 초점을 맞추고 가장 유념해야 할 말씀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요리문답에 있는 것도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여호와를 기뻐하라!” 함은 몇 가지 중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여호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뭐든지 즐거워하라!! 여호와를 생각만 하는 것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찬송가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 자체도 기뻐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기뻐하고 여호와께 좋은 것을 바치는 것도 기뻐하고 누군가 여호와를 칭송하는 것으로도 기뻐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기뻐하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도 기뻐하며 여호와의 뜻을 따르는 일로 기뻐하며 여호와 말씀을 듣는 것도 기뻐하며 여호와를 묵상하는 것으로 기뻐하며 여호와의 길로 나아가면서 기뻐하며 여호와의 전에 나아감도 기뻐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무엇이든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베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꼭 은혜만을 받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비록 무화과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여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한다 하였습니다. 다윗의 삶은 여호와를 인하여 무엇이든지 기뻐하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묵상할 때 기뻐했고 여호와의 전을 위해 바칠 때도 기뻐했고 여호와 임재를 상징하는 궤가 돌아오자 춤추며 노래하며 기뻐하였습니다.
■ 시삼칠사의 후반절은 그렇습니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여호와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데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기뻐하면 여호와께서 너도 기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다” 하시는 분이 “네가 나를 기쁘게 해 주면 나도 너를 기쁘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해 주신 말씀과 정확하게 의미상의 평행을 이룹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 장 33 절입니다. 마육삼삼입니다. 시삼칠사와 마육삼삼은 전반절과 후반절의 구조와 내용이 정확하게 시편 37 편 4 절과 같습니다.
■ 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가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일까? 제 아이가 공부는 별로 잘하지는 못하였지만 잘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입니다. 아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어느 때였습니다. 언젠가 라면을 끓인 후에 “아빠 아빠, 라면 한 숟갈 하세요. 맛이 장난이 아니에요!!” 아이가 라면 끓여놓고, 저도 먼저 먹고 싶었을 텐데 그래도 아빠라고 먼저 드시라고 숟가락을 제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때 맛본 라면은 제가 먹어본 음식 중에서 최고의 그 무엇도 필적할 만 것이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맛이었습니다. 만일 아이가 라면을 끓여서 아빠인 저에게 한 젓가락 해보시라는 말도 없이 저 혼자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돼지 같은 자식, 혼자 잘도 쳐먹는 구나, 어른한테 드셔 보라는 말도 없이!!” 하면서 무척 섭섭했을 것입니다. 만일 아이가 한참 먹는 중간에 그제야 생각나서 “아빠, 먹어보니까 라면이 참 맛있는데요 이제라도 한 숟갈 하실래요?”하면 “새끼가 지가 먼저 먹다가 이제 와서 먹으라고 하는구나!! 그래도 애비 생각은 나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면서 “그래, 너나 많이 먹어라!!” 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면을 끓이자마자 아빠 방으로 달려와서 숟가락 한 개 아빠 손에 쥐어 주면서 아빠, 라면이 기가 막혀요! 하면서 아빠를 제1순위로 하면 아빠는 애비란 것을 느끼며 기분이 말도 못하게 좋은 것입니다. 라면 맛의 그 구수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아이는 게임기를 사달라고 했고 10 만원이 넘는 게임기를 사주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는데 그까짓 게임기가 뭐 대수이겠습니까? 당시 삼양라면 1개 값이 1,000원. 게임기가 100,000원 했었으니 정확히 100배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면 경제적 손익계산은 그 즉시 무력화됩니다. 아들이 아빠를 즐겁게 해 주면 100 배 1000 배 되는 것도 아들에게 기꺼이 주게 됩니다. 저는 거기서 아하 그렇구나! Ah! Expreience!가 하나 왔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심정도 나와 같으실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기뻐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만드신 존재자께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하셨기에 그저 순종하는 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기에 십일조를 드리듯이 그렇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판하셨습니다. 저들은 온 천하를 다 싸돌아다니면서 개종을 시킨다 그런데 자기들보다도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 하셨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했는데 죄인인 우리 인간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다 초점을 둡니다. 예를 들면 연못에 핀 연꽃이 “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주세요!” 한다면 연꽃은 아주 교묘한 것입니다. 강조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달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이지만 저는 이 말씀을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하고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욕을 많이 얻어 먹고 있습니다. 단순히 욕을 얻어 먹기 보다는 비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들은 기독교를 엄청나게 두둘겨 팹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릅니다. 개독교라 함은 개같은 종교, 독을 품어내는 종교란 뜻입니다. 목사를 먹사라 부르거나 교인들 피빨아먹고 산다면서 뱀파이어라고 부르고 집사를 잡사로 부르고 평신도를 병신도라 부르고 성경을 똥경이라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너무 한다 싶기도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욕하고 폄하하는 저들을 향해서 무시하거나 같이 욕하거나 변증하거나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 제가 신학교 시절에 예언자 씨리즈란 책을 샀는데 “칼 막스”가 예언자 씨리즈에 들어 있었습니다. 왜 저 유물론자가 그리고 무신론자가 특별히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앞장 섰던 그가 예언자 씨리즈에 있는 것일까?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씨리즈를 펴낸 책의 의도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칼 막스가 살았던 때는 참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양극화가 심각할 때 였습니다. 당시 참으로 민중들이 고통당하던 때인데 기독교와 교회는 그것을 외면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오히려 종교의 교의를 이용하여 피폐한 민중들의 고혈을 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높은 바벨탑 안에서 성직자의 후드색갈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신학적 논쟁이나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티기독교가 되셔서 칼 막스를 예언자로 삼으셔서 당시 현상의 기독교를 질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 몇 년 전에 제자교회 총회에 갔을 때 신학자 하비콕스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탄생해서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을 때까지는 기독교는 예수의 원래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기독교는 아주 망쳐버렸다!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도 박해받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로마제국을 먹어버린 것과 같았는데 실제로는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삼켜 버린 꼴이 되었다! 나중에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 로마제국과 같이 기독교에도 계급을 도입하여 부제 사제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의 제도를 만들었고 훗날에는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헤아릴 수 없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죽이고 그러지 않았느냐? 교리가 다르다고 화형에 처해 죽이고!! 이는 예수의 사랑과 정신은 간데없고 무력으로 모든 것은 제압하는 실질적인 제국주의가 되지 않았나? 이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양의 탈을 뒤집어 쓴 이리라 하였는데 역사적 기독교는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가 되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그의 통찰은 옳습니다.
■ 기독교가 130 년 전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성경의 초대교회와도 같았습니다. 순수했고 영적이었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목숨이 단 한 개뿐인 것을 아쉬어 하면서 기쁨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조선 땅의 기독교는 불일듯 일어났고 당시 민줄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엄청나게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안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다 해도 예수님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계셔야 할 예수님이 없고 대신 성공주의 제국주의 물질주의 바리새주의 세속주의 권력지상주의 독선주의 등 칠거지악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개독교라 비판하는 세력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고쳐주는 예언자라 생각하고 찌르는 가시와 같은 은혜로 감사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없거나 예수님성이 희박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는 모드로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 왜 한국기독교가 그렇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는 치열하게 뭔가를 하였는데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뻐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학교 다녔을 때 채플에서 강원용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의 위기는 한국교회가 주기도문을 바꿔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My Kingdom come, my will be done on earth"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부흥과 성장이 지상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큰 교회를 지향하고 큰 교회 영향력있는 교회를 향하여 있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일에는 거리가 먼 한국교회가 많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느 순간에도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추구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여서 힘써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전무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힘써 전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힘써 사랑했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삶 속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교회의 수평적 확대 즉 양적인 성장이 뒤따랐습니다.
■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부흥성장시키는 것이 제일 목표가 되어 수평적 확산을 위해 거꾸러 기도를 강조하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전도를 강조하는 기형적인 모습을 이루게 되었고 자연히 그렇게 하다보니 거대물량주의 축복주의 기복주의 등등으로 사로잡히다 보니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정신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예수를 강조하거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보조적인 재료로 쓰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강조점이 <큰 교회 부흥 성장 영향력이 있는 교회>이다 보니 그 안에서 예수님은 저기 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거나 제쳐져 있고 소외되어 희미하거나 없거나 그러니 그런 기독교는 예수 없는 표가 금방 나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와 같이 알아보고 개독교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한마디로 ”니들 속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부흥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꿩잡는 것이 매라고 긍정과 적극철학을 강조하고 세상이 하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원용하고 성도간에 교제를 강조하고 교역자의 말에 절대 순종하기를 강권하고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예배출석까지도 교회성장의 지표로 여깁니다. 예배를 얼마나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나온 교인출석수를 먼저 헤아립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성취를 기뻐하고 자기가 세워 놓은 목표를 기뻐하기 위하여 목적을 수단으로 삼고 가치를 거꾸러 뒤집어 놓는 이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하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 한국교회는 진실로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 값 주고 피로 사신 교회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때 교회가 진정한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성경에 바탕을 둔 바른 신학이 굳건히 서 있을 때 바로 그 신학에 서 있는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뜻이 이 땅을 흘러 적시게 할 때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갈 때 주님께서 보시고 심히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국교회가 향기를 내고 빛을 내고 짠 맛을 내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 이 땅의 교회를 개독교라 했던 것을 뉘우치고 교회를 향하여 박수를 치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으려 할 것입니다.
■ 금번 한신교회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이 마련한 신학 심포지움이 이 땅의 교회를 바른 말씀과 바른 신학으로 바로 세우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출발점 전환점 촉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기 계신 여호와를 진정으로 기뻐하는 여러분들을 누룩씨로 삼으시어 밀가루 서말과 같은 이 땅과 이 역사 속에 하늘나라로 부풀어 오르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가 또 여호와를 기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복음의 누룩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6:2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