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주는 여신도!! > 상임이사칼럼new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기쁨을 주는 여신도!!

관리자 2010-07-17 (토) 20:34 13년전 2340  
 

2006 년 1 월 15 일 오전 8 시 여신도주일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서본문 : 빌레몬 1 장 4 절 - 7 절  

제       목 : 기쁨을 주는 여신도!!


할렐루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과 평강이 오늘 교단이 정한 여신도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여신도들과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빌레몬서 1 장입니다. 빌레몬은 한 남신도 이름입니다. 여신도주일에 여신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남신도 빌레몬으로부터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서 오늘 본문을 택하였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레몬 성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이 누구일까요?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에 있는 한 도시인 골로새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은 주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부터는 전적으로 헌신하였고 그리스도의 빛을 환히 비추인 믿음의 횃불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반면에 예수를 믿은 지 며칠 안 되었어도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려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빌레몬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서 1 장 2 절을 보겠습니다.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이 자신의 집을 교회의 처소로 쓰도록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 성도는 자신의 집만 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남다른 무엇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서 1 장 4 절에서 7 절은 사도 바울이 집중적으로 빌레몬을 칭찬한 대목입니다. 4 절을 보겠습니다. “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만을 기도하지 아니하고 중보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는데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을 빼놓지 않고 기도하였고 빌레몬을 위하여 기도할 때 마다 절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말입니다. 빌레몬의 무엇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까? 첫 번째는 5 절입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을 들음이요”. 빌레몬은 주 예수님을 믿고 뜨겁게 사랑하였고 바로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주 예수님만 사랑하고 그 사랑이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빌레몬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빌레몬이 칭찬받은 두 번째는 6 절입니다.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이는 빌레몬 성도가 성도들 간의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통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잘 알게 하였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향한 세 번 째 칭찬이 바로 7 절에 있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도다”. 이 말씀은 특별한 칭찬입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빌레몬 성도로 말미암아 평안함도 얻고 빌레몬 성도로 말미암아 기쁨도 얻고 빌레몬 성도로 말미암아 위로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한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 성도들을 만납니다. 어떤 성도는 그저 만나기만 하면 기쁨입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런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그 얼굴만 보아도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평안함을 얻게 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성도를 찾아가기만 하면 조용한 안식과 위로를 받게 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달란트가 있어서 어떤 성도에게는 기쁨을 얻고 또 어떤 성도는 평안을 얻고 또 어떤 성도에게는 위로를 얻지만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동시에 한꺼번에 얻었다 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기쁨을 얻고 누구에겐가 평안을 얻고 누구에겐가 위로를 얻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누군가가 평안을 얻고 나로 말미암아 누군가 기쁨을 얻고 나로 말미암아 누군가 위로를 얻는 것이 더 좋습니까? 훨씬 내가 존재하고 있어 누구에겐가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내가 얻는 것보다 30 배 60 배 100 배 더 훨씬 좋습니다. 빌레몬 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위로의 은사, 평안을 끼치는 은사, 기쁨을 주는 은사를 받아 많은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도 바울의 칭찬을 받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때 자신의 이름도 성경에 기록되어 온 세상의 성도들에게 읽혀지게 되었으니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빌레몬은 얼마나 이것이 큰 광영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칭찬을 하고 난 후에 빌레몬 성도에게 부탁을 합니다. 보통 사도들이나 교역자들이 성도들에게 어떤 특별한 부탁을 할 때에는 그만큼 신뢰를 하고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들어줄 줄로 알고 믿고 부탁을 합니다. 빌레몬에게 어떤 부탁을 합니까?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어느 날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탈취하여 야반도주하였습니다. 도주를 하여 간 곳이 바로 로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그 예전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주인 빌레몬을 자주 만났을  때부터 분명 잘 알았을 터여서 문득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음을 알고 문안을 갔고 거기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다 고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감화시켜 그를 복음의 일꾼을 만들었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면서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오네시모를 보내니 그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서 받아드려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은 무척 가혹하였습니다. 만일 노예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도망갔다면 그 노예를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 할 수도 있었고 사형을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단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빌레몬 성도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눈물로 받고 오네시모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받아드렸을 것이며 분명 다시금 사도 바울에게로 보내어 로마감옥에 있는 바울의 옥중 수발을 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장 20 절입니다. “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나는 너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고 하여 놓고 왜 편지 마지막에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안을 얻게 하라 하였을까요? 빌레몬서 1 장 7 절이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주었다고 칭찬했다면 빌레몬서 1 장 20 절은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나도 너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곳곳에 개척을 하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이제 믿음을 가진 성도들로부터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얻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빌레몬으로부터 그것을 부탁하였고 동시에 오네시모의 일도 잘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오늘 빌레몬의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영적인 교훈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 째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여신도들과 모든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부탁한 대로 바로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빌레몬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빌레몬은 존재해 있어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도 평안을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모든 여신도들에게 마찬가지로 모든 남신도들에게 권면하고 부탁드립니다. 존재해 있어 다른 존재에게 시련을 주거나 고통과 아픔을 주는 존재가 결코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 존재가 존재해 있어 다른 존재를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이 존재해야 할 존재입니까? 인생이 딱 한번 존재하는데 그런 존재양식으로 존재한다면 내 존재는 얼마나 비참하고 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존재해 있어 평안을 끼쳐 주는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평안을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누구에겐가 평안을 주는 존재가 되는 일은 보통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존재해 있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님의 평안을 끼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셔서 여러분이 입을 열어 말하는 한 마디의 말에도 평안이 담겨 있게 되고 여러분이 짓는 얼굴 표정이나 미소에도 평안을 느낄 수 있게 하시며 여러분의 사람과 열린 가슴에 안기고 싶을 정도의 평안이 여러분의 삶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두 번 째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여신도들과 모든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부탁한 대로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 부르면 위로를 받는 복음성가가 있는데 가사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이 질문은 참으로 우리 인생에게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위로를 경험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고 살아감도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간다 함은 얼마나 더 가치있는 일입니까? 저는 성도 여러분들이 위로하는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골로새 교회 많은 성도들은 빌레몬으로부터 사랑받음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주고 살면서도 상처를 많이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상처를 입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내가 상처당한 만큼 곱절도 상처를 주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고 실제적으로 상처를 주고 삽니다. 상처를 주면서 자신도 상처를 많이 입고 삽니다. 우리가 거리를 가면 사람들의 가슴을 보지 못하지만 좀 더 깊은 눈으로 부면 모두가 상처 때문에 가슴이 뚫려 있거나 상처 때문에 가슴이 멍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누구에게 위로를 얻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신도 여러분들과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이들은 존재할 때 누구에게인가 상처를 주는 존재양식이 아닌, 존재하고 있어 그 상처를 싸매어 주고 감싸주는 위로하는 존재로 존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받았던 상처가 아물어지게 되는 그런 위로의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오늘날과 같이 위로가 필요한 때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상처를 깊게 입었을 때 위로 받고 싶어서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고 싶을 때 여러분은 그 누군가의 가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 째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모든 여신도들과 모든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부탁한 대로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빌레몬 성도가 어떤 기쁨을 성도들에게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그러나 그 기쁨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맨이나 코메디언들이 주는 웃음이나 즐거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이미 복음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체험했고 알았습니다. 빌레몬 성도가 기쁨을 주었다기 보다는 보다 정확하게는 하늘의 기쁨을 전달한 전달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이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지니고 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많이 전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어 남에게 짜증을 내고 불평을 퍼뜨려서 다른 존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가 되어서 되겠습니까?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어느 날 기차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어 열차 식당에 들어갔더니 자리가 무척 비좁아 어떤 부부와 동석을 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계속해서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야채가 신선하지 않다고 불평하더니 그 다음에는 고기가 오래된 고기라고 투덜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는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럽게 좋지 않으냐고 하면서 괜히 여행을 떠나왔다고 남편을 향해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옆에 앉은 필 박사님에게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아내의 직업 때문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필 목사님은 그 여인의 직업이 무척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부인이 가지신 직업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대답하기를 “예, 제조업입니다” 필 목사님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무엇을 제조하는 직업입니까?” 남편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예, 제 아내는 불평 제조공장 사장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존재하고 있어 남에게 부담을 주고, 남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거나 남의 가슴에 못이나 박고 우리 인생이 존재하고 있어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하셨습니다. 남에게 한없는 눈물과 고통을 안겨주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그런 존재가 되어서 쓰겠습니까?


우덕현이라는 분이 좋은 시 한편을 썼는데 같이 감상해 보십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주어야지 /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 웃은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겐가 친근감을 주고 / 사랑을 받습니다 /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 먼저 찌뿌린 얼굴을 그렇게 거두고 / 웃는 얼굴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 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존재해 있어 기쁨을 나눠주면서 더욱 기뻐지는 그런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제 1 존재 양식은 “無害無益”의 양식입니다. 존재하여 남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고 존재하여 있어 남에게 이로움도 주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해 있어 다른 이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도 않고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저 존재해 있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재할 때 무엇인가 영향을 주고 살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양식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만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중에 가장 오래 사신 분이 바로 무두셀라 선조이십니다만 그 분에 대한 기록이 이렇습니다. 창세기 5 장 25 절에서 27 절입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에 칠백팔십 년을 지내고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살고 죽었더라”. 성경에 보면 므두셀라에 대한 기록은 이 기록밖에 없습니다. 그저 969 년 일천년을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도 않고 살아간 것입니다.


제 2 의 존재양식

은 존재하고 있어 부단히 자신의 존재 주변의 존재들에게 해로움을 주고 피해를 끼치고 다른 존재들의 눈에 눈물을 빼게 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부담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존재양식이 있습니다. 존재하여 있어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평안을 깨뜨리는 존재로서 가는데 마다 비참과 파괴를 남기고, 가는데 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존재해 있어서 남에게 가시가 되어 부단히 찔러대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존재해 있으면 마치 청정해역에 배가 파손되어 기름을 유출하여 온 바다를 오염시키듯이 존재해 있는 주변을 새까맣게 오염시키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가는데 마다 갈등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데마다 싸움이 벌어지는 그런 존재양식이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나타나면 조용히 그가 오기 전에 100 미터 전에 피해 버리는 그런 존재양식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인생이 바로 이 존재양식입니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살면서 부단히 이 땅에 생지옥으로 만들어 가는 존재양식입니다. 지옥공장 공장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딱 한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 그런 따위의 존재양식으로 존재해 있으면 되겠습니까?


제 3 의 존재양식

은 존재해 있어 부단히 자신이 존재하는 주변의 존재들에게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위로를 주면서 존재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존재해 있어 뭔가 희망을 주고 존재해 있어 뭔가 부단히 새로움을 줍니다. 존재해 있어 뭔가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해 줍니다. 존재해 있어 누구에겐가 평안을 줍니다. 존재해 있어 누구에겐가 보탬이 되고 유익이 됩니다. 존재해 있어 먹구름이 가려 있는 가운데서도 언뜻언뜻 푸른 하늘을 보여주는 희망의 존재입니다. 존재해 있어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주고 영혼을 따뜻하게 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가 존재해 있어 이 세상을 살아볼만한 값어치를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빌레몬은 존재해 있어 다른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이 땅에 사는 존재양식은 제 1 의 존재양식인 무해무익한 존재양식이란 거의 없다고 할 때 존재양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는 존재양식과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천국을 만들어가는 존재양식 둘이 존재합니다. 언젠가 저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생수가 담겨 있는 유리병 속에 하늘색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려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색은 떨어지자마자 물속에 퍼져 나가면서 자신의 고운 하늘색을 물 전체에 퍼져 나가게 만들면서 영롱한 창조 아름다운 확장을 일으키며 나가는 것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여신도주일에 여신도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여신도 여러분들은 존재해 있어 이 세상 속에서 하늘색으로 퍼져 나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재해 있어 감히 이 땅에 하늘을 만들어 가는 그런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픔과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위로함을 주는 존재, 싸움과 분쟁이 그칠 사이 없는 이 세상에 평안을 끼치는 존재, 참된 기쁨이 없는 이 세상에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여신도주일 여신도들과 저희 모두가 이 땅을 살면서 위로하는 존재, 평안을 주는 존재.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존재하면서 저희 존재 주변에 있는 존재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고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결코 되지 않게 하옵시고 저희들이 존재하고 있어 이 땅에 작은 천국을 만들어 가는 존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여신도들이 먼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맘에 합한 존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5:06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