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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관리자 2010-12-14 (화) 11:15 13년전 3190  

2002 년 2 월 10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 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말씀 : 히브리서 11 장 13 절 - 16 절

제 목 :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모레는 민족 전통명절인 설입니다. 설날에 앞두고 잠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다음 중 설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무엇입니까? 1. 까치 2. 세뱃돈 3. 떡국 4. 고향. 아마도 아이들 몇몇은 2 번 세뱃돈에 동글뱅이를 치겠지만 대부분은 4 번에 손을 들 것입니다. 설하면 고향입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는 고향에 대해서 14 절과 15 절과 16 절에 본향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할 첫 번째 멧세지는 우리 인생이란 나그네란 사실입니다. 본문 13 절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1 장은 믿음장으로서 믿음의 조상 특히 아브라함의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원래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유브라데강 하류의 서쪽 유역에 있던 고대 수메르의 성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정처없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유랑생활은 그 어디를 가든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만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인생도 나그네입니다. 통계청이 조사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 사람들 중 자신의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과 몇 십퍼센트도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1960 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급격하게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곳곳에 마산수출자유단지 같은 공업단지가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났습니다. 농업을 위주로 하는 나라가 공업과 서비스업을 하는 나라로 바꾸어지는 가운데 직장과 일터를 따라 인구가 재배치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자신의 고향에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다들 타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어떤 일정한 장소라고 했을 때도 타향살이를 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 자체로서도 우리는 고향땅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영원무궁토록 머물게 된다면 바로 이곳이 고향이겠지만 이 땅을 잠시잠간이면 떠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우리 고향은 아닌 것이며 나그네로 살다가 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 장 1 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잠시 나그네와 같이 머물다가 떠날 장막집과 같습니다. 모든 인생이 그러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두 번째 멧세지는 나그네 인생들은 본향을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4 절, 15 절, 16 절에서 본향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14 절에서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누구나 본향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본향이란 본래의 고향을 말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향을 찾으려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을 찾으려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고향에 대한 애착과 고향을 찾으려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만 그 중에 두 민족이 아주 유별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고향찾기 운동인 시온니즘과 우리 한민족의 고향찾기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침략을 당할 때마다 포로로 끌려가거나 또한 유태민족이 워낙 침략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이민을 간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오늘날 이런 저런 사정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diaspora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diaspora 유대인들에게 한결같은 소망은 “시온니즘”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빼앗긴 고향을 찾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1945 년에 팔레스타인을 되찾아 독립정부 세우고 유엔이 그것을 승인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을 2 천년만에 다시 찾은 것입니다. 고향을 찾는데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3340 만명이 고향을 찾아 이동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 속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배웠지만 이같이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3 분의 2 가 고향을 찾아 민족이 대이동을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특이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꼭 민족이나 인간들만이 고향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한문책에 이런 한시가 있었습니다. 호마의북풍 월조과남지 “호마라는 말은 언제나 북쪽 바람을 그리워 울고 월나라에서 온 새는 나무에 앉아도 남쪽으로 향해 있는 가지를 골라 앉는다 이는 본을 잊지 아니함이라” 사람뿐만이 아니라 여우도 본향을 찾으려고 하고 연어도 본향을 찾으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이 성적 행위를 할 때 요동을 치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 안달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어쨌든 나그네 인생들은 본향을 찾으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인생을 부를 때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베드로 전서 2 장 11 절)”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자신이 있는 그곳은 바로 영원히 있어야 할 곳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언제인가 떠나야 할 것이라고 믿고 마음은 고향에 언제나 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세 번째 멧세지는 고향에는 그냥 고향이 있고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4 절에서는 “본향”을 말하고 15 절에는 “더 나은 본향”을 말합니다. 본향이란 그저 고향을 말합니다. 고향이 어디일까? 고향이 어디입니까?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입니까? 그렇다고도 말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마산에서 태어났지만 마산을 제 고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데 어디를 찾아갑니까? 3340 만명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일까? 우리 한국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고 또 한국 사람들처럼 고향에 대한 노래가 많은 민족도 없습니다. 흘러간 옛 노래 중에 고향을 노래한 것만 해도 수백곡이 됩니다. “고향만리”, “고향무정”, “고향초”, “고향 하늘은 멀어”, “타향살이”, “고향만리 사랑만리”,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고향의 그림자“, ”나그네 설움“, ”정든 고향“ 등 너무도 많습니다. 고향에 대한 노래가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향역을 봅시다.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 역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니“, ”머나먼 고향“을 볼까요?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꿈에 본 내 고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향수“란 노래를 봅시다 ”고향산천 이별하고 차디찬 타관에서 어머님의 사랑 속에 자라던 그 시절이“ 고향만리를 볼까요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고향산천 가는 길이 절로 보이네“, 고향편지도 읽어봅시다. ”총소리도 잠을 자는 천막의 하룻밤은 어머님 외롭게 계신 잠자리 그리워서“ 자 여기에서 고향에 대한 노래에 대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노래들의 가사를 보면 고향이란 말과 부모님 혹은 어머님이 꼭 함께 나옵니다. 어찌 보면 고향보다는 어머니가 더 강열하게 더 부각이 됩니다. 고향은 어머님이 계시고 부모님의 따뜻한 정과 품이 있는 곳입니다. 가기만 하면 오냐! 내 새끼 그 먼데서 왔냐 하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 얼굴에 볼을 비비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고향입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노래 그대로 부모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곳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정이 있는 곳 그곳이 어디이든지 바로 그곳이 고향인 것입니다. 박광수 화백이 그린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신뽀리 씨는 설날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친구들과 화투나 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화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갑자기 고향에 가야겠다고 하고는 화투판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 화투판을 일어선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8광을 받았는데 8광 언덕 위에 달빛을 맞으며 날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서“ 그의 눈과 우리의 눈은 금새 촉촉해졌습니다.> 여러분은 군인을 대상으로 한 우정의 무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무대 뒤에서 아들을 부르는 장면이었지요. 그 날은 강원도에선가 올라온 어머니가 무대 뒤에서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시는 군인 장병 여러분, 다 나오세요“하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인들은 앞다투어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군인들은 모두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며 여러 가지 어이없는 이유를 말할 때 장내는 웃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군인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마찬가지로 물었습니다. ”뒤에 있는 분 어머니가 확실합니까?“ 그러자 그 군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닙니다.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힘없이 말하자 장내는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 출현하기 위해서 올라왔다고 하기엔 무언가 여느 군인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올라왔습니까?“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눈으로 군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군에 오기 전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군인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왜 올라왔습니까?“ 사회자도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보고 계십니까?“ 하고 겨우 물었습니다. ”예, 확실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군인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는 듯했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살아 계십니까?” 아닙니다. 두 분다 돌아가시고 형님 두 분과 살고 있습니다. 그 군인의 목소리는 더 작아졌습니다. “그럼 어머니께 한 마디 하십시오” 그 군인은 눈물을 쓱 닦고는 경례 자세를 취했습니다. “충성! 어머니. 이 막내아들은 형님들이 잘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시 떨리는듯 하더니 말을 다시 이었습니다. ”군 생활 잘하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히 눈감으십시오“ 고향이 부모님의 품이 있는 곳이라면 오늘 성경이 말하는 ”더 나은 본향은 어디입니까?“ ”더 나은 본향“이란 우리가 본래 나온 근본적인 고향을 말합니다. 우리 존재의 시작은 어머님의 자궁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본래적인 출발은 하나님의 품에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나를 지으셨다고 하십니다. 시편 139 편 13 절에 보면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이 뿌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의 품이었습니다. 바로 그 품이 우리에게 근원적인 고향인 것입니다. 16 절 하반절에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가 다시 돌아갈 그 고향은 다시 하나님의 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존재의 본래 고향은 하늘, 즉 하나님의 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본원적 세계요, 그곳에는 근원적인 평화와 안식이 있으며 하나님의 따뜻한 인정과 사랑이 넉넉하게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우리 어머니 같으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보금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영원한 하늘 아버지가 있는 품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16 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향은 꼭 우리가 죽으면 가는 저 멀리 삶의 언덕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 바로 그곳이 그 어디나 우리의 고향입니다. 설날이 되면 텔레비전이 꼭 고향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기자가 헬기를 타고 위에서 고속도로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남쪽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주차장과 같이 가득 차있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거의 한산하게 차량소통이 없었습니다만 몇년전부터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행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즘 새로운 풍속도입니다. 자식이 고향에 오는 것이 너무 고생을 하니까 많은 부모님들이 얘야! 고생하고 내려오지 말아라 내가 올라가마! 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갑니다. “아이고 내 새끼 나에게 오려고 20 시간이나 차를 타고 내려왔니! 그리고 다시 올라가서 피곤하여 어떻게 일을 하니!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히려 부모님이 짐보따리에 자식에게 줄 것을 가득 싣고 자식이 있는 곳에 올라와 함께 설을 보냅니다. 바로 그때 그 집의 고향은 시골이 아니라 부모님이 올라오신 바로 그곳이 고향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의 고향을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을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에게 고향이 되셨습니다. 하늘의 고향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그 고향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늘의 고향을 이 땅으로 옮겨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고향을 예비하여 놓고 기다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곳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거처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나그네길입니다. 언젠가는 떠날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가 우리의 본향은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장중 안에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예비해두신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은 나그네길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용하는 몸도 반납을 하고 우리가 가진 소유도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쓰고 있는 시간도 고이 보자기에 싸서 되돌릴 때가 오게 됩니다. 여기가 우리가 머물 궁극적인 처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리 오너라! 부르시면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찬송가 544 장은 이 땅은 일시적인 장막집이라 노래부르면서 저 영원한 고향을 사모하며 만든 찬송입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어제 우리 교회 7 구역 식구인 김점님 집사님과 그리고 한옥실 집사님의 동생되시는 한안순 집사님이 장막집과 같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우리는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땅에서 사는 삶을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언제가 훌훌 다 벗어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영원을 사모하면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나그네길과 하늘의 고향을 연결해주는 처소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고향을 바라보면서 사모하면서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함께 사는 장막집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더욱 그리워하게 됩니다. 교회는 하늘의 고향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고향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을 발견하고 우리는 이 교회에서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미리 고향의 모습을 듣기도 하고 여기서 우리는 하늘 본향에서 하늘아버지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미리 고향의 봄을 노래하기도 하고 우리는 이 교회에서 성령을 경험함으로 고향의 정취를 미리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눔으로 고향에서의 기쁨을 미리 나누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해 아래 이 가나안교회를 통해서 영원한 하늘의 고향을 바로 찾아가게 됩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는 남행열차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를 늘 귀하게 여기시고 여기서 주님의 품을 하늘의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키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희의 존재의 더 나은 본향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모두가 하늘아버지의 사랑의 품을 사모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간 두 집사님 김점님 집사님과 한안순 집사님을 하늘의 영원한 품에 안아주시고 생명과 부활의 품에 안아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매이지 아니하고 영원을 바라보면서 살게 하시고 이 땅의 삶이 나그네인 것을 깨닫고 하늘의 고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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