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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너는 내 것이라

관리자 2010-11-29 (월) 11:15 13년전 3172  

2001 년 9 월 9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이사야 43 장 1 절 - 7 절

제 목 : “너는 내 것이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예배에 나아온 모든 이들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수탉이 있었습니다. 꼬끼요!!하고 울었습니다. 그랬더니만 동쪽에서 해가 떴습니다. 수탉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야! 내가 힘차게 울었더니만 태양이 동쪽 하늘에서 두둥실 뜨잖냐?” 이는 수탉의 착각입니다. 이것을 듣고 있던 매미가 말합니다. 너는 고작 하루를 바꾸느냐? 내가 노래하면 봄이 가고 여름으로 바꾸어진단다. 매미의 착각입니다. 어찌 수탉과 매미만 착각을 하겠습니까? 여러 명의 처녀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 처녀가 자못 심각하게 말하였습니다. “못 생긴 여자는 잘 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잘 생긴 여자는 못 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된대. 그런데 얘들아 나는 걱정이 있어. 분명히 못 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될 테니 난 어쩌면 좋니?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있던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얘,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들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걱정 되는구나!“ 어떤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지팡이를 지고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또 그 환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팡이 쥐고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앞에서 한 환자가 그 환자보다 더 훨씬 더 큰 지팡이를 들었다가 지팡이를 땅에 콱 찍으면서 말했습니다.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고 하더랍니다. 착각은 전적인 자유입니다. 착각은 일분간의 행복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일년간의 후유증을 낳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3 대 착각을 알고 계십니까? “살고지고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인생의 착각입니다. 인생 살면 얼마나 삽니까? 시편 90 편 10 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작 칠팔십 사는데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착각입니다. 죽음을 바로 언더 너머에 있는데 사람들은 전혀 그 죽음을 준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착각은 무엇일까? ”하나님 없이도 나 혼자 잘 살 수 있어!“ 내가 쌓은 경험, 내게 있는 정보, 내가 가지고 있는 돈과 건강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 착각은 그 착각으로 지은 바벨탑이 무너진 다음에야 그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인생의 또 하나의 심각한 착각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럼 ”내 인생은 내 인생이기에 나의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Mart and Mart에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BB Mart에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콜룸부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듯이 당신의 인생을 고생고생하다가 苦盡甘來하여 발견하였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흙으로 빚어서 당신이 스스로 생기를 후욱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였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말씀이 힘이 있어서 ”빛이 있으라 하듯이 “내 인생이여 있으라!” 명령하였더니 당신의 인생이 있게 되었습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 착각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면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Paul Tillich 라는 신학자는 인생과 인생이 처한 상황이란 하나의 질문이라면 성경은 이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누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제 성경 이사야 43 장의 말씀으로 들어가 봅시다. 43 장 1 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 장 1 절은 야곱아!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야곱아! 이렇게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인생아! 그렇게 바꾸어 부를 수 있습니다. 1 절을 잘 분석해 보면 똑같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야곱아!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는 표현은 달라도 똑같은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생아 내가 너를 창조했고 인생아 내가 너를 조성했다! 네 인생의 소유권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3 장 1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신 것입니까? 두 여자가 만나서 얘기합니다. “얘, 오늘 따라 너 참 예쁘다! 여자인 내가 봐도 그리 아름다우니 남자들이 널 보면 얼마나 더하겠니! 오늘따라 입은 그 옷도 참 센스있다 얘! 옷이 날개여서 뭐 그렇겠니? 니 미모가 바쳐 주니까 그렇게 날개처럼 보이는 거지! 나도 너처럼 그렇게 멋졌으면 원이 없겠다. 참 그런데 너 지금 만원만 꿔줄래?” 이 여자친구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긴 말을 했지만 핵심은 “만원만 꿔줄래?” 여섯 자에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43 장 1 절의 말씀은 무척 길고 깁니다만 딱 한마디로 줄이면 역시 여섯 자로 요약됩니다. “너는 내 것이라”. 왜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하나님 자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생기를 불어 사람을 조성하고 창조하셨으니까 당연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뜻만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자신을 떠나 남방의 바알신에게 가고 북방의 아스다롯 신에게 가서 절하고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고 하니까 원 주인인 여호와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 아닙니까? “저 자식은 내가 조성하고 내가 창조했는데 나에게 절을 해야지 엉뚱한 허깨비들에게 절을 해! 그러면서 “너는 임마 내 것이야 내가 조성하고 내가 창조했어!” 그렇게 소유권을 재삼재사 확인하신 것입니다. 한 탤런트가 오른 손 검지에 침을 묻혀 사랑하는 남자의 코에 찍으면서 “넌 내 꺼야!” 이것이 한 때 애들 사이에 유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침까지는 묻히지 않았지만 지금 검지로 야곱을 지명하면서 넌 내꺼야!하고 하신 것입니다. “넌 내꺼!” 여기에는 “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목록의 하나다” 단순히 그런 뜻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즘 한젬마라는 서양화가가 뜨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그림을 읽어주는 여자”로 유명한데 그가 두 번째로 쓴 책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에서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요 사랑은 욕망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갖고 싶다는 욕망, 그이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이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싶은>“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 말씀하시는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갖고 싶은 뜨거운 사랑의 연정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43 장 1 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본문 2 절에서부터 7 절까지를 붉고 뜨거운 사랑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2 절을 봅시다.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어떤 머스매가 가시내를 사랑했습니다. 편지를 썼지요. ”사랑하는 영숙씨! 영숙씨를 위해서라면 산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나는 넘어갈 것이요 설령 큰 강이 놓여 있다하더라도 헤엄쳐 갈 것입니다. 영숙씨와 나를 가로막는 것은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없을 것입니다. 금 주 토요일에 만납시다. 만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사랑에는 이토록 조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듭니다. 불이 났을 때 집에 아무리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해도 무모하게 뛰어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난 그 집에 자식이 있을 때에는 특히 어머니가 불 속에 뛰어드는 경우가 무척 많은 거을 보도를 통해 읽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면 뻔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그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미 속에 자식을 향한 불붙는 그 미어지는 사랑이 죽음 속으로 돌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그 어미는 화장실에서 변기를 감싸 앉은 채 죽고 자식은 변기 안에 넣어져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 중에 수천억의 수조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은하계 하나가 불에 타고 있다고 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그 속에 뛰어들어 은하계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면 다시 창조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소유물인 이스라엘이 불 가운데로 행할 때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바로 불 가운데 위태하게 놓여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시고자 불 가운데 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꽃이 이스라엘을 사르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침몰하려고 할 때에는 물 가운데 오시어 그 물이 침몰치 않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는 그토록 사랑하는 내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소유는 그저 그렇고 그런 소유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소유물이라면 물 가운데 지날 때 침몰하지 못하도록 지키겠습니까? 그저 단지 차고 있는 손목시계나 호주머니의 지갑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굉장히 중요한 소유임에 틀림없습니다. 불과 홍수 속에서도 함께 하며 지키겠다고 하시니 그 소유물의 가치는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 43 장 4 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 즉”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무엇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면 이해하겠는데 존귀하신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겠다고 하신 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 중에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를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일곱 영들과 그룹들과 스랍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면 우주에 빛나고 있는 천체와 은하계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신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런 것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신 바로 우리 인생을 보배롭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사야 43 장의 말씀은 단지 옛 이스라엘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새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 후배 중에 하나는 검지 손가락이 짤려져 나가고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엇을 가르킬 때는 이렇게 가르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무엇을 가르킬 때는 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렇게 중지를 써서 “아빠 저기 봐!” 가르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검지가 있으신지 없으신지 모르겠지만 분명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가르키면서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이 역시 성경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5 절에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6 절에는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절에서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이란 하나님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하시고 내게 오게 하라고 세 번씩이나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번에 DJP 연합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씨가 각각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생겼습니다.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에게 김종필씨가 싸인을 보냈습니다. 너는 이제 국무총리직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자민련의 실질적인 오너는 김종필 자신이고 국무총리도 자신이 시켜 주었으니 이제 민주당하고 깨졌으니 너는 내게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한동은 내가 어찌 니것이겠느냐! 나는 국민의 것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니 안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한동은 국민의 것이지 김종필의 것이 아니다는 행동입니다. 난리가 났지요. 우린 무엇인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내 것이라면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고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을 내게 오게 하라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부모는 보통 자식의 모습을 자주 보기를 원합니다. 저희 가장 큰 고모는 자식들이 찾아가면 “오매 내 새끼 왔니!” 하면서 다 큰자식을 얼굴을 감싸 안고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자주 오지 않은 것을 무척 섭섭해합니다. 그러므로 효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얼굴을 자주 보여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아까 보고 또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도 그러십니다. 내 새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새끼인 이스라엘을 오게 하라! 오게 하라! 오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오라고 하셨으니까 가야 하겠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7 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고 하였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감을 말합니다. 21 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보통 예배보러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틀린 표현이라고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표현이 맞다고 합니다만 두 표현 다 맞습니다. 물론 예배 자체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하나님을 보러 가는 가기 때문에 예배보러 간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보러 감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습을 보여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인 우리가 자신의 전에 나타남을 보면서 기뻐하십니다. 요즘 아버님이 은퇴하시고 가장 좋아하시는 일은 자식들과 손주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믿음으로 키운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이고 기쁨인 것 같습니다. 전화하여 간다고 하면 아까 왔는데 뭐할려고 또 오냐 하시면서 좋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정확하게 같으십니다. 예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 우리 얼굴을 보여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얼굴을 보여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 속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재삼재사 확인하시고 아울러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충족시켜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면 우리는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가자고 하시면 함께 가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일이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할 일입니다. 지난 주 어떤 굉장히 착한 집사님이 오리 두 마리를 제가 사는 아파트로 보내셨습니다. 오리탕을 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금방 잡은 오리 두 마리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집사님이 오리 두 마리를 보내셨을까?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목사의 목소리가 너무 힘이 없으니까 오리고기를 먹고 오리와 같이 꽥꽥거리면서 말씀을 힘있게 잘하라고 보냈을까? 그러고 보니 보낸 오리는 두 마리였습니다. 오리 보태기 오리는 무엇입니까? 십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또 누구든지 너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태복음 5 장 41 절) 이 말씀이 떠오르면서 혹 그 집사님이 오리 두 마리를 주시면서 “목사님! 앞으로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리를 가자고 하시면 어찌 오리뿐입니까? 십리라 할지라도 기꺼이 따라가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런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달리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 집사님을 통해서 오리 두 마리를 보내신 것은 “얘야! 내 종아 너는 내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그 두 배인 십리라도 같이 가려는 갑절의 영력과 뜨겁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목회를 할 것이니라! 그렇게도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나 목회생활이나 같을 것입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인생 헛되네 즐겁고 기쁠 때 늘 계시옵소서“ 찬송과 같이 우리 인생, 주님 떠나가시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납니다. 이왕 신앙생활을 하는 것 넘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이 얘야 나하고 같이 오리를 가자꾸나! 하면 겨우 이삼리를 가다가 말거나 간신히 오리를 턱걸이하여 채우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주님 오리뿐입니까 주님과 함께 라면 십리라도 아니 사마리아 땅끝까지라도 지구상 끝까지라도 주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주님 오라고 하시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주님께 얼굴을 보여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런 믿음과 순종을 가지면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우리 인생을 조성하신 그 분이 우리를 소유하시는 그 분이 창조하신 그 목적을 100 % 성취하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자신 앞에 나아오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우가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도 팔이 안으로 굽는 분이십니다. 한번이라도 자신 앞에 더 얼굴을 보이고 한번이라도 자신을 더 찬송하러 나아온 이들을 각별히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분”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 앞에 자주 나오고 얼굴을 내미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고 한 움큼이라도 더 은총을 베푸십니다. 바로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점심을 싸들고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지키시며 보배롭게 여길 뿐 만 아니라 존귀하게 여기시며 물 가운데 지날 때 함께 하시어 물이 우리를 침몰치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불 가운데 지날 찌라도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물인 여러분들의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주시고 임마누엘의 은총을 내리어 주십니다. 43 장 3 절에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다시 말하면 네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5 절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내가 네 하나님이 되고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임마누엘하시면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그대로 보시기만 하겠습니까? 임마누엘하시면 우리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그저 관전만 하시겠습니까? 임마누엘 하시면 우리가 시련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임마누엘 하시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을 때 그 옆에서 침묵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무엇보다도 날마다 숨쉬는 순간 순간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이면서 시인인 서정슬 씨가 2001 년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출생 시 약물 부작용으로 중증의 뇌성마비 장애를 입고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왜 다른 사람과 정상적으로 사랑하며 노래하며 살 수 없지! 아픔과 고통은 그를 어둠의 깊은 그늘로 인도했고 거기서 또 한번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정슬 씨는 고통의 깊은 심연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했습니다. 은총의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의 어둔 동굴과 시련의 깊은 골짜기에서 헤매는 그를 환한 빛 가운데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 43 장에서와 같이 “서정슬,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해주시는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말할 수 없는 은총의 체험은 그녀의 삶을 황홀한 지경으로 옮겨 놓게 했습니다. 비록 장애로 찌든 몸이지만 하나님의 것인 자신의 몸과 마음이 너무도 소중하고 존귀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치는 그 기쁨으로 이렇게 자신의 시편을 썼습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 그러기에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 이 세상에 나온 것이 내 마음대로가 아닌 것처럼 /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 나는 하느님 아버지 것입니다 / 나는 글을 씁니다 그림을 그립니다 / 수를 놓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면서도 /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 하느님 아버지의 힘입니다 / 나에게 주신 힘입니다 /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 그러기에 하느님 /언제 나를 당신 뜻대로 움직이게 하소서 / 이제로부터, 항상, 시작하면서 ..../ 이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행복입니다 / 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다 드렸습니다 /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저희의 몸도 마음도 저희의 영혼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도 저희의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저희를 주님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그 좋으신 은혜를 감사드리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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