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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씻어주는 남신도!!

관리자 2010-07-17 (토) 21:03 13년전 2903  
 

2006 년 9 월 17 일 (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성경본문 : 요한복음 13 장 1 절 - 15 절  

제       목 : 발 씻어주는 남신도!!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오늘 총회 남신도주일로 지키는 모든 남신도들과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도 남자입니다만 남자가 문제가 많습니다. 세계여성단체들은 21 세기를 여성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의 내막 속에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습니다. 21 세기가 여성의 세기라면 20 세기는 남성의 세기였다는 말인데 20 세기가 어떻했습니까? 인류문명이 탄생한 이래 아니 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많은 인간생명들이 죽은 참으로 부끄러운 세기가 20 세기입니다. 아니 1 세기에서부터 19 세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싸우고 분쟁하여 죽이고 죽은 총 수를 더한 수보다도 20 세기 단 한 세기 동안에 인류가 죽고 죽인 수가 더 훨씬 많았습니다. 1 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약 1500 만명, 2 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3500 만명, 기타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독재정권의 지도자들로 인해 실로 수천만명이 죽었습니다. 이디아민, 소모사, 팔레비, 모택동, 스탈린 등등 악한 정치지도자들이 죽인 이들만 해도 수천만이 넘습니다. 어떤 전쟁사학자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20 세기에 자연사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쟁이나 분쟁으로 죽은 사람들과 지도자가 국민을 죽인 사람들을 다 총계해 보자면 1 억 6 천만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습니다.


강진군 인구가 4 만명이라고 한다면 강진군의 인구 만한 것이 약 4000 개 정도가 서로 싸워 죽고 죽인 것입니다. 참으로 야만의 세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리와 늑대 같은 놈하고 욕하지만 이리와 늑대는 배가 고프면 겨우 한 마리만 잡아먹을 뿐 사람들과 같이 잡아먹지도 않으면서도 그렇게 수천명을 수만명을 수천만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욕은 이리같은 놈이 아니라 인간같은 놈! 해야 가장 큰 욕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저지른 모든 살인과 이 죄악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모두가 거의 100 이면 100 남성들에 의해서 자행되었으며 남성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들입니다. 히틀러, 뭇솔리니, 히로이또, 모택동, 스탈린 이런 악명 높은 남성통치자들에 의해서 전쟁이 일으켜졌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죽어갔습니다. 물론 그 옛날 역사로 올라가보면 중국의 측천무후나 블러드 메리라 불리운 영국의 메리여왕 튜더와 같은 여통치자가 당시 제법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남성통치자들이 죽인 숫자에 비하면 쩨비가 되지 않는 새발에 피인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악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남자에게 준 잘못이었지만 남자가 단독으로 저지른 최초의 죄악은 카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무참한 살인의 죄였습니다. 카인의 살인이후 점점 더 흉포해지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을 살해한 연후에 만일 나에게 해를 끼치면 77 배로 복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단지 엄포를 놓는 차원이 아니라 남자들은 실제적으로 그랬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원시적으로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나중에는 돌로 쳐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칼과 창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고 나중에는 멀리서도 죽일 수 있는 총도 만들고 한 사람만이 아닌 수십 사람을 동시에 죽일 수 있는 대포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하다가 계속 더 최신식의 무기들을 만들어 왔는데 20 세기 지나온 세기까지 만들어 온 무기 중에는 핵폭탄 수소폭탄 같은 것들이 있어 한 개만 터트려도 수백만이 동시에 죽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들을 전부 터뜨린다면 인류전체와 문명전부를 300 번도 더 깡그리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개발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남자들에 의해서! 이것이 남자들이 인류역사 속에다가 세워놓은 금자탑 아닌 금자탑인 것입니다. 남자들은 역사 내내 계속 무기를 개발하고 계속 서로 싸우고 죽이고 정복하고 차지하고 하는 일에 집중을 하여 왔고 남자들이 해왔던 일들은 전쟁하고 죽이고 침략하고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한번 살펴보십시오! 오늘날의 역사가 영웅이라 일컫고 칭송하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징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모택동 이런 영웅이라고 칭송했던 남자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나라나 다른 부족의 땅을 빼앗고 정복하고 적어도 수십만 이상 죽였던 헤아릴 수 없는 피를 흘린 이들이 아닙니까? 그들 때문에 보금자리를 잃고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영웅들 때문에 얼마나 평화를 잃고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즐겨 읽는 삼국지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제갈공명 이들을 나오는 대부분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거의 7~80 %를 차지하는 스토리는 남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땅을 빼앗고 왕위를 차지하고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을 짓고 전쟁을 준비하여 적벽대전에서는 한꺼번에 수백만이 죽고 그러지 않습니까? 삼국지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이지 결코 칭송해야 할 바람직한 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20 세기에 남자들은 극악무도하였습니다. 20 세기 광인 히틀러도 남자였습니다만 그는 원래 유대인 소녀를 좋아했습니다. 그 소녀는 히틀러를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일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국가사회주의 나찌를 결성한 다음 대권을 잡고 유대인을 증오하는 정책을 펴서 유대인 600 만 명을 잡아 가스실로 보내고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을 이용하여 비누로 만들어 군용으로 쓰게 했던 사람입니다. 히틀러는 그렇게 해서 전쟁을 일으켜 3500 만명을 죽였습니다.


20 세기의 역사는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피로 얼룩진 수치스러운 부끄러운 죄악의 보고서입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남자들은 좋은 것들이 있으면 노력해서 얻으려 하기 보다는 창으로 찌르고 칼로 죽여서 그것들을 얻고 남자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자기 부하나 노예로 삼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였습니다. 남자들은 서로 뭉쳐서 남의 나라 남의 부족으로 쳐들어가서 그 부족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다 씨도 없이 다 죽이고 여자들은 끌고 와서 자기 성적 노리개로 삼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남자들도 그랬습니다. 힘이 있으면 쳐들어가서 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말을 듣지 않으면 전부다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서 죽이고 그 나라 백성들을 고혈을 짜고 세금을 짜서 정작 자기네들은 휘왕찬란하게 살고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당시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식민통치 당하는 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힘이 있으면 정복하고 쳐 죽이고 가치있는 것은 다 내 소유로 삼고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십자가에 달아매놓고 죽이고 가진 것들은 다 빼앗아서 내 것으로 삼고 하는 다시 말해서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 빼앗고 차지하는 것이 남성들의 정의였습니다. 칼이 정의였고 창이 가치관이었으며 힘이 바로 그 시대 헌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피로 얼룩진 역사가 진행되는 그런 시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이고 죽는 빼앗고 차지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정복하려는 그런 시대의 가치관에 동화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아니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 장 42 절에서 45 절입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느냐 하면 자신의 제자들이 에수님이 하늘나라에서 대권을 차지하면 그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를 서로가 차지하려고 언쟁을 할 때에 참으로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씀하셨습니다. 힘이 정의가 되고 승리하면 그것이 법이 되는 세상에서 남자 제자들을 불러놓고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들이 권세를 부리고 남자들이 전쟁을 하여 섬김을 받으려 하고 남자들이 지배하려 할 때 너희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의 가치관과는 거꾸러의 가치관이었습니다. 땅에서는 누구든지 섬김을 받으려 하고 누구든지 나를 섬기지 않으면 칼과 창으로 복종을 시켜 나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 당연지사고 그것이 정의인데도 예수님은 그래서는 안된다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면 오히려 남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가치관, 시대적 가치관을 부정하시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시고 하늘의 가치관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세상의 가치관,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가치관에 익숙해 있었는데 너희는 그래서 안된다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당시로서는 남자제자들이었습니다. 남성들은 그러할지라도 너희 나를 믿는 남신도들 나를 따른 너희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하시면서 전혀 꺼꾸러의 가치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난 다음에 수건으로 그 물기까지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지방은 먼지가 많았습니다. 무슨 아스팔트나 도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다닐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시민이나 팔레스틴에 랍비나 사두개인과 같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다녔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맨발로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맨발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발을 씻어 주실 때 신발을 벗기시고 하는 동작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면 요한복음을 쓴 기자는 분명 그렇게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발을 벗기시고 예를 들면 나이키 운동화를 벗기시고 혹은 검정고무신을 벗기시고 그리고 물을 담아 발을 씻기시고 이렇게 말하였을 텐데 그런 서술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신발을 안 신고 하루 종일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으므로 그야말로 제자들의 발은 아마도 땟국물 천지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신발을 신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그러면 거개는 고모나 할머니가 발을 씻어 주셨는데 그냥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등짝을 한번 때리면서 “이 놈아 까마귀가 널 보고 아부지 아부지 하겠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까마귀가 할아부지하고 부를 만한 제자들의 발을 뽀독뽀독 씻어주시면서 씻어만 주신 것이 아니라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의 물기를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 하였을 때 맨 처음에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었고 상식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의 당시 풍속에 의하면 제자들이 스승인 랍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관례였지만 또한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통례였는데 자신의 스승이 그 관례와 통례를 깨뜨리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때 수영 남자 100 m 예선에서 아프리카 기니에서 온 무삼바니라는 선수가 다른 선수들이 자유형으로 스피드있게 쭉쭉 뻗어갈 때 파격적으로 개헤엄을 치면서 갔습니다. 무삼바니가 100 M 를 외롭게 개헤엄을 치고 가는 동안 1만 7000여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수많은 카메라맨이 다시없을 진풍경을 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들은 금메달을 위해 헤엄치는가? 나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파격적인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런 파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면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엎드려 절을 하면서 경배하는 대상이십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으시기에 우리는 그 분에게 극도로 존경하고 우리는 감히 범접을 못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땟국물이 철철 흐르는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는 너희를 창조한 하나님이로라“ 하면서 인간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세상 한 가운데에 하늘의 보좌를 마련해 놓고 구름이 그 보좌를 감싸게 하며 천군천사가 위용을 들어내면서 그 주변에 마치 보초를 서듯이 사방으로 감싸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루에 일천 배씩 절을 하도록 시키고 떵떵거리면서 인간을 주눅 들게 할 수 있을 텐데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실 때도 방도 아닌 말구유에서 오시더니 쫓겨 다니시고 목수로 일하시다가 나중에 하늘나라 일을 하시는데 하늘나라 일이라는 것이 인간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시는 바로 그런 애잔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허리를 굽히면서 12 제자의 발 24 개를 모조리 다 씻어주시고 모조리 다 수건으로 닦아주시는 그런 자상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세상에 인간들이 믿고 있는 각종 종교와 신들 중에서 그 어떠한 신이 더럽고 추한 인간의 발가락에 끼인 때를 칼칼히 씻어주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천상천하 위에서 인간들을 호령하고 인간의 철저한 복종을 강요하시고 심판과 권능으로 군림하시는 절대전능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아이의 발가락에 끼인 때를 요모조모 씻어주시는 자애로운 엄마와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를 남김없이 씻어 주셨습니다. 발을 씻기고 난 다음에 한 말씀 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남성들의 가치관 시대의 가치관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안하면 강제로라도 내 발을 씻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남성적 가치관 시대의 가치관의 대변자가 아닌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왼쪽에 지옥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천국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힘으로 강제하여 내 발을 씻게 하고 내 발을 씻지 아니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그를 힘으로 내리 눌러 나를 섬기게 하는 그런 것이 가치철학이라고 한다면 어디에 가깝겠습니까? 분명 왼쪽 지옥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면서 사는 것은 오른쪽 하늘나라에 가까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 내가 발을 씻은 것처럼 발을 씻어주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가라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녔던
수유리 한신대학교 식당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그 곳에 대형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신학교 1 학년 때부터 거기에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오늘 본문내용을 정확하게 유화로 재현한 내용인데 밥을 먹으로 가면 모든 학생들이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걸려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그 대형그림을 보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무련 몇 년 동안 보았느냐 하면 신학교 1 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보았으니까 무려 4 년 보태기 2 년 반 즉 6 년 반 동안 보았습니다. 하루에 세 번 밥 먹었다고 치면 그리고 다른 용건으로 식당에 안 간 것을 고려한다면 365일 곱하기 3 끼 곱하기 6 년을 하면 6570 번 정도 나옵니다.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언젠가 저 그림이 왜 저기에 걸려있을까? 신학교 예배실 앞에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별로 어울리지 않게 식당에 걸려있을까 그것도 식판을 타는 정면에 놓아두어 밥을 타기를 기다릴 때마다 저 그림을 보아야 하는가? 밥 먹는 것과 예수님께서 발씻어주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러면서 번뜩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밥 먹고 힘내서 너도 발 씻어 주어라.” “ 밥먹고 생긴 힘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 목사되거들랑 교인들 발 잘 씻어 주어라” 이것을 한번만 얘기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온 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무려 6570번이나 반복하여 얘기한 것입니다. 과연 내가 성도들의 발을 제대로 씻어주고 있나를 나 자신을 살펴 볼 때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대접을 받으려 하고 더 섬김을 받으려 하고 누군가 내 발을 씻어주기를 바랬지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려 하였다 생각해 보면 한량없이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6570 번이나 보면서 말없는 교훈을 얻었는데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 발을 씻기 위해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는 역사가 점점 오랠수록 점점 더 계급구조가 되어가고 좀더 연륜이 되어 받는 직분들은 내가 목산데 내가 장론데 내가 회장인데 내가 원론데 하고 더 은근히 대접을 받으려 하지 더 대접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관은 저가 저만치 가고 지옥의 가치관이 스며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나 카톨릭 역시 교회의 풍토를 어떤 군대의 계급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복종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주님이 오신 후 313 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교회는 섬기는 자의 모임이 아니라 치츰 지배자의 종교 섬김을 강요하는 종교가 되어 갔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사회나 국가보다도 더한 계급구조를 만들고 그 질서에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카톨릭의 교회도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 보좌신부 등으로 권한과 질서를 세분하였고 개신교도 교역자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강화하여 마치 교회가 총회장이 높고 그 다음이 노회장이고 그 다음이 당회장이고 장로는 그 다음이고 권사와 집사는 다음, 다음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세군은 차라리 솔직하게 계급을 만들었습니다. 큰 교회 담임을 하고 있는 교역자 중에는 자신은 사령관, 수석부목사는 참모장, 장로는 주임상사, 권사나 안수집사는 하사나 중사, 서리집사는 병장, 세례 받은 신도들은 일등병이나 이등병, 그리고 새신자는 훈련병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교회가 서로 섬기는 구조로 더욱 잘 만들어져 간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구조로 간것입니다.


기장교단을 출범시켰던 김재준 목사님은 “제3일”이라는 잡지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주후 313년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난과 봉사의 교회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로마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때부터 황제가 교회에 입교하여 신자로서 예배드리고 교회는 로마제국의 권좌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귀족화되었다. 교직자는 높은 대접을 받았고 황제까지도 교황의 손에서 면류관을 받아 써야 할 만큼 교회는 높아졌다. 그래서 섬기는 교회라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교회로 되어갔다”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군 원정을 하면서 현지의 엄청난 어린이와 아녀자를 죽이고 종교개혁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좀 다른 방식으로 믿는다고 불을 지펴 화형하여 죽이고 하는 무지몽매한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다스리고 군림하는섭김을 받는 독재종교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역사를 거듭할수록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하늘나라를 이루는 공동체가 아니라 지옥을 만들어가는 제조공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남신도주일입니다. 지금까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보고서는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섬김과 대접을 더 받으려 안간 힘을 쓰고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 힘으로 내리 누르려 하고 그 힘으로 더 차지하려고 하고 그 힘으로 더 높은데 오르려 하고 그 힘으로 정복하고 내 소유로 하려 하였습니다. 그런 사고방식과 가치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브레이크도 없는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성들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남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면서 서로 섬기면서 서로 대접하면서 기뻐하는 가치관을 지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속에 하늘이 쳐들어옵니다. 옛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식당에 가면 길고 긴 젓가락이 있는데 지옥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자기가 음식을 집어먹으려 하니 아예 입으로 들어가지 않지만 천국에서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옆에 있는 이에게 집어 넣어주니 서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와 안수권사가 은근히 자신이 더 대접을 받으려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는 교회의 전통과 종교문화에는 익숙한 사람일는지 모르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는 더 이상 아닙니다. 만일 저들이 내가 직분자이니까 내 입장을 더 강화하려고 하고 내 입지를 확대시키려 하고 나를 주장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일 수 있고 오래된 구태의연한 교인일 수는 있으나 예수님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 아니며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아닙니다.


솔티가 부른 노래 중에 감미로운 노래가사 한 구절을 기억합니다. “서로 섬기면 주님 나라 이뤄지리~~ 주님 나라 이뤄지리라!”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 발을 씻으라 하고 대접을 받아야 하겠다고 하고 하면 거기에는 분명 주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원하여 사랑으로 섬기고 대접하면서 기뻐하면 이미 내 마음 안에는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안 빼앗기고자 할 때 주먹으로 쳐서 내 것으로 삼고자 할 때 거기에 지옥의 아귀다툼이 이 땅에서 있는 것이지만 내 손을 펴서 내 것을 베풀고 나누고 발을 씻어주면서 기뻐할 때 내 속에는 이미 하늘나라가 침투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저희로 이 세상에 살면서 빼앗고 차지하고 내리 누르고 높이 오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섬기며 베풀면서 이웃의 발을 씻으면서 기뻐하는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인생이 발을 씻어주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7:30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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