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 세 존재양식 > 상임이사칼럼new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십자가 아래 세 존재양식

관리자 2010-07-20 (화) 22:24 13년전 2182  
 

2006 년 4 월 2 일(주일) 오전 8 시, 11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누가복음 23 장 26 절 - 43 절     

제       목 : 십자가 아래 세 존재양식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이고 그 주일로부터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에는 매일 아침 새벽 성전에 나아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장면을 영상과 함께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이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하루 한 끼 식 금식하시며 경건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일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 때 내 고통과 어떻게 연관을 맺느냐에 따라 주변사람들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삐비를 뽑으러 들로 논둑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솔찬히 많은 삐비를 뽑아가지고 한주먹이 되어 집에 거의 다 와가지고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아부지! 삐비를 많이 뽑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감고 걸어가면서 기도하였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약 1.5 미터 되는 논둑 옆 개골창으로 보기 좋게 한바퀴 굴러 빠져버렸습니다. 정신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삐비는 놓지 않고 주먹으로 꼭 쥐고 있었습니다. 논둑 위에는 나보다 약간 덩치가 좋은 동네 녀석이 나를 보고 “꼴좋다”는 듯이 웃고 앉아있었습니다. 올라가려고 손을 잡아 달라 하였더니 삐비를 주면 손을 잡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삐비를 주지 않았습니다. 저쪽으로 첨벙첨벙 걸어가서 올라왔습니다. 어린 맘에도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굴러 떨어져 있는데 도와주지는 않고 먼저 삐비를 달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만일 여러분이 제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신다면 눈과 눈 사이 콧등부분에 작은 상흔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칠량면 영동리 살던 집에서 차부로 나가는 곳에 기억자로 꺽여진 좀 넓은 마을길이 있습니다. 그 곳을 주무대로 하여 제가 골목대장을 했습니다. 한 꼬마가 대장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 이름은 개똥이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 아이를 개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개똥이만 빼놓고 메뚝으로 놀러 가자!”고 했을 때 개똥이가 화가 나서 그랬는지 제 이마빡에다 짱돌보다도 더 큰 독을 던졌는데 그것을 맞고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3 학년 때 칠량을 떠나서 원주로 갔다가 초등학교 5 학년 때 광주로 와서 방학 때 칠량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칠량을 가 보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있는 그때 그 개똥이를 만났습니다. 그 녀석은 날 보더니 아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단 한마디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한 때 추억을 안겨준 아이라 조금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여러분에게도 고통을 당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를 떠올려 보면 내 주변의 사람들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여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한 직접 당사자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냥 멀건이 지켜보고만 있거나 웃는 사람, 내 고통을 없애주는 대신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 상처를 더 덧나게 계속 찔러 대는 사람,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는 사람,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옆에 다가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주는 사람, 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당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 가지 인간 군상들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인간 군상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혹은 구경꾼이거나 십자가로부터 멀리 도피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누가복음 23 장 35 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는데.......”. 이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가 세워져서 왼 손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오른 손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두 발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와 땅을 검붉게 적시고 있는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미난 구경이 있다고 몰려나와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요한복음 19 장 20 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0 절에 보면 골고다 언덕이 예루살렘성에서 가까워서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현장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많은 유대인들이 불구경을 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을 그저 구경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주변에 나와 있는데 그저 구경만하고 지켜보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셨을까요? 십자가 구경만 한 인간군상들 보다도 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한 제자만 빼놓고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양육하였는데 막상 가장 고통당하였을 때는 싹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 잡히신 곳 가까이 왔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쳐 버렸고 아홉 제자들은 골고다 십자가 현장으로부터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한 이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삼년 동안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했던 제자들이 다 멀리 도망가고 없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 군상들은 예수님께서 모욕과 고통을 당하도록 십자가에 피 흘리시도록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작년인가 한신목회개발원에서 하는 세미나를 하였을 때 한 선배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개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말하기를 “배 목사, 목회하면서 너무 사랑하지 말아! 난 목회하였을 때 참으로 너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아픔을 많이 받았네! 참 가슴 많이 아프드라고! 이제는 괜찮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것이 좋아!” 그 말을 듣고 이내 잊어버렸습니다만 복음서에 예수님의 수난이 나타난 부분을 자세히 읽으면서 그 선배 목사님 말씀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도록 가장 직접적으로 역할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돈 30 냥에 팔았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도 재정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가장 심복 중에서 심복을 시킵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돈궤를 맡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3 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재정책임을 맡길 만큼 중용하였는데 결국 그는 예수님을 돈에 팔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척 사랑한 제자가 베드로입니다만 결정적일 때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유다는 돈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을 고난당하게 한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같은 선민 이스라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난당하게 한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이방인 로마제국 사람들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유대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룟 유다와 서로 짜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로 하고 칼과 몽치로 무장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6 장 47 절입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청탁을 넣은 것이 바로 로마에서 파송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사람을 죽일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결국 사형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청탁을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만일 유대의 파워엘리트들이 등을 돌릴 경우 유대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정치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기 위해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사형을 결재하였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심판정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사실상 결정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20 절에서 23 절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군중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일 빌라도가 누구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느냐? 물었을 때 군중들이 이 때 ”바라바, 바라바!“ 외치면서 바라바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는 살려 주소서! 하였더라면 본디오 빌라도는 그것을 핑계삼아 유대지도자들의 뜻과는 달리 예수님을 살려 주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일반 군중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사형결재로 인해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이들로부터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거의 반 죽도록 채찍을 가지고 때려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로마군대의 채찍은 그 채찍 끝부분에 납덩이와 뼈가루가 묻혀 있어 한번 씩 때릴 때마다 살점이 묻어 나오고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로마군병들이 골고다 언덕에 끌고 올라가 예수님을 십자가형틀에 묶어놓고 녹슨 못을 박았고 예수님의 비명소리에 아랑곳없이 피가 튀는데도 아랑곳없이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계실 때에 비웃고 조롱한 일입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도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옆에서 비웃고 조롱하는 일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한량없이 고통당하고 있는데 피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비웃고 조롱하는 일이야말로 그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왼편에 있는 강도도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39 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육체적인 고통이 극심한 가운데 비웃고 조롱함으로서 정신적인 고통까지도 꼭지점에 오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마지막 고통을 가한 이는 로마군병입니다.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예수님 옆구리를 찔러 확인사살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네 복음서를 살펴보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고통당하시게 한 데에는 그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 대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들, 산헤드린 의원들, 로마의 총독과 로마군병들, 관리들, 군중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합하여 예수님을 고통당하게 하였고 십자가에 매달아 피 흘리게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인간 군상들은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일이나마 함께 당하고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마음으로라도 위로해 준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시고 있었을 때 예수님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울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 누가복음 23 장 27 절에 보겠습니다. “또 백성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 지라”.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며 여인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후하여 남자들이 운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난 후에 베드로가 통곡한 것 외에 없지만 여자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가슴을 치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골고다 언덕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주변에는 그렇데 많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준 이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26 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원래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는데 아마 로마군병들 중 호송책임지가 분명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가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여 군중들 중에 하나를 뽑아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한 것입니다. 이 로마군병 호송책임자는 위에서 명령을 하였으므로 그 일을 수행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준 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구레네 시몬입니다.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해 준 이입니다. 또 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 누가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었습니까? 고통 당할 때 누군가 옆에 있어준 것만해도 위로가 됩니다. 제자 요한이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예수님 제자들 중에 단 한 제자만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예수님 십자가 현장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습니다. 누가 또 예수님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었습니까? 누가복음 23 장 40 절에서 42 절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오른쪽 강도는 예수님께 제대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보응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옳으신 일이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칭송하고 따르는 이를 발견하고 십자가 상에서였지만 무척 위로를 받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의 존재와 행동양식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실존양식은 십자무관형입니다. 십자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다시금 두 가지 형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을 아예 믿지도 않고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가 떡을 먹여줘! 밥을 먹여줘! 예수와 상관없이 삽니다. 십자가의 뜻에 대해서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가 있을 때 구경할 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축복을 해주고 기적과 치유를 하실 때는 구름떼 같이 몰려들다가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예수님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할 때면 멀리멀리 도망 가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십자무관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교인이면서도 십자무관형이 많습니다.


두 번째 실존 양식은 십자원수형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형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고소하고 예수님을 잡아넣고 예수님을 거짓증거하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고 예수님을 옷벗기우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고 예수님의 발에 못을 박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찌르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예수님의 맘을 아프게 하고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우리는 십자원수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따라다녔으면서도 십자원수형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라고 하면서도 세상 가운데 죄를 맘껏 범하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는 십자원수형도 참으로 많습니다.


세 번 째 실존양식은 십자사랑형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면서 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의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사랑형은 예수님이 골고다언덕을 올라가실 때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조금이라도 감해 주려고 신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오른쪽 강도와 같이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이 옳으시다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형입니다. 요한과 같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시 달리지 않도록 늘 죄를 회개하고 정결하게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약 2000 년 전의 어간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죄를 짓고 우리가 악을 행할 때 여전히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십자무관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십자무관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죄악을 지으면서 행하면서 십자원수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십자사랑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형으로 사시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십자사랑형인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태복음 48 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중 한 사람이 누구인 줄 모릅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이 사람도 예수님이 고통당하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를 부어서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면이란 바다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물을 많이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포도주는 당시 마취제와 같이 쓰여졌습니다. 성경에 나온 그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의 고통이 너무도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 십자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긴 막가지를 준비하고 해면을 끝에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실로 묶어서 거기에다가 마취제인 신포도주를 철철 넘치게 부어서 십자가 밑으로 가서 막가지를 올리고 예수님 입에 가까이 대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물론 신포도주를 많이 마신다고 해도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많이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천분지 일이나마 만분지일이나마 줄여드리기 위하여 안타까운 맘으로 그 같이 한 것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로마군병의 눈에 잘못 비치면 잡혀서 채찍도 맞을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대어 그것이 신포도주임을 아시고 인류를 위해 남김없이 고통을 당하시고자 마시지 않으셨지만 아마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가 하려고 한 갸륵한 일을 가슴 속 깊이 뼈 속 깊이 담아 놓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때 그 사람, 해면에 신포도주를 묻혀 주님께 드리려는 사람은 분명 천국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우리 예수님은 보좌에서 십자가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려고 한 그때 그 사람을 하늘보좌에 초청하시어 꼭 안아 주시고 그를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예한 여러분 모두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마시고 십자가와 무관하게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아 다가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천분지 일이나마 만분지일이나마 줄여보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를 썼던 참으로 안타깝고 미어터지는 그 때 그 사람의 가슴을 지니고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십자가와 무관하게 살지 않게 하옵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구경꾼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로 이 땅에 살면서 다시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죄악의 삶을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늘 회개하며 자복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로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참으로 주님 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만분지일이나마 줄이려고 애쓰던 그 때 그 사람의 안타까운 가슴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5:06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