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주일) 오전 11시 광성교회 (윤기원 담임목사)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창세기 16 장 1 절 - 11 절
제 목 : 믿음과 사랑이 함께 있는 성도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광성교회 성도님들과 오늘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할렐루야 성가대 위에 존경하고 동시에 사랑하는 윤기원 목사님과 사모님 당회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족한 사람을 이 강단에 거듭해서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윤기원 목사님은 형과 같이 동생을 아껴주시고 제가 여러 가지 일에 부딪혔을 때 영적인 멘토링을 해 주신 분이십니다. 목사님이 저를 위해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 주실 때에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만 성도 여러분들도 동일한 경험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윤기원 목사님은 우리 총회로서는 참으로 보배같으신 분입니다. 지금까지 국제협력선교위원회의 전신인 해외선교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교단 총회 서기로서 한국찬송가공회 위원장으로서 기장 60 주년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으로서 총회선교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귀한 사역을 해 주셔서 저도 그렇습니다만 총회에 무척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 찬송가 문제가 어지럽게 되었을 때 찬송가공회 위원장을 맡으시어 깨끗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교단을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보다 비중있게 섬기시고 중차대한 사역을 감당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광성교회 성도님들께서도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는데 cbs에서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나와서 대충 그런 요지의 강연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이 먼저 들어왔고 개신교는 한참 이후에 들어왔다! 나중에 들어온 개신교가 카톨릭을 훨씬 앞서 갔다! 왜일까? 개신교는 제일 처음 민중들에 의해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다. 개신교초기는 무척 민족과 민중과 그 시대의 사회를 향하여 무언가를 주었다! 삼일운동 나라빚갚기운동 물산장려운동 독립운동 그런 운동을 전개하여 시대에 봉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개신교는 점정 융성하게 되었다. 20 세기 후반과 21 세기 초반 들어 개신교는 점점 쇠퇴해가는 데 비해 카톨릭은 융성해 간다! 왜 그럴까? 기독교는 100주년을 맞이하고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100주년 기념사업이다 100주년 기념관이다 해서 건물부터 때려짓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카톨릭은 무엇을 시작했냐 하면 시각장애인 눈떠주기 운동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가는 일을 시작했다 지난 10 년동안에 카톨릭 교회는 점점 회중들이 늘어났지만 개신교는 실제로는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기독교가 그 사회에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같은 기독교로서 카톨릭교회는 점점 부흥과 성장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비해 개신교회는 점점 쇠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이 물음을 가지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이 창세기 16장입니다만 그 다음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핀잔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17장 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문맥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에게 엄하게 야단을 치시는 어조입니다.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 하였을까요? 사실 모든 인간들 중에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생활을 잘한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떠나라 하면 떠나지! 바치라 하면 아들까지도 바치지! 그저 시키면 순종밖에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야단치실 것까지 없는데 창세기 17장은 하나님께서 정색하면서 아브라함을 훈계하십니다.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주변 인간들과의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하여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지시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내 사라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기다려도 약속해 주신 자식을 잉태한 기미는 없고 나이는 점점 나이 90을 향해가자 사라는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자신의 여종 애굽인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낳으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가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라의 제의가 나왔을 때 어떻게 응대하였습니까? 만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신실했다면 사라에게 정색하고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무슨 믿음 없는 그 따위 말을 하는 거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다 약속하시지 않았오? 비록 10 년이 지났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니 꼭 이루어 주실 것이요! 먼저 야단치고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사족을 붙여서 “나는 당신 외에 다른 여자들은 흥미도 없고 거들떠보지도 않소!! 당신만을 사랑하오!!”했더라면 사라도 야단은 맞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남편말을 듣고 더 이상 주장을 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라가 말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창세기 16장 2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16장 2절 끄트머리는 이렇게 바꾸어야 제 맛이 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그 말이 나오는 즉시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나발이고 뭐가 없었습니다. 제의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 할렐루야!”하고 받아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의 여종 하갈과 동침을 했고 하갈은 임신을 했습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자 교만해져서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무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조금만 지위를 얻고 힘을 얻었다고 하면 금방 마음이 돌변해 지금까지 모시던 주인을 깔보고 “저 애기도 못 낳는 것”하면서 자신의 임신한 나온 배를 더 내밀고 다녔을 것입니다. 하갈이 좀 더 지혜로웠고 또 자신의 태내의 아이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하였다면 오히려 더 사래에게 잘하면서 “주인마님! 주인마님! 하면서 더 따르고 더 순종적이 되고 예전보다도 더 사래를 잘 모셨었더라면 사래는 아마도 분명 하갈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을 것이고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도 산후조리도 잘해주었을 것이고 미역가닥도 끊어서 미역국으로 뜨근뜨근한 밥도 해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상당부분의 재산이 누구에게 갑니까? 자신의 아들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에게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어떻게 조치합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서 따지기 시작합니다.“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척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사래는 독이 올라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당신 어떻게 처신했길래 저 썅년이 날 그렇게 멸시하는거요?”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삿대질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당신의 여종을 다스릴 권한은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하자 그때부터 사라는 하갈을 본격적으로 학대하고 구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저 웬만하게 하갈을 학대를 하였다면 하갈이 태내에 아이도 있으니 좀 참았겠지만 오뉴월의 서릿발도 그런 찬바람이 없는지라 하두 모질게 학대하고 못살게 구니 하갈은 견딜 수 없어 가출해 버린 것입니다. 사라가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부부사이 아닙니까?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을 잘 믿는 오늘날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장로쯤 되고 사라는 권사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하갈은 믿지 않은 이방인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믿는 장로권사 부부가 함께 사는 믿지 않은 비신자를 한 가정 안에서 억압하고 타박한 것입니다. 하갈을 견디지 못하게 학대한 것입니다. 이때 하갈이 무슨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저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구니 저것이 믿는 하나님도 억압자의 하나님이겠구나! 그렇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악하게 굴거나 자신의 이익만 차릴 때 결국 그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게 됩니다. 내가 어느 신들도 믿을 수 있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은 죽어도 안 믿겠다! 너하고 만일 천국에 함께 간다면 네가 있는 그 천국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옥이 될테니까 네가 믿는 하나님 안 믿고 네가 가는 천국에는 죽어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이방인인데 사래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랑으로 대접하여 주고 선대해 주면 자신의 주인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드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게 쉬었을 것입니다. 사래는 그렇다치고 아브라함은 이때 어떠했습니까? 자신이 아닌 사래 때문에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갈이 누구입니까? 태내 자신의 아이를 가진 그 아이의 어머니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사래가 쫓아낸다고 하였을 때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그저 수수방관만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하갈 사이에 서서 중재하면서 두 사람 관계를 회복시켰어야 옳습니다. 애초에 하갈을 들이기로 한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이 사라 몰래 연애를 하여 시작된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갈을 들여 아이를 갖자고 한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였으므로 어린 것이 잘못을 하면 야단칠 것은 야단도 치고 더 이상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수습하고 조치했어야 했습니다. 설령 아내가 하갈을 쫓아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얼른 뒤쫓아 가서 하갈을 위로하고 다시 데리고 들어와서 사래와 화해를 시켜 주면서 살게 하든지 했어야 옳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찾아가지 않았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갈 안에 든 어린 생명에 대하여 알 바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밴 여자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집을 나가면 죽을텐데!! 하면서 티끌만큼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믿지 않은 이방인인 하갈을 그것도 아이를 밴 산모를 무정하게 내쫓아 버리고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6 장 11 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이 가출하였어도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형편과 고통을 들으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사자를 보내어 하갈을 데려다가 다시금 아브라함 가정에다가 데려다 놓지 않습니까? 하갈이 돌아왔을 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갈을 집으로 데려다 놓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돌아온 하갈을 보고 자신이 차가웠던 가슴을 용서해달라고 단 한마디라도 사과를 합니까? 창세기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이 열국의 어미 사라가 열국의 어버이로서 지녀야할 그 너른 가슴이 없었습니다. 하갈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어긋맞아 포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너무도 매정하였고 그 가슴이 차가웠고 사라는 그 차가운 냉기가 훨씬 더했습니다.
그 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창세기 21장 8절에서 13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차가운 가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점점 자라서 젖을 떼던 날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으로서는 장남인데 장남이 태어났을 때와 젖을 뗐을 때는 소규모의 잔치상이라도 차려줬습니까? 안 차려주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뗐을 때는 잔치상을 크게 차렸습니다. 바로 이때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놀립니다. 놀릴 만도 하지요! 내가 그럴 때는 미역국 한 그릇도 없었는데 동생한테는 소 잡는다 양 잡는다 하고 소란을 피우고 법석대니 맘이 상할 만하지요! 분한 맘에 놀렸을 것입니다. 사라는 발끈하여 아브라함에게 가서 말합니다. 21장 10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당한 것을 알리고 쫓아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놀리기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 어른인 사라가 개입하여 마침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을 때 사라가 하갈에게 주의를 주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도리를 하고 그쳤다면 지난 번 창세기 16장을 교훈삼아 서로 용서하고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 가족으로 사랑하며 살았더라면 그동안 수십 세기를 거친 역사 속에 강물보다도 더 많이 흘린 피와 이스라엘과 아랍족속 사이에 테러와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전쟁과 테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고 결국 아브라함의 같은 자식들인 이삭과 이스마엘 족속간의 전쟁이요 테러 아닙니까? 외피상은 미국과 이라크 미국과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입니다만 실제로는 이는 아랍 자손들과 아브라함 자손들과의 전쟁이요 더 깊게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자녀인 이삭의 후손들과 역시 아브라함의 또 하나의 소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 간의 전쟁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배려로 인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사이좋게 살게 하였다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가 설령 그렇게 쫓아내려 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따뜻한 마음으로 적당한 선에서 야단을 치고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버렸다면 이삭과 이스마엘은 좋은 형제로서 나중에 서로 하나의 민족을 이루며 오순도순 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냉냉한 가슴으로 인해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민족이 얼마나 서로 대결하고 서로 죽고 죽이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수천년 전의 싸움이 바로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9,11 테러를 일으킨 집단은 바로 이스마엘 후손이고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하여 전쟁을 한 이들은 이스라엘 후손들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큼 믿음도 짱짱하게 좋았고 순종하는 믿음이었고 예배도 잘 드렸고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성경에 그 삶이 기록될 만큼 하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2 %가 있었습니다. 가장 따뜻해야 할 때 그의 가슴은 무척 냉냉하였고 얼음장 같이 차가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힘이 있는 권세있는 하나님께만 잘하고 복종하였지 힘없는 을이었던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무자비하였습니다. 믿음도 좋았고 순종도 잘하였고 예배도 잘 드렸고 기도생활도 잘하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바로 그 가슴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감싸 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마음, 용서해주고 덮어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에서 2 절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오늘날 특별히 한국의 장로교와 장로교 신자들은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한국장로교도 예배를 드리는데 두 번째 가면 서러워합니다.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 삼일밤예배, 예배의 각종 명목을 붙이면서 예배 잘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기도생활을 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새벽기도회, 사순절 특별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등등 기도를 잘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을 잘하였습니다. 떠나라 하면 떠나고 가라하면 가고 바치라 하면 바쳤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성수주일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봉헌생활도 잘합니다. 한국교회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한국교회와 한국장로교회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가슴으로부터 배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로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잘하였던 예배생활, 아브라함의 순종생활, 기도생활, 예배생활로부터 배워서 더욱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잘 드리고 믿음생활도 잘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하지 못하였던 가슴이 차가운 것으로부터도 배워야 합니다. 이를 反面敎師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은 좋았지만 가슴은 뜨겁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뭔가 큰 구멍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불과 1-2 % 정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시대를 주도하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이 25%가 되는데도 개독교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지금 자체 내에 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단들 중에 지금 자체 내 헤게모니를 쟁탈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교단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새 교우가 왔는데 적지 않은 수가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물질적이고 경제지상주의를 신봉합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면서 향기를 풍겨내면서 빛을 비추이면서 살아간다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아지고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가 되고 전도가 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방인인 하갈에게 참으로 선대해 주고 잘 대접해 주었다면 하갈에게 냉정하지도 않고 이스마엘을 친자식과 같이 키웠다면 하갈은 그렇게 따뜻하게 해 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는 그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굳이 열심히 예배를 드려라 사라가 꼭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 말하지 않아도 삶을 통한 전도가 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예수 믿어라! 우리 교회 나와라! 그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먼저 희생하고 먼저 손해보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자신을 저주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주고 산다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이 믿는 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신앙은 좋다고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득에는 더욱 아득바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슴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가슴과 같이 냉냉하고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나누는데 인색하면서 독을 품어내면서 산다면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나는 너같이 될까봐 예수 같은 거 믿지 않겠다! 니가 믿는 예수도 그렇게 독한 사람일까봐 나는 예수 같은 것 죽어도 믿지 않겠다! 하고 결국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통계청이 인구조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1995 년부터 2005 년까지 불교도 조금 늘었고 카톨릭교회는 무려 75.6 % 성장을 했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2.9 %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대체 왜 개신교가 고구마전도다 이슬비전도다 전도를 많이 하는데 교인수는 줄었을까 리서치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중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응답이 나왔습니다. 개신교에 갔더니 시댁분위기와 같았는데 카톨릭에 갔더니 친정분위기더라! 교인들이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징하고 더 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취를 맡는 것이 아닌 냄새를 맡아 역겨워서 얼른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만큼 손해보려 하지 않고 손톱만치도 희생하려 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도 천국에 들어가는 막고 서 있는 셈이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는 예수 믿고 싶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의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무섭게 이기주의적이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점점 하향길로 치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들이 우리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들이 우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참으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진정 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는 이 삶의 자리에 기독교 현상은 있되 예수 정신은 없어져 갑니다. 무화과는 무성하되 열매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기독교는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광성교회 성도들을 포함하여 아브라함의 냉냉한 가슴이 아닌 예수님의 따뜻한 가슴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더욱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34 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슴의 온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느냐 하면 십자가를 매달아 못을 박아 피가 철철 떨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못 박던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위해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심장의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부족한 2%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함께 있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할 때도 그리스도의 온기가 넘치고 나의 발걸음 손짓 하나로만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광교회 성도들의 가슴이 따뜻하면 여러분의 가슴이 온기로 가득 차 있으면 교회가 따뜻해지고 교회가 따뜻해지면 세상이 지금보다도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며 주님나라는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광성은 빛 <光>자에 거룩할 <聖> 해서 거룩한 빛입니;다. 광성교회가 이름 그대로 믿음의 거룩한 빛, 사랑의 거룩한 빛을 환히 비추이는 광성교회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예배생활과 신앙생활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녔던 냉냉한 가슴을 지니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저희의 가슴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덥혀 주시사 저희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빛이 되고 그리스도의 따뜻한 열을 발산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저희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지니게 해 주시고 이 둘이 저희 안에 항상 함께 있게 해 주옵소서! 저희로 따뜻함을 발산시켜 세상 사람들이 저희의 온기를 느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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