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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다섯 종류의 인간들

관리자 2010-11-29 (월) 11:19 13년전 2151  

2001 년 10 월 28 일(주일)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밤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0 장 30 절 - 36 절

제 목 : 다섯 종류의 인간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분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유형화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상의학을 정초한 이제마 선생님은 인간의 생긴 형을 4 가지로 유형화하였습니다. 소음형, 소양형, 태음형, 태양형입니다. 그런데 태양형은 100 명 중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는 형이라는데 이 형은 좋게 얘기하면 과단성 있는 지도자형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독재자형입니다. 사회적 관계에 능하고, 상대방을 어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들과 교통합니다. 그렇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남에게 화를 잘 냅니다. 이 형은 급박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조급함을 뜻하는데 급박지심을 자제해야 간혈이 부드러워지고 일이 제대로 풀립니다. 반면 무언가 지나치고 무리를 할 때에 급박지심이 드러나서 일을 그르치고 건강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용맹스럽고 적극적이며 남성다운 성격입니다. 방종지심이 있습니다. 제멋대로이고 후회할 줄 모릅니다. 독선적이고 계획성이 적으며 치밀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음형은 태음형대로 소양인은 소양인대로 그래서 각형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사상의학은 점점 더 발전하여 팔상으로 좀 더 세분하여 나누어집니다. 제가 약 10 여년 전 몸이 약하였을 때 서울에 있는 한방에 갔더니 한의사 권도원이라는 분이 그 팔상의학의 대표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저를 진맥하더니 저는 토양형이라고 하면서 찹쌀, 현미, 우유 등은 좋지 않고 바나나 등은 좋으며 붉은 색 커텐은 좋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분의 말씀을 잘 들어야 했는데 언제 그것을 다 구분하면서 이것은 먹고 저것은 안 먹다 보면 신경이 너무 쓰일 것 같아서 그냥 주는대로 먹고 있습니다.  

사람도 가만히 보면 이렇게 저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각 기준에 따라 사람의 형이 나름데로 정해집니다. 오늘 함께 분류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난 사람의 분류법입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0 장 30 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철저히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잘 살펴보면 여러 등장인물이 나옵니다만 이들을 이 시간 저는 다섯 유형으로 비교하여 보고자 합니다. 

10장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장 31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장 32절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장 33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장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10장 35절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나오는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연구하면서 일정한 원칙에 의해 정리해 봅시다. 등장인물이 누구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등장인물은 강도 당한 사람입니다. 둘째 등장인물 그룹은 강도떼들입니다. 셋째 등장인물은 제사장과 레위인 그룹입니다. 넷째 등장인물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다섯째 등장인물은 주막주인입니다. 이 인물들에게 카메라 렌즈를 좀 더 가까이 하여 들여다 봅시다.  

첫째는 여리고 언덕의 강도떼들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 9. 6Km지점의 요단 골짜기에 있던 오래된 큰 성읍입니다. 여리고 언덕은 여리고에 있는 골짜기인데 상당히 음습하고 수풀이 우거져서 모든 범죄행위가 잘 감춰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입니다. 이 여리고 언덕은 강도떼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장사가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좋은 목이었습니다. 아마도 너무도 물건을 강탈하기 좋은 곳이었기에 강도떼들간에도 서로들 이 자리를 빼앗기 위해 혈투를 벌였을 것입니다. 이 강도떼들은 아마도 정직하게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한 탕하면 내 인생 환히 열린다는 한탕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돈이 된다면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반쯤 죽여 놓는 패거리들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소문을 통해서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떼들에게 당하였다는 여러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강도떼들이 많아진다면 이스라엘은 점점 어떻게 되겠어요? 강도떼들은 있어서는 결코 안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런 강도떼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테러를 자행한 사람이나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폭격하기 위하여 무고하게 아프카니스탄 민간인을 살상하고 그 폭격 때문에 수백만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시나 오사마 빈 라덴이나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을 하면서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의 몇몇 유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 장 6 절에 보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 장 13 절과 15 절을 읽어봅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한마디로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골때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말리는 사람이야말로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 장 24 절 말씀입니다. 강도떼들은 이런 부류의 인간들입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하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둘째는 강도 만난 어떤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은 너무도 많습니다. 분명 이 사람은 여리고 언덕이 강도떼들이 우굴거린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강도들에 의하여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옷을 벗겼다고 했으니 아마 좋은 채색옷을 입고 다녔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면 요즘에는 옷이 흔해서 강도들이 옷을 빼앗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당시는 채색이 있는 옷감은 귀해서 강도들이 홀라당 벗기어 다 털어 갔습니다. 팬티도 벗겨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거의 반쯤 죽도록 맞아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강한 햇빛이 비취니 점점 죽기 일보직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빈사상태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오늘날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강도떼가 존재하는 한 이렇게 상처입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강도떼들, 다시 말하여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니 있을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에수님께서 지극히 적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의 모습으로 상처 입은 자의 모습으로,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헐벗은 자의 모습으로, 굶주린 자의 모습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폭격을 당하여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어떤 익명의 모습으로 당한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셋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떻게 했지요? 31 절과 32 절을 읽어봅시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왜 피하여 지나갔을까? 만일 내가 그를 데리고 가야한다면 치료비랑 운반비랑 내가 다 물어주어야 할 터인데 생각하니 재정적인 손해가 막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어디로 간다면 무슨 용건이 있었을 터인데 그 사람을 돌본다면 분명 그 용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그 길을 갔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사장은 방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을 마치고 그 길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윙윙거리는 파리떼들과 피로 뒤범벅된 사람을 보자 빨리 그곳을 지나쳐 다른 길로 피해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사장은 그렇지 저 사람은 죽어 가는 사람이거나 죽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제사장으로서 시체를 만지면 안되지 하면서 서둘러 급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유대 법률에 제사장은 시체에 손을 댈 수 없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이미 어기고 간 것입니다. 율법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을까요? 레위기 19 장 18 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시체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 개연성을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다 큰 계명을 무시한 것입니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이 나오는 혈족입니다. 이 사람들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할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레위인도 레위인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강도 당한 것을 알고 지레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강도들이 아직 바위 뒤에 숨어 나에게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다면....?'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그는 겁에 질려 서둘러 그곳을 떠났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에 나타난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그 사회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이들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입니다. 有用之物이 아니라 無用之物입니다. 별로 사람의 구실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으나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만 유명무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오늘의 레위인(기독교인)과 제사장 집단(교역자)들인 한국교회를 보고 뭐라고 보실까? 있으나 마나한 집단으로 보시지 않을까?  

넷째는 주막집 주인입니다. 주막 집 주인은 사마리아인이 요청한 대로 돈을 받았지만 그 사람을 돌보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거의 반쯤 죽어가던 사람이었기에 주막집의 좋은 소문을 위해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막 집 주인은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돈을 내지만 나중에 찾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경비를 드려서 치료한 것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여 그 상처입은 사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앞뒤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선 그 상처입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그를 자신의 주막집에 쉬게 했고 치료과정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주막집 주인은 꼭 돈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인정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있으면 좋은 삶이며 있어서 보탬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차라리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도 이 사회에 더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넷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읽어봅시다. “10장 33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장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10장 35절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바로 내 아픔과 동일시하였던 사람입니다. 물론 사마리아인도 자신의 볼 일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자신의 돈을 보태어 상처 입은 사람을 도왔고 그 사람이 끝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없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 사회에 소금과 빛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에는 긴 말을 줄이는 것이 유행입니다만 선한사마리아인을 세자로 줄이면 선사인입니다. 영어로 선사인이면 햇빛이 비추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은 은혜의 햇빛을 비춰 준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신대에서 한 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동료 여교수 중에 한 분이 울부짖었습니다. “안돼! 이 죽음은 취소되어야 해!” 그 교수는 동료교수에게 신이 그 죽음을 취소해야 하리만큼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을 것입니다. 요즘 자연의 좋은 친구들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없어서는 안될 친구였습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훌은 없어서는 안될 기도의 후원자였습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없어서는 안될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없어서는 안될 시어미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은 없어서는 안될 길잡이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 땅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치는 그가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더욱 더 그 존재가 찬연히 빛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상처입은 사람에게는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소금과 빛은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이 사회는 부패하고 맛이 없으며 이 사회에 빛이 없으면 암흑천지로서 악이 활개치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의 존재로 존재하는지 예수님 당시의 레위인과 제사장과 같은 존재로 존재하는지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하여 다시 한번 비추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어서는 결코 안될 사람, 있을 수도 있는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있으면 좋은 사람, 없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혹 있습니까?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남습니다. 두 종류의 인간들이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있어서는 안될 사람과 없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히틀러 같은 사람, 가룟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없어서는 안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테레사 수녀. 여러분은 주변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을 가졌습니까?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시를 썼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송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만리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두거라' /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 그대는 가졌는가 / 詩․함석헌/ 함석헌전집 중에서  

이 시에서 나오는 사람은 정말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을 두고 이름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초점을 두시는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이냐라는 질문을 내가 누구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느냐?의 질문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각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내게 좋은 이웃이냐를 묻기보다는 내가 누구의 좋은 이웃이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내가 서 있는 현 위치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 꼭 있어야 할 사람인가? 아니면 있으나 마나한 인간인가? 아니면 있어서는 안될 사람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으십시다.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5장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장 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희가 진정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의 자리에 결코 앉지 않게 하시고 또한 저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있으나마나한 사람으로도 남지 않게 하시고 저희가 이 땅에서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 보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저희가 상처입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누가 내 이웃이냐를 묻기에 앞서 예수님이 말씀 하신대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오늘의 선한 사마리안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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