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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나에게 무엇인가?

관리자 2010-07-27 (화) 20:04 13년전 3192  
 

2007 년 3 월 18 일(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 장 18 절 - 25 절   

제       목 : 십자가는 나에게 무엇인가?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성전에 나아오신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는 헌신이고 희생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빼기요 마이너스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십자가를 통해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야 말로 “나누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놓고 해석하기를 십자가는 “보태기 표시”이고 조금만 옆으로 기울여 놓으면 곱하기 표시가 되어 우리 인생에 플러스가 되고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으니 곱하기의 축복이 있다고 합니다. 한 십자가 속에 보태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가 다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고 여러분에게 아니 나에게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넷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는 정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에 십자가가 그 교회의 중심부나 꼭대기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모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달려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 장 18 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 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란 무릇 큰 가르침을 말합니다. 십자가가 가르치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하려는 십자가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주는 큰 가르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말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람을 사형시키는 형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데 사형시키는 도구로 알고 있습니다만 십자가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고대에 페니키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죄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에서 형벌은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나무를 가로 세로로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사람을 눕혀 놓고 못을 박아 고정시켜 놓고 그 십자가를 세워 놓음으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고 죽게 하는 참혹한 형벌입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인간에게 고통을 많이 당하게 하여 죽게 하는 사형의 방법들을 많이 개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의 방법 중에 팔팔 끓는 기름가마에 집어넣어 죽이는 방법이 가장 잔혹하다고 하지만 이 기름사형법은 십자가형에 비하면 무척 인간적입니다. 왜냐하면 팔팔 꿇는 기름에 넣어지게 되면 1-2 분도 안 되어 죽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통당하는 시간이 적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형에 처해지는 방법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합니다만 이것 불이 지펴지고 태워지면 2 - 30 분 안에 다 장작이 타올라가면서 숯 검덩이가 되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2 - 30 분간만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죽고 싶어도 바로 죽지 못하고 하루 이틀을 죽지 아니하고 고통을 당하고 당하다가 죽는 방법이기 때문에 죄악의 인간이 개발해 놓은 방법 중 가장 최고로 고통 중에 가장 최상의 고통을 주어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페니키아에서 시행했던 십자가형은 무척 효과가 좋아서 페니키아의 왕은 이 십자가형벌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후일 알렉산더 대왕이 이 페니키아를 공격합니다만 7 개월간 공격하였어도 점령을 하지 못하다가 점령하자마자 주민 3 만여 명 중에 남자들은 무참히 죽여 버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고 도시 전체는 다 불태워 재와 숯검덩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알렉산더는 페니키아를 점령하고 난 다음 도대체 왜 이 쪼그마한 국가가 그렇게  끈질기게 조직적으로 대 알렉산더 군대에 무려 7 개월 간 저항을 하였을까를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페니키아에 있는 십자가형벌이 백성들을 잘 조직하고 다스리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고 십자가 처형방식을 수입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 뒤에 십자가형틀은 고대의 각 나라에서 수입되었고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십자가 형벌제도를 수입하여 자기네 나라 식민지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이 십자가형틀을 아주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과 자기네 식민지 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중범죄를 범한 로마시민에게도 이 형틀을 사용하였는데 너무도 끔찍하고 참혹하여 로마시민들에게는 십자가형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1분이라도 빨리 죽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죄수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웃돈을 찔러 주었는데 그때 병사들은 돈을 받고 죄수의 다리를 꺾어 버립니다. 그러면 다리가 꺽여지면 호흡이 막혀 금방 죽게 됩니다. 로마제국은 이 십자가형틀을 시행해 보곤 너무도 끔찍한 죽음이라 콘스탄틴 황제때부터 이 방법을 폐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십자가형틀에 달려 참혹하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시고 끔찍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중심으로 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 장 23 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와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였을 때 금방 반응이 왔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유대인들은 무슨 반응이 왔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거리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stumbling block입니다. 걸림돌이라 그 말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걸림돌로 생각하였을까요? 신명기 21 장 22 절과 23 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단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 죽은 자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을 보는 것이나 그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걸림돌과 같아서 피하려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걺어지고 죽으심으로 속죄와 구원을 이루셨다 전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면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지, 어찌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린 자가 되어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를 대신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회피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였을 때 독립투쟁을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독립과 해방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수없이 많은 동족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자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사용하는 형틀로 참으로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형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방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고린도전서 1 장 23 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길은 어떠했습니까? 미련하다 여겼습니다. 십자가란 로마당국이 흉악한 죄를 지었을 때만이 달려 죽게 하는 것인데 왜 미련하게 그렇게 큰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리느냐 그 말입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되면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인데 왜 미련하게 죄를 짓되 십자가를 못박혀 죽을 만큼 미련한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짓을 하고 자기가 뿌린 씨앗 때문에 자기가 그 형벌을 자초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미련하냐 그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여러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헤롯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실로 여러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십자가를 정면으로 짊어지시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이나 인근에 사는 로마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술 한 잔 앞에 놓고서 유대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안주꺼리로 삼으면서 분명 그런 얘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예수 거 참! 미련한 작자야!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뻔히 알면서 왜 피하지 않았느냐? 예수가 자신의 말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당시 지배계층의 비위를 건드렸으니 당연히 그들은 로마총독들과 사바사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저 죽을 짓을 왜 하느냐고 만일 예수가 약간이라도 그들을 칭찬해 주고 비위를 맞추어 주면 좋아할 것이고 예수에게 공로패를 줄 것이고 예수는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정면으로 그들과 충돌하여 십자가를 자초하였으니 예수는 얼마나 지혜가 없는 자냐?” 하면서 로마인들은 예수의 미련성에 대해서 얘기하였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인들에게는 바보 같은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깨우치지 못한 이방인과 유대인에게는 무어라 합니까? 멸망 받을 자라 합니다. 고린도전서 1 장 18 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는 한 마디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로마인과 헬라인, 걸림돌로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십 자가가 지닌 구원의 능력을 모르기에 멸망당할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생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십자가의 도를 받아드리지 않고 십자가를 미련하게 여기고 거치는 것으로 여기는 그들에게는 멸망만 있다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그들의 지혜를 무엇이라 합니까? 고린도전서 1 장 25 절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 하나 인간의 최고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도 훨씬 못하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어리석음과 약함을 보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두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한 선생님은 남선생님이었고 다른 한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반은 유도반과 야구선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수업분위기가 산만하여 초점이 선생님께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남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반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었습니다. 그러자 주먹으로 교단 옆에 있는 벽을 힘차게 내리쳤습니다. 쿵 소리가 났습니다. “새끼들 떠들면 죽어!” 일시적으로 떠드는 것은 중지되었지만 조금 있다가 아이들은 계속 떠들었고 선생님은 주먹으로 학생들을 때려 해결하였습니다. 유도반과 야구선수들은 그렇게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선생님과 다툼이 계속 일어났고 그 선생님만 들어오면 수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새 여선생님이 들어왔을 때에도 아이들은 얼씨구나 하고 더 떠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야단을 치지 않고 수업진행을 중지한 채 창문 밖을 우두커니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학생들은 또 그런 것을 보면서 더 떠들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야단을 치지 않은 채로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그러자 야구선수들 중에 하나가 “야 이 새끼들아 니들이 떠드니까 선생님이 우시잖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애들이 조용해졌습니다. 그 선생님은 조용조용 말씀하셨지만 차라리 잘지언정 애들이 떠들지는 않았습니다. 한 선생님은 첫 수업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하겠다고 주먹으로 벽을 치고 나중에는 이단옆차기로 까지 갔지만 수업의 분위기는 끝까지 잡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침묵을 하고 눈물을 흘린 선생님의 수업은 유도반과 야구선수들에게 까지 수업이 잘되었습니다. 주먹과 이단옆차기보다도 침묵과 눈물이 훨씬 더 센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합쳐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려고 하는 정보를 듣고 “요것들이!” 하고 괘씸하게 여기면서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던 이들을 잘 조직하여 그들의 손에 칼과 창과 화살을 들게 하고 싸우게 하였더라면 그래 예수님을 잡으려고 몽둥이와 칼을 들고 오는 무리들에게 화살을 써서 제압을 하고 그들을 보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는 자객을 보내어 다 살해하고 대규모의 군중들을 선동하여 로마의 총독부를 공격하여 제압을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이 하늘의 능력을 사용하여 하늘의 열 두 영이나 되는 군단을 불러 로마의 제국의 병사들을 다 물리치고 유대나라의 독립을 이루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를 구원주로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훗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독립영웅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예수님이 칼과 창으로 로마제국을 점령하고 마침내 유대나라에 복속시켜 반대로 로마제국을 유대나라의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는 유대나라의 영웅으로는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그런 예수님 이름을 부르고 울면서 회개하고 예수님께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셔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강보에 둘러쌓여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는 것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아무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죽어가면서 인간들이 주는 온갖 모욕을 다 받으시면서 인간들에게 침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죄인이 사형을 받는 형틀에 달려 죽어가면서 인간이 지는 모든 죄를 대신 다 뒤집어쓰고 저주받은 자가 되어 피 흘려 죽어가면서 인간이 지은 죄를 다 뒤집어쓰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능력있는 일을 하시리라고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세상의 그 누가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힘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으로 피흘리며 죽어가는 그런 짠한 모습으로 그 이전에 충분히  도망갈 수도 있고 그 죽음의 형틀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는데 미련하게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그것도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런 연약함과 미련함이 어떻게 인류의 역대 수백억 수천억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감격하게 하고 무릎꿇게 하고 울게 하고 몸 바쳐 헌신하게 하였을까요?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선교사가 전해 준 성경책을 읽고 예수님의 행적이 들어난 복음서를 읽고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들이 성경책에서 만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여 기꺼이 순교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수천의 수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부은 것입니다.


무슨 철저한 기독교적인 훈련과 연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저들이 수없는 설교를 들은 것도 아닌데 그저 예수님의 삶이 기록된 복음서를 읽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바친 것 아닙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이 누구이길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무엇이길래 유대인들은 거치는 것으로 보고 이방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그 십자가가 그렇게 수만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그런 능력이 어디서 연원이 되는 것입니까? 나라에서는 무지렁이들이 몰라서 사교를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고 만일 앞으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고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 상을 한번만 짓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관용을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는데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줄에 줄을 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읍한 이들이었습니다. 감격하게 되어 예수님 때문에 죽고 예수님 때문에 죽을 목숨이 단 하나밖에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지 않는데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참으로 인간 편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연약함 속에 인간 편에서 보면 참으로 미련하고 바보스런 일인데 바로 그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은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신비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었습니까? 24 절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놀라운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보고 미련하다고 여겼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가 거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능력으로도 미칠 수 없는 최고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던지 죽던지 자신은 십자가라고 하면서 이 십자가만을 전하고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 장 14 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 하나님의 신비를 넘어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지혜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인간의 죄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뒤집어 쒸우고 그를 저주받은 자가 되게 하고 그를 최고의 형벌을 받게 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천하가 귀합니까? 예수님이 귀합니까? 독생자 예수님이 훨씬 더 귀합니다. 천하야 까짓껏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고 대신에 내 인생을 구원하신 것은 천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지만 그 안에 날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 가운데는 십자가가 주는 감격이 희미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십자가는 당연히 교회에 있어야 할 상징으로서 그저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감격을 주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실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십자가를 잃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도 잃게 됩니다. 십자가를 잃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도 잃게 됩니다. 구약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모세가 탄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수기 21 장 8 절에서 9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의 놋뱀은 위력이 있었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사람들은 놋뱀을 볼 때 살았습니다. 이 땅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실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살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이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이 세계에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것의 시초는 지극히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러시아에서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하루 열 네 시간씩 노동하고 병까지 들었습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온 식구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매일 채찍과 혹독한 추위와 고난 속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몸은 이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아서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길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나갈 길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갈 길은 억 만 분의 일도 없습니다. 일어날 힘과 소망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솔제니친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허연 분이 나타나셔서 막대기를 가지고 십자가 성호를 그어주고 갔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솔제니친의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소망과 확신이 왔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새 힘이 솟았고 소망이 생겼으며 병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솔제니친은 병도 치료받았습니다. 1 년 후에 러시아 정부는 그를 축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솔제니친이 쓰는 작품들은 모두 십자가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증거하는 작품을 쓰고 노벨문학상까지 받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그 안에 우리 인생의 모든 소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만이 아닙니다. 생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이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참 사랑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구원을 얻었듯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에 소망과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강진읍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시고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사시고 주님의 그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며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저희로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살게 하여 주시고 십자가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 어떠한 순간이든지 십자가 바라보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7:30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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