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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관리자 2010-07-20 (화) 23:28 13년전 3271  
 

2006 년 2 월 5 일(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시편 84 편 1 절 - 2 절

제       목 :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진읍교회,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마다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은 전체가 150 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몇몇의 시편들은 다윗이 아닌 다른 시인들의 시가 삽입되었습니다. 아삽의 시도 있고 고라 자손의 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84 편은 고라자손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누구입니까? 고라는 광야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영도한 모세의 지도권에 대해 도전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민수기 16장31 절과 33 절에 나옵니다.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고라는 스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라가 그렇게 심판을 받았다면 고라의 자손들은 너무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거나 하였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라자손들은 그들의 선조인 고라는 그렇게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면서 특별히 성전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고라자손이 고라가 죽은 이후에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였다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지도자를 무시하고 믿음 없는 행동을 계속했더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분명 다윗의 시편에 들어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라자손들은 선조 고라로부터 깊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을 보고 오히려 배워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자신의 선조를 보고 오히려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고라 자손은 조상인 고라가 모세에 대적하여 하나님에게서 징벌을 받았을 때 그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떠나거나 하나님을 떠나거나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건하게 살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오히려 잘 받드는 믿음의 후손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 시편 84편은 고라자손이 쓴 시로써 성전을 사모하는 그 믿음과 사랑이 절정에 이르는 시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시편 84 편 1 절부터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고라 자손들은 주의 장막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는 사랑스러워 죽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주의 장막을 사랑스러워 했을까요? “주의 장막”이 무엇입니까? 장막이란 텐트를 말합니다. 텐트는 텐트인데 주님이 안에 계시는 텐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텐트 안에 주님이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법궤와 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장막은 단순히 텐트이거나 어떤 건물이 아니라 주의 장막 안에는 주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에는 어떤 천막 자체를 사랑함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의 장막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는 다윗시대에는 그저 장막의 형태로 존재 했습니다. 이 장막 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현존해 계신다고 믿고 여호와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던지 이 장막을 그리워하고 이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시를 쓴 고라자손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다른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루살렘 순례길에 오른 고라자손이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입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고향에서 멀리 있으면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해지듯이 고라자손은 주의 장막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더해진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성전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고 그 성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라자손도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심하여져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노래하면서 주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을 쏟아 내놓은 것입니다. 고라자손이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바로 21 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인은 그저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되 쇠약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랑하고 사랑하면 상사병이 듭니다. 이 병은 치명적인 병으로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사랑함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는 병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되 애인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적당히 재가며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고슴도치의 사랑법을 아십니까? “너무 사랑하지도 너무 미워하지도 마십시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 속에서만이 정확히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온도와 속마음 그리고 아픈 곳까지 체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미움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그 사람을 가깝게 품으려 하고 소유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의 헤어짐도 모두가 다 너무나 가깝게만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슴도치는 서로의 가시에 찔리지 않게 어느 정도의 사이를 두고 가시와 가시사이를 엇갈리게 맞대며 서로를 품는다고 합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찔리고 그렇다고 멀어지면 체온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고슴도치에게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너무 사랑하여 상대방의 모든 것을 관여하고 소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또 너무 미워하여 쉽게 돌이킬 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지 마십시오 (고슴도치의 사랑법을 배우십시오).


그런데 시편시인의 사랑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서로의 가시에 찔리지 않게 사랑하는 그런 합리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너무도 사랑하기에 쇠약해지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시편 84 편의 시인의 사랑에서 우리는 아가서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가서 5 장 8 절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난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가 넘쳐서 그 사랑함으로 병까지 얻게 됩니다. 아가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보통 상식이라는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이는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를 아무리 설명해도 모릅니다.


이해인 수녀가 쓴 시에도 그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 그 사랑을 올올이 짜내고 있습니다. <해바라기연가>를 봅시다.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 나의 임금이여 / 폭포처럼 쏟아져오는 그리움에 /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 내 불치의 병은 / 사랑/ 이 가슴 안에서 /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습니다.” 시인에게 임금이고 주인인 그를 향한 사랑이 바로 열병을 앓는 그 사랑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장막을 향하여 사모하여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시편 84 편은 다윗이 지은 시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 다윗의 시편이라 불리어지는 시편 150 편에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일반적으로 정설은 다윗이 시편들을 수집하고 150 편으로 편집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시편은 다윗이 지은 시라고 일컬어지는데 그런데 시편 중에는 분명히 저자를 밝힌 시들이 몇몇 있습니다. 아삽이 쓴 시와 고라자손이 쓴 시가 그것입니다. 원래 다윗이 왕이었을 때 시편을 편집하였을 터이니 다윗은 자신의 업적을 생각하여 자신의 시로만 채울 수 있었는데 혹 다른 사람이 쓴 시라고 하여도 자신이 지은 것처럼 할 수 있었는데 왜 다윗은 자신의 시편 속에 아삽의 시와 고라자손의 시를 집어넣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윗이 왕이었으니 자기가 왕이었을 때 많은 업적을 남기려 했을 것입니다. 시편이 그렇습니다. 시편 150편을 자신이 지은 시로만 전적으로 다 채워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삽의 시와 고라자손의 시들을 채워 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다윗이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고라자손 못지않게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을 사랑하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너무도 좋아서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아내 미갈이 임금이 체신머리 없게 그게 뭐냐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사랑하는 나머지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백향목의 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천막 안에 있음을 심히 죄송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궤를 잘 모실 성전을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여호와를 사랑하였고 여호와의 장막을 사랑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을 그토록 사랑하였기에 역시 여호와의 집을 사랑하여 지은 고라자손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바로 시편에 포함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했던 것은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었지 자신의 명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시를 포함하였을 때 자신의 시로 슬그머니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고라자손의 시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을 그토록 사랑하는 그 시를 높이 평가하여 시편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보다는 성전을 사랑하는 그 고라 자손의 시를 너무도 아낀 것입니다.


이는 아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라자손과 다윗은 여호와의 집을 사랑하는데 난형난제라고 할 만큼 그 마음이 열렬했습니다. 다윗이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난 시가 시편 중에 많습니다. 시편 122 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로서 다윗이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오롯한 마음이 잘 나타난 시입니다. 122 편 1 절을 볼까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짐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편에 올올이 잘 나타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편 69 편 9 절은 대표적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다시 말하면 주의 집을 향한 불같은 마음이 내 영혼 전체를 태웠다 그 말입니다. 다윗이 주의 장막을 향한 마음이 뜨거웠음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주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는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편 26 편 8 절에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편 27 편 4 절에도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이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과 고라자손의 그 뜨거운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시대와 그 이전의 주의 장막은 솔로몬시대에 바로 성전으로 바꾸어집니다. 주의 장막 여호와의 장막은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날은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84 편이 우리에게 주는 멧세지가 무엇입니까? 성도 여러분들도 주의 장막, 여호와의 전을 사랑하되 고라자손과 같이 다윗과 같이 사랑해 보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되 그저 마음에 두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와 생활이라는 관념 아래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병이 날 정도로 사랑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전을 사랑함은 바로 성전에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기를 힘쓰며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전에 나아와 찬송하기를 기뻐하며,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전청소도 기꺼이 하며,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과 직책에  더욱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집사님이 참 먼 곳에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그날도 일찍 교회로 오시는 집사님을 향해 교회가 너무 멀지요? 했는데 그 집사님은 교회가 먼 것이 아니라 저희 집이 교회에서 멀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전을 소홀히 하고서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성전을 소홀히 하고서 영혼이 잘 될 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멀어지는 삶은 인생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성전에서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때가 여러분의 생을 뒤 돌아보면 가장 아름답고 귀한 추억의 때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유명한 나폴레옹이 전 세계를 정복해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패배해서 저 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조그마한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한 기자가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폐하여, 폐하가 지금가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씀해 보십시오” 그때 나폴레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옛날을 회상하는 듯 두 눈가에 눈물을 적시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수십 년 전 알프스산맥을 넘어 전투가 치열할 때 어느 주일날 아침에 종소리가 들려 나는 그 종소리를 따라갔는데 마침 조그마한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에 철모를 벗고 예배를 드렸지!! 그때 나는 성가대의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비한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노라 그 순간이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감격과 환희와 행복으로 남아 있노라” 라고 했습니다.


군에 가면 좋은 일은 휴가를 가는 일과 상을 받는 일과 진급신고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무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중대본부에서 하게 됩니다. 상을 타는 것도 중대본부요. 휴가를 가기위해 신고하는 곳도 중대본부요. 상병에서 병장으로 진급신고를 하는 곳도 중대본부입니다. 군인들의 모든 일은 중대본부에서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대부분 성전을 통하여 나리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과 복을 내리시지만 하나님의 복은 특별히 성전에 나아오는 자에게 집중적으로 나리십니다. 우리 부모님의 심정도 그러십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집에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리십니다.


이번 설날에도 부모세대들은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객지에 간 자식들이 돌아와서 절도 하고 얼굴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집에 온 자식들에게 그동안 줄려고 준비한 마늘이며 감자며, 햅쌀이며 물김치며 배추김치며 이것저것 담궈놓고 기다렸다가 부모의 집에 오면 가는 길에 주섬주섬 챙겨서 차 트렁크에다 가득 얹어 주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이 아무데서나 자식들에게 줍니까? 물론 다른데서 줄 수도 있지만 부모의 집에 오는 자식에게 미리 준비해 놓고 찾아오는 이에게 가득 안겨 줍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도 그러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에 나아오는 자에게 은총을 가득 나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연모하는 자에게 은총을 나리십니다. 다윗은 그저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는데도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체만으로 쏟아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시편 122 편 6 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 있는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바로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형통의 은혜를 주신다 하였습니다. 형통이란 모든 것을 잘되게 해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은총,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 하나님의 크신 복은 성전을 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28 편 5 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여기서 시온이 어디입니까? 시온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시온입니다. 시온은 바로 하나님의 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바로 시온 하나님의 집에서 나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시온에 집중하여 부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전에서 만나주시고 성전을 통하여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므로 성전은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신 매우 소중한 곳입니다.


출애굽기 29 장 43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거기가 어디입니까?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현현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84 편 4 절에도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나와 있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한 마을에 낡은 건물의 교회가 있었습니다.장마철이면 교회 진입로에 물이 괴어 통행이 불편했습니다.어느 주일날 진입로에 20장의 벽돌이 깔렸습니다.그 다음 주일에도 다시 20장의 벽돌이 깔렸습니다.담임목사는 과연 누가 이런 선행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새벽 일찍 교회로 가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새벽시간에 어둠을 뚫고 교회로 향하는 발길이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달구지에 벽돌을 싣고 교회에 와서 벽돌을 한 장 한 장 깔고 있었습니다.그 소년은 열두살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아이였습니다. 소년은 벽돌공장에서 받은 급여로 벽돌을 사서 남모르게 교회계단을 깔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날 설교 때 존 워너메이커의 선행을 공개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소년의 선행에 감격해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건축됐습니다. 새벽에 벽돌을 싣고 온 이 소년이 바로 미국의 백화점왕인 존 워너메이커입니다만 당시 경제계를 콱 주름잡았습니다. 미국의 모든 돈이 들어오는 듯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탁월한 경영 솜씨를 가지고 체신부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대통령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인데 내가 만일 장관이 되어 나라 일에 바빠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대통령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학교 교사직은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와너메이커는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문기자가 그를 만나 미국의 체신부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야 교회학교 교사직은 나의 본업이고 장관직은 부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평생 해야 할 교회학교 교사직이 본업이지 한두 해 하다 말 장관직이 본업이겠습니까?" 그는 장관이 되어서도 토요일이면 워싱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4-5 시간이 걸리는 자신이 고향교회로 달려가 매주일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정성껏 예배를 드리고 다시금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과 직책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는 반드시 시온에서 복을 주시며 그 인생을 형통하게 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애인을 사랑하게 되면 애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일본 여자들이 배용준을 사랑하니까 한국기자가 한류열풍을 취재하러 갔을 때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좋아요! 욘사마와 같은 하늘을 이고 있으니!!” 욘사마를 사랑하면 욘사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입으셨던 옷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라 자손은 주님의 성전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의 집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시온과 예루살렘을 무척 사랑함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뙤약볕에 밭을 매서 정원을 아름답게 간직합니다. 어떤 성도는 성전에 자신이 사랑하는 분재를 매주 가져다 놓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새벽 3 시에 나아와 성전에서 새벽제단을 쌓습니다. 어떤 성도는 하루에 세 번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 지하기도실에 나아와 기도합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님 제가 제단을 맡을께요 하면서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신이 친히 수를 놓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어떤 성도는 매년마다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교회의 성탄트리를 빛나게 장식합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가 있는 곳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다니엘 기도를 올립니다. 어떤 성도는 성전제단에 피울 초를 1 년분치를 정성들여 마련합니다. 어떤 성도는 예배시간 1 시간 반전에 나아와 성전 제일 앞자리에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의 출입문이 낡았다고 새 것으로 교체하고 어떤 성도는 광고판이 낡았다고 새것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분은 지하기도실 마루 바닥을 새것으로 교체해 놓습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 앞마당을 쓸고 유리조각을 줍습니다. 어떤 성도는 보지 못하는 성도를 십 수 년이 넘도록 손을 잡고 성전에 나아옵니다. 어떤 성도는 성도들을 위하여 어린이들을 위하여 거의 20 년이 넘도록 운전을 자원 봉사합니다. 어떤 분들은 말없이 나아와 성례전 준비를 하고 성례전이 끝난 후 봉사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가 일흔이 훨씬 넘었어도 성가대를 봉사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매일 정한 시간에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청소를 하고 갑니다. 어떤 성도들은 새벽제단을 나오시는데 1 시간 반 이상을 걸어서 나옵니다. 2 시 반에 일어나서 1 시간 반 동안 걸으며 나아와서 4 시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강진읍교회는 드러내 놓지 않아서 그렇지 참으로 조용하게 은밀하게 성전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강진읍교회에 나오는 이들을 보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성전을 사랑하는 이들이 참으로 너무도 많습니다. 성전을 섬기면서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은밀한 가운데 봉사합니다. 대부분이 요란하지 않지만 은은하고 그윽한 마음으로 주님의 계신 처소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을 봅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내면의 모습이 제 가슴 속에 조용하게 비추어집니다. 저는 성도들을 볼 때 마다 꼭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와따! 이쁘요!”, 그 이쁘다는 것은 무척 젊고 매력적인 모습 피부가 탱탱하기 때문에 이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속에 각인된 여러분의 형상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제 눈을 통해 들어와 주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평생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집을 사랑하며 일평생 살기를 바랍니다. 삶이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날 만드시고 날 그토록 사랑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일이요 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사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특별히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일입니다.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노래했습니다. 다윗의 이 노래가 바로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로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로 고라 자손과 같이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이 고백이 저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5:06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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