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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설교)열납하는 예배, 열납되지 않는 예배

관리자 2010-12-14 (화) 11:22 13년전 3280  

2002 년 1 월 13 일(주일) 오후 7 :00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밤 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창세기 4 장 1 절 - 7 절

제 목 : 열납하는 예배, 열납되지 않은 예배 

할렐루야!!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시는 예배일까? 아니면 열납하시지 않은 예배일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중에도 열납되지 않은 예배가 있고 기뻐 흠향하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레위기 7 장 18 절에 보면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시지 않은 예배가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은 어떤 예배가 주께서 가장 열납하시는 예배일까? 오늘 성경 창세기 본문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열납되는 예배가 있고 열납되지 않은 예배가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열납되는 예배가 어떤 예배일까? 오늘 창세기를 통해서 열납되는 예배가 무엇이고 열납되지 않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배워보도록 합시다.  

1. 아담과 이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 장 1 절에서 2 절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을 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성경에 보면 동침이란 말이 열 세번 나오는데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이 아들이 생겼는데 이름을 뭐라고 하더라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하더라! 그렇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동침을 하매 장남으로 가인이 태어났고 또 동침을 하매 차남으로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직업이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으니 농경문화를 시작한 첫 시조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이였으니 목축문화의 첫 시조였습니다.  

2. 두 아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인과 아벨이 최초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있었을 때는 그저 하나님께서 철따라 열매맺게 하신 과일들을 먹으며 부족함이 없었지만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종신토록 수고를 해야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쫓겨난 이후에는 수고를 하고 땀을 흘린 다음에야 소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땀을 흘려서 애를 썼을 때 겨우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최초로 소산을 얻었을 때 아담이 이브에게 먼저 말했는지 이브가 아담에게 먼저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수고하여 처음으로 열매를 맺었으니 우리 이것 중에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칩시다. 그러자 그래 그럽시다!” 하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서 최초로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그리고 난 후 매년 소출을 얻으면 그것이 양이던지 곡식이든지 얻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치는 일이 잦아졌고 그것이 바로 인류가 드린 최초의 제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그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바치는 제사를 매번 보게 되면서 아하!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크자 부모님이 하던 일 중에서 농사를 물려받았고 아벨은 부모님이 하던 일 중에서 양치는 일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마도 아담과 이브는 어느 날 밥상에서 두 아들을 불러 놓고 일을 맡기면서 “너희들은 열심히 일하여 소출이 생기게 되면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농사와 목축을 함께 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실 때만이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되더라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가인은 부모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벨은 부모의 말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였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부모가 이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이브가 때로는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때로는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에 제사 드리는 방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제사에 대하여 익숙하였습니다.  

3. 드디어 가인과 이브가 일터에 나가 소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4 장 3 절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제사란 다른 무엇이기보다는 여호와께 바치는데서 시작합니다. 제사에 있어서 제물이 필수적입니다. 최초의 제사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나 어떤 찬양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제사는 단순했는데 봉헌이 주요한 제사의 요소였습니다. 아마 봉헌 이후에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예물 바치오니 곧 받아 주소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하니 아마도 밀이나 옥수수를 제단에 바쳐 드렸을 것이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바쳐 제단에 바쳤습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4 장 5 절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안 받으셨을까요? 우리는 보통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것이 니 맘이냐? 내 맘이지!” 제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사를 받으시고 안 받으시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맘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외삼촌이 저에게 수수께끼라면서 내놓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쇠 한근이 무거울까? 솜 한근이 무거울까? 그럴 때 제가 머리를 썼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답을 쇠 한 근이 무거울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난 답은 그 반대에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여 “솜 한 근이 무겁다”고 했는데 외삼촌은 땡! 틀렸습니다. 둘 다 한 근이므로 같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 문제를 냈습니다. “엿장수가 일분에 가위질을 몇 번 할까요?” 그래서 열심히 계산해서 2 초에 한번 하면 30 번 하면 또 땡! 틀렸습니다. 답은 “엿장수 맘대롭니다.” 제사를 받고 안받고는 하나님 맘대롭니다. 출애급기 33 장 19 절에 보면 “나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렇습니다.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유로운 행동으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4 장 4 절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받고 안받으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통 제물은 태워서 하나님께 번제로 올리게 되는데 그 제물이 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똑바로 하늘 위로 올라가면 받으시는 징표로 삼고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중간에 바람에 의해서 이리저리 흩날리면 안받으시는 징표로 받았는지 그것은 모릅니다만 아마도 부모님 아담과 이브로부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고 저렇게 되면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100 % 받으시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척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으신다면 참으로 골치 아픈 일 아니겠습니까? 슬기로운 사람은 시행성공 사례를 통해서 배우고 시행착오를 통해서도 배웁니다. 타산지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7 억인의 교사였던 모택동은 反面敎師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反面이 敎師가 된다 즉 나에게 반대되는 면이라도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 말입니다. 어떤 실패를 통해서도 가르침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가인의 예배를 통해 배우고 아벨의 예배를 통해 배우는 시간이 되도록 하십시다.  

첫째, 연구 아이템입니다. 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아니하셨을까요? 그 요인을 조심스럽게 분석해 보십시다. 뭔가 하나님으로서도 가인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에게 드린다고 선물을 가져오는데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으로서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4 장 3 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얻은 소출 중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자신의 소출 중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만 가인은 자신의 첫 소출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곡식에서 얻은 소출 중 빛깔이 좋고 열매가 튼실한 좋은 것은 자신의 창고에 쌓아 놓고 여호와께 드릴 결실이야 어차피 불로 번제로 태워 없어질 것이니까 대충 그렇고 그런 것을 골라잡아 드렸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말라기를 보십시오. 말라기 1 장 8 절에 보면 인간이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중을 나타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희를 기뻐하겠느냐 너희를 가납하겠느냐?”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때 흠이 있는 것, 대충 적당한 것을 드리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니까 얼씨구나 하고 받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의 창고에 온 우주만물 중에 진기하고 고귀한 것이 다 있는데 인간이 드리는 아무 것이나 덥석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컨대 정성입니다. 그 제물 속에 정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십니다. 과부가 드리는 엽전 두 냥에는 정성이 있기 때문에 기뻐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바치는 물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객관적 값어치가 아닙니다. 얼마나 그 사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쳤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다 주의 것 아닙니까? 아마도 가인은 부모인 아담과 이브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을 쫓아냈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는지 아니면 부모가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바치라는 밥상에서 가르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가인은 땅에서 나온 소산 중에서 첫 열매가 아닌 그저 그런 것으로 바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가인이 곡식 중에서 첫 곡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성별하여 祈禱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바쳤다면 하나님께서 왜 안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신 두 번째의 이유를 살펴보자면 아마도 가인은 아벨을 제사를 드리기 전에도 미워하지 않나 싶습니다. 원래 부모의 사랑이 내리 사랑이라고 나이가 어릴수록 더 사랑하지 않습니까? 큰자식보다는 막내를 더 사랑하지 않습니까? 야곱도 그래서 막내인 요셉을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아담과 이브가 아벨을 더 사랑했기에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 장 23 절에서 24 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는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부모가 아벨만을 더 사랑하는 것 같자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곡식으로 제물을 드릴 때 동생 아벨을 증오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제물을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아프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물만 드린다고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자 바로 동생을 죽여 버린데서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아벨을 사랑했으면 약간 서운하게 여기고 말았을 것인데 평소 미워하는 마음이 그 제사사건으로 인하여 폭발하여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려야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요인으로는 가인은 평소에 선을 행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4 장 7 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은 선을 행치 아니하고 생활은 개판으로 하면서 때가 되어 예배만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아 주실까요?“ 어떤 사장이 노조는 박살을 내고 사원들을 마치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래서 기름을 짜듯 짜서 자기만 돈을 많이 받아 헌금을 거하게 낸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예물을 기뻐 받으실까요? 야고보서 5 장에 보면 4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를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평소의 삶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삶일 때 하나님은 기뻐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였고 평소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부모를 에덴동산에서 쫓겨 낸 하나님에 대한 원망어린 마음들이 뒤섞여 있다가 하나님께 종교적인 관습과 습관으로 예배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그런 정성 는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요한일서 3 장 12 절에 있는 성경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은 제사를 드릴 때 상당히 하나님 보시기에 질이 떨어지는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습니다. 가인이 만일 하나님께서 제사를 안 받으셨을 때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아벨이 드린 제사를 왜 받으셨을까? 연구하여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고치고 자신이 곡식을 드릴 때 첫 곡식단 중에서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성별하여 드리고 동생과도 사이좋게 지내며 평소의 바른 행실을 하면서 그 다음에 예배를 드렸다면 하나님은 무척 기쁘게 예배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인에게서 반면교사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둘째 연구의 아이템입니다. 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을까?  

1. 오늘 본문에 보면 아벨은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목축업을 했는데 양이 낳은 새끼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새끼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구약의 전통은 처음 열매가 가장 좋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처음으로 성별하여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독히 처음 것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경제학에 보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 물건을 사면 그 물건에 대해 값어치는 참 큽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서 부터는 그것에 대한 마음 속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는 것입니다. 첨 것이 바로 큰 가치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처음 것을 성별하여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인간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이 탐나서가 아니라 그 가장 좋은 것을 드리려는 그 마음이 예뻐서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아벨은 처음 것을 정성스럽게 골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또 하나의 이유가 히브리서 11 장 4 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더 나은 제사일까요? 사실 인간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드리는 제사는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을 낫고 덜 낫고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안에는 더 나은 제사도 있고 더 못한 제사가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와 더 못한 제사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4 장 23 절과 24 절에 그 기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란 뜻은 “신령”은 영혼의 차원을 말하고 “진정”이란 마음의 차원을 말하는데 신령과 진정으로란 말은 “온 영혼과 마음을 기울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란 뜻이 아닙니다. 그저 “대충대충, 대강 적당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기울여 드린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가인은 제사를 드릴 때 이 제사를 빨리 빨리 끝내고 가서 집에 가서 담궈 놓았던 양고기 뒷다리 안주에다가 포도주 한잔하자는 생각에 그저 부모가 제사를 안 드리면 싫어하시니까 드리긴 드려야 하겠고 해서 얼른 대강 해치우자는 생각에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으므로 열납되지 않았으나 아벨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고 양의 첫 새끼를 골라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시냇물에 가서 양의 몸을 정갈하게 씻고 제사에 쓸 칼도 닦아서 정성껏 준비하였고 막상 제물을 드릴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부족하지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즉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열납하신 것입니다.  

결론 : 지혜있는 인간은 시행착오를 통해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고 배우고 시행성공을 통해서는 아, 성공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즉 어떤 경우에서라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만드신 것은 영광받으실라고 만드셨는데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압축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오늘 우리로 하면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4 장에서 교훈을 얻은 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가인이 드리는 제사의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을 없애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아벨이 드리는 예배를 더욱 본받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예배에는 여러 예식이 있습니다. 성찬식도 있고 찬양도 있으며 기도와 봉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가장 핵심은 드리는 일에 있습니다. 최초의 제사 역시 드리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배를 드림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 장 1 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다른 무엇을 바치기 전에 “하나님 저희 자신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을 받으시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통째로 드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그것이야말로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받으시고 난 다음에 우리라는 존재는 영영 없어지는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여 다시금 되돌겨 주십니다. 이것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자. 저희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저희는 마땅히 주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저희는 가끔 저희 존재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주님 저희가 가인에게서 배우게 하시고 교훈을 얻게 하시어 좀더 나은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벨과 같이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치는 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저희가 저희의 가진 것, 저희에게 은사로 주어진 것, 저희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봉헌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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