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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관리자 2010-12-20 (월) 10:39 13년전 1974  

2003 년 4 월 13 일(주일) 오전 8 시, 오전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로마서 5 장 6 절 - 8 절

말씀제목 :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할렐루야! 오늘은 고난주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아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책상 앞에서 손톱을 깎았습니다. 손톱을 깎고 난 다음에 고난주간 설교준비를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손톱을 깎은 부분을 보니 무척 적었습니다. “손톱만큼도”, “손톱만치도”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겠구나! 하는 적은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손톱만큼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 마당에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 전체를 다 주셨을까? 오늘 우리 시대는 점점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나를 위해 남을 도구로 사용한다든지 남을 나의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코너에 몰아넣고 남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무척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가운데 가장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어야 할 관계가 부부입니다만 부부사이에도 점점 인격과 인격의 마주침이 아니라 수단화, 도구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서출판 두란노가 발간한 <향기있는 사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한 주부가 남편을 팔겠다는 이색 신문광고를 낸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주말이 되면 남편은 아내보다는 사냥이나 골프를 즐겼기 때문에 불만에 차 있던 아내가 이런 엉뚱한 광고를 냈던 것입니다. 광고의 문안은 이러했습니다. ”남편을 염가에 양도함. 사냥도구와 골프채 및 개 한 마리는 덤으로 드림“ 광고를 내니 흥미를 가진 여성들이 60여통 전화가 왔는데 남편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고 남편은 필요 없고 개만 줄 수 없느냐?의 문의를 해왔다”고 합니다. 한 초등학교의 반장이 큰 병에 들었습니다. 반원들이 부반장에게 문병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반장이 하는 말. 내가 왜 그앨 문병가니? 걔가 없으면 내가 반장될 텐데!!. 가르친다 가르친다 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이 점점 경쟁에 재빠른 아이들만 양산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이리만 만들어 내지 서로를 위해 주는 아이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원고작업을 할 일이 있어서 pc 방에서 작업을 하는데 옆에 있는 청년이 어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게임은 기관단총으로 무장을 한 사람이 건물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서 적을 섬멸하는 게임인데 총을 쏘면 총을 맞은 이에게서 피가 사방으로 범벅이 되어 튀겨져 나가고 있었고 그것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반장이 없어야 내가 부반장이 된다는 아이나 남편을 염가에 팔겠다는 주부나 총을 쏘아 피가 뒤범벅이 되는 것을 보고 무척 즐거워하는 청년 이들은 어떤 별종 인간이 아니라 오늘 우리시대 바로 옆에 있는 보통 사람들이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보통 생각들에 의해 우리 문화는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내가 총을 쏘고 남이 죽고 피흘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가학적 문화, 늑대와 이리들의 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지옥의 아수라로 내려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5 장 6 절에서 8 절에 보면 비록 3 절에 불과하지만 “죽는”이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6 절에 보면 “죽으셨습니다“는 말이 나옵니다. 7 절에는 ”죽는”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8 절에 보면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고, 또 한 번 그래서 죽는다는 말이 도합 네 번 나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죽음들은 그냥 늙고 병들어 자연의 수명을 다하여 죽는 죽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한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제가 있는 죽음입니다. 6 절의 “죽으셨도다” 바로 살짝 앞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란 말이 나오고, 7 절 전반절에도 죽음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후반절에 보면 죽음은 “착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죽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은 뭔가를 위하여 죽는 죽음을 말합니다. 8 절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죽음이란 뭔가 목적이 있는 죽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는다는 것이 쉽습니까? 그저 죽는 것이 아닌 뭔가를 위해 죽는다면 그 뭔가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천하보다 더 귀한 자신의 생명을 교환가치로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생명은 딱 하나밖에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무엇인가를 위해 바치는 것은 이는 초월적이고 신비하고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 5 장 7 절은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고 하였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 죽는 자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쉽지 않다! 어렵다 그 말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옳은 사람을 위해 죽는 자가 있고 선인을 위해 용감히 죽는 자가 있었을지 모릅니다만 오늘날에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옳은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래 너 잘났다>, <니 팔뚝 굵다> 하고 그 옳은 사람을 왕따시키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오늘날 맑고 청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옳은 사람이 있다면 시기하고 온갖 비난의 돌멩이를 던져 깍아 내리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의인을 모해하고 의인을 소외시키고 옳은 사람을 박해하는 경우는 많지만 옳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저 옳은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 착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을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착한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참으로 안됐군!” 혀를 차는 사람은 있겠지만 착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착하다“란 말과 ”바보같다"는 말을 동의어로 씁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두 희귀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신문에 대서특필됩니다. 우리말에 “남 좋은 일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가시가 담겨 있습니다. 남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남 좋은 일만 한다는 이 말 속에는 남 좋은 일을 하면 뭔가 좋지 않은 것이라는 가치평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하면 바보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이 남을 위해 선을 행하면 저 사람 뭔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저래! 다음 선거에 출마할 모양이네! 하면서 선한 사람의 그 선한 의도를 평가절하합니다.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겠다고 용감하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이들이란 거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용감히 죽는 이를 찾아내는 것은 한강에 바늘을 빠뜨려 놓고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옳은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닌 죄인을 위하여 경건치 않은 이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보아도 죄인을 위하여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나 의인을 위하여 대신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거의 제로인데 누가 죄인을 위하여 죽겠습니까? 죄인이라 낙인이 찍히면 그 죄인을 정죄하고 그 죄인을 따돌리고 자신도 죄인이면서도 그 죄인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그 죄인을 처단하려고 하지 그 죄인을 위하여 누가 대신 죽으려 하겠습니까? 인류의 긴 역사를 훑어보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나 옳은 사람을 위하여도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반 보통 사람들에게서도 무엇을 희생하려 하거나 헌신하려 하지 않습니다. 밑지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손톱만치도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뭔가 남의 것을 더 차지하려 하지 나의 것을 흔쾌히 더 내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무래도 일반적인 보통사람입니다. 더더군다나 의인을 위해서 선인을 위해서 하지 않은 희생을 누가 죄인을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의인도 아닌 선인도 아닌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분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 5 장 6 절에서 8 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6 절과 8 절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고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언하십니다. 죄인이 누구입니까? 첫째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8 절에 있는 그대로를 보면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우리는 죄많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로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성경 로마서 3 장 23 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3 장 10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하시자 모두가 나이가 든 사람부터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 그 자리에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죄 없어서 죄인인 그 여자를 정죄할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죄가 있고 없음도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이라 하였습니다만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하자면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죽으셨는데 바로 우리 속에 포함된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타임머쉰을 타고 유대인들이 여인을 치려고 하는 현장,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들보다도 더 앞서서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 역시 피와 같이 붉은 죄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성경말씀대로 살라고 권면하면서 수없이; 설교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더 많은 죄인입니다. 제가 목사이자만 저는 제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엉망진창이요 앞뒤틀린 헝클어진 모순투성이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피와 같이 붉은 죄 없는 이가 없네”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성철 종정이 마지막 가기 전에 그런 법어를 남겼다고 합니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 그 죄업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리 /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 위에 걸려 있다“. 한 평생 사람만 속였겠습니까? 우리 인생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아 상처입게 한 일은 얼마였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간경화에 걸렸습니다. 언젠가 문병을 갔는데 자신이 그동안 마신 술병을 다 합쳐 보자면 목포 유달산만큼 쌓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한 평생 우리가 사람에게 지은 잘못이나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쌓아 놓는다면 어찌 유달산이나 월출산이나 무등산만큼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죄인인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나를 위하여 물과 피를 흘리셨고 나를 위하여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나를 위하여 살을 찢기우시고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5 대 제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속죄제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죄를 지은 인간은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바라지 않으셔서 인간이 속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죄제사입니다. 속죄제사는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속죄하는 제물을 드림으로써 그 제물을 받으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값을 치르고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제가 친구한테 약속을 했는데 약속한 그 시간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한테 전화를 합니다. 미안하다! 용서해 주라! 그러자 친구가 말합니다. 맨 입으로? 아니! 다음에 만나면 한번 니가 좋아하는 킹 크랩 사줄께! 그러면 친구가 말하기를 니가 사주는 킹 크랩 크기를 보고 용서해줄지 여부를 결정하겠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친구한테 잘못을 용서받을 때도 뭔가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하면 속죄받기 위해 인간이 값을 치루도록 하였습니다. 속죄제사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제물인 양을 성소에 가지고 옵니다. 제사장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그 양에 손을 얹고 안수하게 하며 기도합니다. 안수를 할 때 그 사람의 죄가 짐승에게 옮기워 지게 됩니다. 안수하고 난 뒤 그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 제단 위에서 불로 살라 드립니다. 그 향기를 받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십니다. 양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대속하는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00 년 전에 쓰여진 책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어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 장 4 절에서 7 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스스로 속죄양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짐승을 바쳐야 용서받던 것이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죄를 고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상에서 이미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의인도 선인도 아닌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까? 오늘성경 본문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8 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우리 문화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을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 속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이렇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사랑하면 보이게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더라도 감싸주게 됩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면 아무리 피와 같이 붉은 죄라할지라도 용서하게 되고 감싸주게 되고 용서해 주게 됩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하여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그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여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매맞은 자로 여기며 조용히 자신을 숨겨서 살아왔습니다. 일거리도 없지 그렇다고 공부도 하는 것도 아니지 차도 없지 친구도 없지 정말 고독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유일한 친구가 바로 담배였습니다. 그래 그 친구가 있는 곳에 찾아가서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할 텐데 다섯 가지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첫째, 지금 있는 숙소는 비싸니 지금보다 더 싼 곳으로 옮기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공부할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남자를 구하여 시집가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딱 한 가지 줄담배를 끊으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들이 눈에 보이면 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어 마침내 숙소를 정확하게 비용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어 미국 버클리대학을 창설한 분이 세운 신학교 미국 서부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장학금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든든한 일자리도 주셨습니다. 다섯 가지 기도제목 중에 몇 달이 되지 않아 네 가지가 이루어진 어느 날 그 친구는 나에게 무척 기분이 좋아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일이 나에게 연달아 일어나지!”.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말하자 그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에 그 눈물이 옷깃을 타내려가 적셨습니다. 1800 년대 가장 뜨거운 사랑을 했던 이들이 바로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이었습니다. 당시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여섯 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시를 썼는데 그 시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헤아려 보죠. 비록 그 빛 안보여도 존재의 끝과 영원한 영광에 내 영혼에 이를 수 있는 그 도달할 수 있는 곳 까지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칭찬에 돌아서듯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옛 슬픔에 쏟던 정열로써 사랑하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떠난 성인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잃는 줄로만 여겼던 사랑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의 부름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합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는 주의 부름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합니다로 그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의 극치입니다만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합니다. “죽어서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으셨고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경건치도 않고 죄인인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 장 13 절). 예수님은 이보다도 더한 사랑으로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그저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여러분을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게 하시고 살을 찢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시고 죽게 하신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선인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고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는데 저희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저희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 간직하며 언제까지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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