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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관리자 2010-07-20 (화) 22:39 13년전 2550  
 

2006 년 9 월 24 일 (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성경본문 : 여호수아 24 장 14 절 - 18 절 

제       목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의 삶과 영혼 속에 흘러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옛날 고려 시대에 있었던 얘기 하나를 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고려 말에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려던 이방원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정몽주를 죽이라 하였지만 그 말을 물리치고 정몽주를 만납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 백 년까지 누리리라.” 그 시를 들은 정몽주는 술 한 잔 받아들고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시를 들은 이방원은 조용히 눈을 감고 결코 충신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정몽주를 마침내 죽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벼라 별 방식으로 삽니다만 그것들을 분류해 보자면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방원식과 정몽주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꼭 이방원식으로 삽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하면서 무슨 원칙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게 아녀! 하면서 살아갑니다. 무슨 원칙 같은 것이 없습니다. 무슨 유일한 원칙이 있다면 나에게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다 나쁜 것이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저 내 기분을 만족하게 해 준다면 케세라 세라 하면서 살아갑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이웃에게 공해를 뿌리면서도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살아갑니다. 공해물질을 많이 배출한들 어떠하리! 돈만 많이 벌면 좋지! 고기만 많이 팔리면 좋은거지! 고기 비늘에다가 노란 물감 좀 칠하면 어때! 어차피 누군가가 몰래 해먹을 눈먼 돈들 좀 내 호주머니로 슬쩍 이마이 포켓하면 어때! 아! 당선만 되면 장땡이지! 돈 좀 푹푹 쓰고 흑색선전도 팍팍하는 것이야 누구든지 하는 것이지 뭐 나만 하나! 돈만 꾸어 놓기만 하면 그게 내 돈이지 꼭 갚아야 하는거야 좀 안 갚으면 어때! 하는 사고방식이 이방원식 사고방식입니다. 아! 남편만 있고 애인도 없는 여자는 6 급 장애인이라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데 남몰래 애인 하나 정도 두는 것 정도가 뭐 어때! 아파트공사를 할 때 시멘트가 300 톤은 들어가야 하는데 뭐 그까이것 한 절반 150 톤 정도만 붓고 철근 100 톤을 대신에 뭐 한 40 톤 넣고 왜 아파트 못 짓나 잘만 짓지! 무너진다고 그렇다고 내가 그 아파트에서 사나!


어떤 트럭 운전기사가 밀가루를 잔뜩 실고 앞에서 달리고 어떤 트럭 운전기사는 세멘트를 실고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두 차는 생김생김이 서로 비슷하였습니다. 휴게소에서 서로 내려 쉬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고 달렸습니다. 서로 차를 바꾸어 타고 갔습니다. 앞에 가는 차 기사가 생각했습니다. 어 이상하네 내가 몬 차하고 똑같은 차가 내 뒤에 따라오네! 뒤에 가는 차 기사가 생각하였습니다. 어 이상하다 내가 모는 차와 똑같은 차가 앞에 가네! 나중에서야 차가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세멘트를 실고 달려가는 운전기사는 밀가루를 실고 가고 밀가루를 실고 올라가던 운전기사는 세멘트를 실고 갔습니다. 세멘트를 실고 가야할 운전기사는 밀가루를 실고 가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뭐 내가 세울 집인가! 하면서 아파트건설현장으로 갔습니다. 밀가루를 실고 가야할 운전기사는 세멘트를 실고 가면서 뭐 내가 먹을 과자인가 하면서 과자공장으로 갔습니다. 아파트건설현장에서는 밀가루로 아파트를 지었고 과자공장에서는 세멘트로 빵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밀가루로 만들어 진 아파트가 와지끈 무너질 때 어느 어린이의 이빨이 우두둑 분질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났습니다. 물론 이 같은 얘기는 만든 것입니다만 오늘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몽주식으로 사는 이들은 분명 왕따를 당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하는 식으로는 결코 우리 사회에서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어떤 원칙을 지키려고 하면 금방 왕따를 당하고 도태를 당하고 소외를 당하게 됩니다. 너만 잘났냐? 그래 니 팔뚝 굵다 하면서 그 사람하고는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정몽주식으로 산다면 정몽주가 피를 흘리며 선죽교에서 죽어가듯이 오늘날도 정몽주식으로 살려면 금방 스트레스를 받아 뇌일혈도 쓰러지게 됩니다. 나는 부정한 돈은 일원 한 푼 안 받아! 나는 불의하고는 결코 타협을 하지 않아! 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남편 아닌 여자와 아내 아닌 여자를 생각하지도 않아! 나는 남에게 대해 어떤 악한 말도 하지 않아! 죽으면 죽었지 나는 남을 끌어내리고 나를 올려놓으려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아! 이렇게 정몽주식으로 살려는 사람은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오해와 질시를 받습니다. 지만 잘났어 정말! 하면서 그 사람을 어디든지 끼어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몽주식의 사람은 이 사회에서 무척 소수이고 제대로 숨을 쉬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이방원형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이들에 의하며 세상은 점점 난장판이 되어갑니다.


신신애라는 가수가 그런 노래를 불러 히트를 쳤습니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말좀 들어라 /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 인생 살면 십팔십 살같이 날라간다 정신을 차려라 / 싱글벙글 싱글벙글 도련님세상 / 방실방실 방실방실 아가씨세상 / 영감상투 삐트러지구 할멈신발 도망갔네 허허~ ” 오늘날은 참으로 법이 있고 법을 만드는 입법부 국회도 있고 그 법을 실행하는 사법부도 있고 법의 정신에 맞는지 헌법재판소도 있지만 그 전체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짜가가 판치고 힘이 있는 자가 지 맘대로 움켜쥐고 뒤흔드는 세상 완전 이방원식의 삶과 이방원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이방원을 형님이라 부르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자기에게 유리하다면 마구잡이식으로 가는 이 사회에 오늘날 신앙생활도 세속의 방식을 닮아가 차츰 이방원식으로 변형되어가고 있고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로 올라가면 갈수록 신앙의 원초적 순수성이 되살아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방원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정몽주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주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여 바칠 목숨이 단 한 개 뿐 인 것을 참으로 아쉬워했습니다. 폭군 네로 황제의 시절 순교사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굶주린 사자밥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사자가 달려오자 한 엄마가 아이의 눈을 감기면서 얘야! 이제 조금후면 우리는 천국문 앞에 있게 된단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였는데 당시 집정관들이나 통치자들은 자신의 관용을 들어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사교인 것을 더욱 홍보하기 위하여 기왕에 믿었던 자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돌아서면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사형에서 그냥 조건 없이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기독교인들을 타락시켜 기독교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하면서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의 대열은 한국의 초대교회사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카톨릭교회를 포함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주 예수님을 위해 피를 흘렸고 예수님을 한 번만 욕한다든지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그저 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살려준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그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죽어갔습니다. 성경의 초대교회나 소아시아와 유럽의 초대교회나 우리나라의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시의 권력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씨를 말리면 없어질 줄 알고 무참히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점점 기독교인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핍박하는 당국자들이 깨달은 것을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순교자를 만들어 주면 안된다!” 당국자들은 순교자를 만들어 주었더니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이라도 죽어도 하는 그런 순교정신은 참으로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나중에 30 배 60 배 100 배로 벋어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점점 쇠락하게 되고 점점 쇠퇴하여지게 된 것은 박해시기가 아니라 기독교가 부흥을 이루고 주류가 되고 난 뒤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어느 새인가 기독교 안에 상대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방원식이 스며들게 된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의 사고방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19 세기와 20 세기 동안에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이방원식 사고가 즉 세속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네로 황제와 같은 로마제국의 박해가 없고 긴장감도 없어졌을 때 신앙생활을 좀 편하게 하자!는 생각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 같은데서는 뭐 예배를 꼭 1 주일 만에 한 번 씩 드려야만 하느냐? 당회와 제직회가 결의를 하여 우리 교회는 1 주일에 한 번 씩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2 주일에 한번 씩 공 예배를 드리자고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1 - 2 명을 제외한 모든 회원들이 아멘 아멘 하여 결국 2 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다가 보니 한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또 한 주일에는 놀러가게 되니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나중에 또 다시 당회와 제직회로 모였습니다. 다섯 주일이 있는 경우에는 한 달에 두 번만 예배를 드리자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재미가 있어 또 결의를 하여 한 달에 한 번 씩만 드리자 결의를 하고 그러는 동안에 교회의 성도수는 점점 적어지고 나중에는 교회를 유지하는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술집에 팔든지 부동산에 경매를 붙이든지 해서 넘어갑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다가 결국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옛날 마귀는 기독교인들에게서 신앙 자체를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의 궤계는 성공하지 못하고 자꾸 실패만 거듭하였습니다. 신앙을 없애려 하면 할수록 더 신앙으로 무장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 마귀는 좀 더 세련된 전술로 바꾸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죽고 죽어” 하는 순교신앙을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상대신앙으로 바꾸고자 하였고 마귀들의 전술들은 많이 먹혀들어갔습니다. 마귀가 신앙을 없애버리려 했을 때는 더 단단히 무장하였지만 신앙을 좀 더 원석과 같이 투박한 신앙보다는 좀 더 세련된 신앙으로 너무 원칙만 지키는 신앙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타협을 할 수 있는 신앙으로 바꾸도록 할 때에는 쉽게 그렇게 이끌려 왔습니다. 마귀들의 전술과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 속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게 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그렇게 힘들게 하나! 좀 대충 대충하면 어때! 아 하루에 예배 한 번 드렸으면 말지! 왜 예배를 하루에 두 번씩 드려! 새벽예배까지 합하면 세 번 드리는 것 아녀? 아 하나님도 세 번이나 받으시느라고 피곤하시겠다! 완전히 한국교회는 예배공해야! 예배를 정중하게 한 번 드리면 그 뿐이지! 하면서 제법 신앙이 있는 척하면서 살짝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합리적인 것 같기도 하고 지성적인 신앙인으로 우러러 보이게 합니다. 마귀는 교회 다니는 이들을 자신의 일꾼을 삼아서 좀 더 세련된 지식적인 신앙을 가지게 한다는 구실을 세워 이렇게 파괴를 합니다. 주일을 꼭 성수해야 하나! 일주일간 열심히 일했으면 하루 쯤 쉬면 어디가 덧나나! 합니다. 뭐 꼭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꼭 드려야 하나? 카톨릭은 교무금이라고 해서 수입의 20 분 일 정도만 바치면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 십일조가 구약에 있지 신약에 십일조가 어디 있나 하면서 십일조 좀 안 하면 어때! 오히려 십일조하라고 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주의지!, 아니 교회가 무슨 프로그램을 그렇게 많이 하여 성도들이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기도회다 무슨 봉사활동이다 피곤하게 하나! 일주일에 교회 한번 나가는 것도 맘먹고 가는 것인데! 무슨 세상에서 빛을 비추면서 살아가나! 그렇지 않아도 조금만 말씀 따라 살려해도 왕따를 시키는데 어떻게 우리가 신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살 수 있어?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니까 좀 죄도 짓고 용서도 받으면서 살아야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야! 인간이니까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도 세상에서 사니까 세상에서도 살아야 하고 우리가 육을 가진 인간이니까 육적으로 좀 재미도 보고 살아야지 사실 안그래! 아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지어야 용서해 주는 재미도 있으시지 인간이 죄를 짓지도 않고 용서해 줄 것이 없으면 하나님은 무슨 재미로 살아가시나 적당히 죄를 지으면 건강에도 좋아!” 하면서 마귀는 기독교인들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쪽으로 유도해 갑니다. 마귀는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의 드렁칡과 같이 적당히 불의와도 얽히고 좀 어둠과도 대충 타협을 하고 탐욕과 쾌락과도 서로 짝짝꿍을 하고 사바사바도 하고 짜가들하고도 디스코도 같이 추고 그러면서도 기독교인으로서 문화생활을 누리고 적당히 직분도 누리게 하면서 그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게 합니다. 마귀는 교인들을 만들어가되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예수 믿고 싶지 않을 정도의 사람,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저 교인이 되게 할 뿐 예수의 제자는 되지 않게 적당히 선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과 말씀 제목은 여호수아가 한 말이면서 금번 제 91 회 총회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40 년 동안 지내게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을 시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해 주신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지도자의 바통을 여호수아에게 넘깁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고 보니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그 원주민들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이에 비하여 무엇으로 먹고 살았습니까? 원래 조상들이 유목민이었습니다. 가축들을 먹이고 그들에게서 난 우유와 고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매년 씨를 뿌려서 거기서 농사하여 먹을 것을 얻어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 이곳 사람들이 우리 유목민들보다는 더 훨씬 더 우수한 농경문화를 지니고 있구나!” 하면서 저들 원주민들에게 농경문화를 배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저들은 농사를 지을 때 그냥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그곳에 살려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농경문화는 신참이고 저들이 고참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가나안 족속 히위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족속 들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 하면서 바알신과 아세라 신에게 대해서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바알은 남성풍요신이고 아세라는 여성풍요신인데 이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이들이 축복을 해주어야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농경문화의 신참들이었던 이스라엘 족속들은 농경문화의 고참들인 가나안 족속들에게 너도 나도 배우자는 열풍이 불어 저들이 하는 농경하는 방법만 배운 것이 아니라 저들이 섬기는 신들도 아울러 섬기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게 아세라와 바알신에게 제사를 올리면 농사가 잘된다 하니 지화자 얼시구나 하면서 저들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저들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족속들은 애굽에서 인도해 온 여호와 하나님, 홍해에서 애굽군대를 바다에 몰아넣어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준 여호와 하나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고 아말렉을 비롯한 모든 적군들을 물리쳐 주신 여호와 하나님, 가나안 땅으로까지 인도하여 주신 그 하나님이 오직 나만을 섬기라고 광야에서 강조하고 강조한 것을 까마득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만 보고 평생 사랑해 왔던 그 사랑을 버리고 김중배한테 시집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열이 팍 오르고 화가 잔뜩 난 것입니다. 너희들 요단 저편에서 섬기든 신이든지 요단 이편에서 섬기는 신이든지 그 어떤 신들도 다 확 치워부러라! 니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강 저쪽에 있는 신을 섬기든지 강 이쪽에 있는 아모리인의 신을 섬기든지 정해부러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하였습니다. 니들이 맘대로 택하라! 한 것은 정말 그렇게 자유롭게 종교의 자유를 가져서 그렇게 해라는 것이 아니라 무척 섭섭하게 무척 서운한 감정을 내뱉은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결코 딴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확약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여호수아 24 장의 상황입니다.


왜 기장 91 회 총회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는 주제를 선택하였을까? 이 주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의 상황은 참된 신앙을 가지기 매우 어려운 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여호수아의 이 다짐은 누구를 향해 던진 말씀이었습니까? 이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 던져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적당히 다른 것들을 섬기고 믿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입니다. 이는 참 신앙의 문제이고 신앙의 순수성 문제입니다. 수십 년을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직분도 가지고 있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상대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한 이 사회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의지하고 삽니다. 이는 하나님도 의지하는 대상의 하나일 뿐 하나님이 유일한 믿고섬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겼을 때 그렇다고 여호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과 아세라도 적당히 섬긴 것입니다. 꼭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느냐 애굽과 광야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좋은 신이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하니 왜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느냐 여호와 바알 아세라 세 신을 섬기면 왜 안되느냐? 그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인들에게 던지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티브이 드라마에서 한 사형수가 오전에는 성경을 낭송하고 오후에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고 저녁에는 천지신명님께 비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신만을 섬기면 불안하니까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면 뭔가 하나 걸려도 걸린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동시에 부처님을 의지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적으로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실제적으로는 자신을 믿습니다.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부닥치면 하나님께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하고 내 경험과 내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내 판단,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에 더 치중하여 인간적인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지하려 합니다. 의지하는 첫 번째 대상이 자신이 되고 그 다음 다음이 되어서야 하나님으로 갑니다. 자신이 자신이 믿는 종교인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입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대해 종교요 신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오늘날 교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비중보다도 자신을 믿는 비중이 큰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내 판단을 의지하고 내 경험에 의지하고 내가 맺어 놓은 인간관계를 더 소중히 하고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또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과 힘입니다. 교인들은 말하기를 믿음만 가지고 살 수 없지요 돈과 힘도 있어야 산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내 통장의 잔고에 더 매달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에 더 쏠려 있습니다.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막상 문제에 직면하면 걱정 근심 염려 불안해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없을 경우 자신이 의지하려는 것들이 그 문제 앞에서 무기력한 경우에는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날 사랑해 주시는데 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맡아 주관하여 주시겠지! 하는 믿음에 굳게 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이 모든 것을 온전히 부모에게 의지하듯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하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한 오백년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미안하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와 같은 순수 신앙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참으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렇게 살지 않게 하시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다짐한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7:30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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