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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3 대 특징!!

관리자 2010-07-17 (토) 20:21 13년전 2566  
 

2006 년 7 월 30 일(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시편 107 편 4 절 - 9 절

제    목 : 영혼의 3 대 특징!!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성전에 나온 성도 여러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시편 107 편 9 절에 집중하여 보겠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9 절을 보면 “영혼”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영혼이 무엇일까요? 이 시간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우선 눈, 코, 귀, 입, 머리, 손, 발이 있는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1895 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여 인류가 인체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후 1970 년대 CT (컴퓨터단층촬영)의 등장으로 몸 속 내부를 칼을 대지 않고도 몸의 횡단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자기공명영상이라는 MRI(자기공명영상)가 개발되어 CT보다 더 정밀한 이미지로 3차원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최근에는 인체의 내부를 해부하여 실물을 있는 그대로 움직임까지 총천연색으로 볼 수 있는 초정밀영상의 PET-MRI 라는 장비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가천의대 교수팀이 개발하였는데 앞으로 이것을 실용화할 경우 인체 내부의 뇌, 근육, 뼈, 심장, 부위 등에 생긴 모든 조직을 마치 바로 앞에 있는 실물을 보듯이 총천연색으로 보아 암도 초기에서부터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 속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속에 분명히 어디엔가 존재하는데 초정밀영상의 PET-MRI 장비로 본다 하더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 안에 깃들여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우리 몸속에 어떤 질량과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으나 마음은 아주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부단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여러분 속에 있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몸도 따라 움직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 마음을 찍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은 그 안에 속이 있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속은 너무도 깊어 열길 백길 물속은 알아도 이 마음의 속은 깊어서 다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은 마치 우리 육체 안에 자리 잡은 깊은 곳 어디에 있는 하나의 형체는 없는 방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방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방 안에 들어가면 또 그 안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또 하나의 신비한 방이 있습니다. 마치 성전을 이루는 부분이 성전의 바깥뜰, 성전 안, 성전 안의 지성소가 있듯이 우리 존재도 육체, 마음에 이어 지성소라 할 수 있는 영혼의 방이 있습니다. 이를 혹자는 마음의 마음, 마음속의 마음, 마음 가운데 있는 마음이라 하며 한마디로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이 영혼이 있음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인간 속 에다가 마음을 만드시고 그 마음 속 존재의 더 깊은 속에다가 영혼을 만드시어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다시금 성경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편 107 편 9 절에 나온 영혼은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모하는 영혼”이고 또 하나는 “주린 영혼”입니다. 사모한다 하였을 때 뭔가 간절히 그리워하고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굶주려 있을 때는 배를 채우고자 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할 때 나오는 “만족”이 무엇입니까? 바로 107 편 9 절 뒤편에 있습니다. ”채워주심이로다”. 만족은 채워질 때 만족합니다. 만족이라고 했을 때 <滿>은 찰 만입니다. 사람들은 채워질 때 만족해하며 만족할 때 행복해 합니다. 여기서 영혼이란 어떤 채워져서 만족한 영혼이 있고 비워져 있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만족하지 못한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영혼은 무엇인가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채워져서 만족하기도 하고 채워지지 않아 사모하거나 굶주리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꼭 우리 몸 안에 있는 위장과도 같습니다. 우리 위장이 비어 있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은 그래서 배고파 환장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위장에다가 뭔가 채우려 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무엇인가 빨아드리려 하고 무엇인가 채우려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육체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 만드셨고 특별히 영혼을 만들 때 그 영혼에다 갈망과 사모를 주시어 무엇인가 채우려 하고 채우기 위하여 부단히 어떤 운동을 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생들에게는 뭔가 갈망이 있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인생들은 뭔가 공허하기 때문에 뭔가 외롭기 때문에 뭔가 허전하기 때문에 채우려 하고 만족하기를 원합니다. 그 허전함, 그 공허함, 그 외로움을 채우려고 뭔가 부단히 활동을 하고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붇습니다.


자신 속에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어떤 마음속의 목마름과 배고픔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 만족을 추구하는 향상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빈 공간이 채우려는 운동성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뭔가 채우려 하는데 왜 채우려 하는지 그 본질을 모르는 채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 속에 있는 잠재해 있는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채우려 하다가 뭔가 채워지지 않을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그 알 수도 없는 그 욕망의 공간을 채우려다가 도를 넘어 쇠사슬을 차기도 하고 사형수가 되어 이슬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는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의 빈 자루를 채우려다가 결국 채우지 못한 채 도리어 공허감이 키운 채 좌절감으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끊습니다. 많은 이들이 도대체 왜 나는 무엇인가로 채우려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왜 채우려 하는지 모르는 채 안타깝게도 아쉬움을 남기고 채우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저렇게 애쓰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채우려 하는 것은 우리 육체를 넘어 우리 마음을 넘어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혼의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이것으로 채우고 저것으로 채우고 요것으로 채우려 해도 그 영혼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속에 있는 자신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사바세계에 있는 이렇고 저런 것들로 그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혼은 채워지지 않고 만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떤 것들로 채우면 채울수록 마치 바닷물을 마신 사람이 더욱 환장하게 물을 찾듯이 더욱 목마를 뿐이며 더욱 배고플 뿐입니다. 사람들은 돈으로 예금통장으로 황금과 보석으로 채우려 합니다. 동산으로 채우려 하고 부동산으로 채우려 합니다. 무슨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그 최신상품으로 사서 만족함을 누리려 합니다만 여전히 인생은 빈 술잔과 같아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알 수 없는 형태의 목마름이 지속됩니다. 세상의 부귀와 물질과 명예로 채우려 하고 만족함을 얻으려 하지만 그렇게 힘쓰고 애씀에 비해서 미안스럽게도 영혼은 더욱 공허함만 느낍니다. 더욱 갈증만 나지 만족함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자루를 각종 인간관계들로 채우려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을 만나고 이 스승을 만나고 저 스승을 만나고 이 친구를 만나고 저 친구를 만남을 통해서 어떤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오히려 느끼는 것은 만족함이 아닙니다.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고 풍요속의 빈곤을 느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속에 있는 이 알 수 없는 근원적인 목마름을 정보와 지식과 기술로 채우려 합니다. 이런 사상을 취하고 저런 사상을 취하며 이런 지식을 탐닉하고 저런 철학에 탐닉하면서 그 빈 자루를 채우려 합니다만 미안스럽게도 그 자루는 채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빈 자루가 더욱 비어 있음을 확인할 뿐입니다.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한 철학자의 자살을 다룬 다큐멘타리성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 철학자는 자신의 목숨을 끊기 전에 자신에게 묻고 자책을 합니다. 내가 일생에 진리라고 생각하고 추구했던 것들이 단 한순간의 다른 사상이 점령해 버려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동안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붙잡아왔던 것이 또 단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생을 바람을 잡으려하는 무가치한 노력만 기울여 왔지 않으냐 내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냐 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자신을 질책을 하면서 숲이 우거진 곳을 통과하는 어느 시점에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그 역시 사상과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로 채우려다가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한 좌절감으로 목숨을 스스로 앗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 자루를 쾌락과 정욕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 남자를 만나고 저 여자를 만나서 진한 육욕의 잔치를 벌임으로서 채우려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안되니까 남자가 남자를 만나고 여자가 여자를 만나 쾌락을 탐닉하고 부부를 서로 바꾸어 스와핑 잔치를 벌여 몸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역시 더 큰 빈 공간만을 발견할 뿐입니다. 코카인을 흡입하고 히로뽕을 흡입하고 대마초를 피우고 이 위스키를 마시고 저 코냑을 들이키지만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 오히려 더 깊은 갈증만 생기게 합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육체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채우려 하지만 더욱 애달음과 안타까움만 있게 됩니다. 70 년대 유행한 가사 중에 있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이 노래는 단지 노래일 뿐이지만 이 노래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허전함과 공허함이 담겨 있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보아도 어떤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채우려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그토록 채우려 했던 자신의 노력이 비참할 만큼 여전히 욕망의 항아리는 밑바닥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이 빈 공간을 무엇이 되는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보고 더 힘이 있는 자리를 올라가려고 애를 써서 결국 원하는 자리에 올라섰어도 그 자루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얘기를 혹 아십니까? <동물 나라 한 연못가에 입 큰 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자신의 입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가를 헤엄치고 있던 입 큰 개구리는 새로운 목욕탕이 연못가에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목욕탕에 걸려진 안내판에는 “입이 작은 동물은 입이 큰 동물의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안내판을 읽은 입 큰 개구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위풍당당하게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누가 내 등을 밀어 주려나” 하고 탕 안을 둘러보던 입 큰 개구리를 저 편의 다른 개구리가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입 큰 개구리보다 입이 훨씬 컸던 것입니다. 열심히 그 개구리의 등을 밀고 나온 입 큰 개구리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결국 입을 더 크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성형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이 개구리는 의기양양하게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목욕탕 안에는 하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 큰 개구리는 다시 하마의 등을 밀어야만 했습니다. 이 개구리는 또 한 번의 결심을 하고는 입을 더 크게 수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연의 미소를 띄우며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탕 안에 들어서자마자 땅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악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개구리는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갔고 의사는 개구리에게 입을 더 이상 크게 한다면 단 하루밖에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꼭 다른 동물에게 등을 밀도록 해야겠다는 허세로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입이 크다는 허세를 가지고 다시 목욕탕을 신바람 나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도착한 개구리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문에는 “금일 휴업”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전도서 5 장 10 절은 말합니다. “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오늘 성경 본문은 뭐라 하였습니까?  시편 107 편 4 절과 5 절입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빈 자루를 아무리 채우려고 하여도 광야 사막길에서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할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이 자루를 채우려 하지만 채우면 채울수록 만족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만 피곤할 뿐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아무리 인생이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영혼 속에 아무리 이것 저것으로 채워야 영혼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채워질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혼의 세 번째 결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왜 채워지지 않을까요? 왜 만족함이 없을까요? 영혼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비로소 만족함이 있습니다. 애시당초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혼을 만들어 놓으셨을 때 그 영혼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방을 인간 내부에 조성해 놓으셨고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쓰여지도록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형태로 만드셨는데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고 세상의 그 모든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직 딱 한 가지!! 그 영혼의 빈 공간은 인간이 하나님으로 채울 때 가득 차게 되고 만족함을 얻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107 편 9 절에 보겠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그렇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사모할 때 하나님으로 채울 때 비로소 인생 안에 있는 영혼은 비로소 채워지게 되며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그 만족이 있을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다 영혼을 만드셨을 때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도록 오직 하나님을 초청하고 모실 때 비로소 만족함과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인생의 핵심을 꽉 잡고 흔들면서 살아야 합니다. 뭣도 모른 채 그저 자벌레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모르는 채 기어가서는 안됩니다. 인생의 핵심이 도대체 어디있는지 주제를 파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뭐냐? 우리 인생을 이루고 있는 요소가 육체, 마음, 마음 속의 마음, 영혼이 있습니다만 우리 영혼의 중심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거기 인생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아하 그렇구나!, 아하 인생이 그런거구나~!” 깨우침을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알 때 인생의 행복과 만족의 수수께끼가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코드를 깨우치지 못한 인생들은 이리 풍덩 저리 풍덩 빠지면서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르는채 그저 그렇게 살다가 한 많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인생의 만족에 이르는 이 신비한 코드를 풀어야 하고 깨우쳐야 합니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깨우쳐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깊고 영적인 깊은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이 이것을 깨우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인생의 만족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고린도후서 3 장 5 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그야말로 인생의 핵심의 정곡을 찔러 버린 것입니다. 인생 주변에 있는 기타 등등이 인생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며 이 땅에 있는 여타 잡다한 것들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 생의 참 만족과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의 최대의 교부가 되었던 어거스틴은 수없이 방황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빈 공간을 실로 여러 가지로 채워보려 하였습니다. 마니교라는 종교철학사상으로 채워보려 하였습니다만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철학 저 종교 요 사상으로 돌아다녀 보았습니다만 허전한 가슴은 더욱 크게 되었습니다. 술과 여자로 채워보려고 하였습니다만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오, 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의 맘은 쉼이 없나이다.” (고백록 1권, 1장). 4>.


침례교 전도지가 짧은 말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돈? 그러나 당신의 욕망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친구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외로울 것입니다. 성공? 그러나 당신은 그것 역시 믿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값진 것을 가져도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당신을 만족시킬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하여 당신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흥회 때 성도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가 바로 “동남풍”입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언젠가 서울에 그 조각상이 와서 전시회를 하였을 때 그것을 보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한 남자가 자신의 신체를 알몸으로 드러낸 채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듯 생각하는 조각상입니다. 그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 지옥 편에 나오는 것인데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상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아래에는 '지옥 문 앞에서'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죽기 전에 턱을 고이고 우리 인생이 무엇이며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뭔가 채우려고 하고 뭔가 만족하려 하는 내 삶이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그 목적에 부합하고 있는가? 내 인생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채우려 하는 것들이 진정 채워야 할 것이며 그것으로 내가 만족하고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턱을 고이고 생각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 마감하는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턱을 고이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영혼 속에 은총의 하나님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세상 다른 여타의 것으로 기타 등등의 것들로 채우려고 해도 결국 다시 사막이요 다시 목마름이요 다시 갈증이요 다시 빈 술잔이요 공허함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경험한 얘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이 빠졌더군요? 설교제목 좀 알려주십시오! 그렇습니까? 제목은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입니다. 그러자 주보사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평소에 설교제목을 길게 쓰시던 목사님이기 때문에 한 번 더 인쇄소 직원은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목사님이 약간 늦게 도착하셔서 어제 준비한 설교를 하기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내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딘가에 큰 충격을 받으신 것처럼 목사님은 그 제목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내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들이 영혼의 한 가운데 목자되신 주님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신앙을 고백하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은총의 주님을 여러분 영혼 중심 속에 모셔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들에게 성경의 깊은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은총의 주님! 저희 영혼을 주님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저희가 세상의 헛된 것으로 채우지 않게 해 주시옵시고 주님 저희 영혼을 주님으로 채워주시옵시고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주시옵시고 주님의 거룩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그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저희로 주님의 품 안에 있기 까지 진정한 평안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의 삶이 저희의 영혼이 저희의 삶의 모든 시간이 은총의 주님 안에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5:06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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